소설리스트

7. 계약의 성립 (7/88)


#7. 계약의 성립
2022.11.22.


칼리드는 과연 저 조그마한 입술로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기대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울리지도 않게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었지만, 그녀가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째서인지 전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라울을 적대하는 그녀의 말 덕분인지.

혹은.


“라울 황자가 제게 청혼하는 걸 거절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주세요.”

저런 소리를 꺼내며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때문인지.


 


“그래서 굳이 나를 선택한 거군?”

황자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선 그만한 이유가 필요할 테니까.

진짜로 그녀가 금광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보자면.

그 유용한 정보를 여태 밝히지 않은 것도, 라울이 지금보다 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게다가.

익명의 편지를 보낸 것은 소문만 무성한 2황자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자인지 시험해 볼 요령이었겠지.

감히 제국의 황자를 떠볼 생각이었다니.


‘하, 이건 어이가 없는 건지, 재밌는 건지…….’

그 사실에 화가 나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 웃음만 나온다.

칼리드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러자 벨리아가 맞은편에 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벨리아 또한 그가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얘기를 나눠본 2황자 칼리드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그를 반드시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더더욱 확고해졌다.


“물론 그냥 도와달라는 건 아니에요. 편지에도 적어 두었지만, 금광의 정확한 위치가 그 대가고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거래를 하자는 거죠.

벨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큭…….”

내세울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몹시 당당했다.

허무맹랑한 말이라도 저렇게 뻔뻔하게 얘기를 해 오면, 이 우스운 거래에 응해 그녀의 말을 확인해보고 싶어지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칼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웃음에 조금 기분이 상한 벨리아가 물었다.


“왜 웃으시죠?”

“아아. 생각지도 못한 얘기라서. 라울 녀석이 꽤 자존심 상하겠군.”

벨리아는 다시 한번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전 절대로 라울 황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확고한 의지가 깃든 대답에 칼리드가 물었다.


“생각해둔 방법은 있나?”

“저와 연애하실래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그 엉뚱한 대답에 칼리드는 황당함을 숨기지 않았다.


“하. 라울은 안 되는데 나는 괜찮다는 건가? 취향이 이상하군. 보통은 라울 녀석을 선택할 텐데?”

황제가 아끼는 아들.

차기 황제에 가장 가까운 자.

어떤 수식어를 꺼내어 봐도 그녀가 라울을 거절하는 게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진짜로 연애하자는 건 아니에요. 그저 연애하는 척하면서 그가 제게 한 청혼을 포기하게 만들고 싶은 거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벨리아도, 칼리드도 알고 있었다.

연애하는 ‘척’만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하. 그래서 금광의 위치를 걸었군. 추문 정도가 아니라 자칫 그대에게 코가 꿰일 테니.”

칼리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들은 그저 그런 귀족들끼리의 은밀한 관계처럼 넘어갈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자와 왕국의 공주가 그저 연애만 하다 헤어진다? 분명 온갖 추문에 휩싸일 게 뻔했다.


“게다가…….”

1황자가 청혼한 여자와 2황자의 스캔들이라니.

온갖 소문이 난무한 칼리드에겐 그저 가십처럼 따라다닐지 몰라도,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벨리아에게 이런 추문은 치명적이다.

분명 그녀를 시기하는 자들이 온갖 더러운 말을 더해 소문을 부풀릴 테니까.


“나보단 그대가 더 감당하기 어려울 거야. 라울 녀석과 결혼하지 않는 대가는 꽤 크지.”

소문이 무성했던 로니카 왕국의 아름다운 벨리아 공주.

실제로 직접 본 벨리아는 소문보다 더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옅은 푸른빛이 도는 은발과 보라색의 눈동자.

청초하고도 가녀린 체형과 특유의 지켜주고 싶은 아련한 분위기까지.

미색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칼리드였지만, 벨리아를 처음 마주하자마자 과연 소문이 날 만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유명인사가 1황자인 라울을 마다하고 악명이 자자한 안하무인 망나니 황자와 연애라니.


“까딱하면 그저 연애만 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나와 결혼할 수도 있어.”

칼리드가 경고를 던졌다.

이게 얼마나 우스운 선택인지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하지만 벨리아는 상관없다는 듯 이를 악물며 말했다.


“라울 황자와 결혼할 바에는 당신과 하는 게 차라리 나아요.”

끔찍하다는 듯 치를 떠는 그녀를 조금 묘한 눈길로 바라보던 칼리드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저보다는 전하의 의사가 중요하죠. 전하께서 하신 말처럼 자칫하다가는 정말로 저와 결혼해야 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대가 원하는 건, 라울 녀석이 공주에게 청혼한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거겠지?”

“네. 맞아요.”

“그리고?”

그의 시선이 무언가를 파헤치려는 듯 예리해졌다.


“그게 전부일 리 없지. 그대가 숨기고 있는 진정한 속내를 말해.”

벨리아는 칼리드를 붙잡아야 했다.

그처럼 자신의 필요와 정확하게 부합하는 인물이 없었다.

황자가 세 명 정도 더 있었다면 다른 황자를 찾아보기라도 했겠지만, 지금 라울에게 비등하게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칼리드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저희가 신뢰를 쌓은 관계는 아니죠. 이건 인정하시나요?”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저도 모든 것을 말씀드리긴 어려워요.”

만약 진심을 말했다가 칼리드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한다면…….


“만약 이번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그 이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좋겠지요.”

벨리아는 우선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이봐 공주.”

칼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내게는 아무런 이득도 주지 않아.”

현재 조사단이 조사 중인 곳에 금광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칼리드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조사단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금광의 위치를, 공주가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어떻게 하지? 나는 지금 그대가 제시한 실체도 없는 조건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데.”

벨리아가 꺼낸 말 중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흥미로운 대화가 될까 해서 왔더니. 정말 이게 다라면 실망스러울 것 같군.”

“전하께서 라울 전하보다 먼저 금광을 발견한다면 제국에서의 위상이 많이 올라갈 거예요. 게다가 그 대가로 약간의 추문을 만들어 저와 1황자가 결혼하지 않도록 하는 건, 전하껜 정말로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 아닌가요?”

벨리아는 자신과의 계약 연애로 그가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큰 힘이 될지도 모르는 로니카의 공주와 결혼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데다가, 그를 거절한 여자와의 로맨스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되겠죠.”

이것은 벨리아의 이름부터 그녀와의 소문까지.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이용하든 전부 허락하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그에 칼리드가 다시금 재밌다는 듯 눈을 빛냈다.


“만약 일이 틀어져 전하와 제가 결혼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에요. 어차피 황족은 정략결혼이 대부분이고, 상대가 로니카의 공주라면 오히려 상당히 이득이죠. 아. 혹시 따로 정인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그런 것 없다.”

“그럼 문제 될 것 없죠.”

여기까지 말한 벨리아가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그러곤 아주 해사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음 지었다.


“음. 혹시라도 더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솔직히, 어이가 없군.”

제국의 황자를 상대로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셨을 거예요.”

생각할수록 황당했다.

금광의 위치에 대해 큰 이득이 없다고 말하자마자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이름을 걸고, 어쩌면, 그녀의 미래까지 걸고 거래를 하자며 제안할 줄이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지금 라울 녀석이 열심히 쫓아다니는 로니카 왕국의 공주라니.”

남들은 그의 비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데.


‘그걸 거절하기 위해 날 선택하다니…….’

셈을 제대로 못 하는 공주인가?

하지만 똘망똘망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모습을 보면 그리 어리석어 보이진 않는데.

칼리드는 재밌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벨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연애라고 했나?”

“결혼이면 더 좋고요.”

“당돌하군.”

그렇게 말하며 칼리드는 무척이나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도 당돌하지 않으면 원하는 건 얻어낼 수가 없어서요.”

벨리아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칼리드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비릿하게 웃었다.


“솔직히 공주를 황자비로 맞이한다는 건 내게도 무척 탐나는 조건이야. 내가 고를 수 있는 결혼 상대 중 공주보다 나은 이도 없을 거고.”

라울이 벨리아에게 공들이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정도로 그녀가 가진 상징성은 무척 컸다.


“게다가 덤으로 라울 녀석이 분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그보다 더 재밌는 일은 없겠지.”

칼리드가 몸을 앞으로 숙여 벨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그럼 공주가 원하는 대로 결혼이라도 해 줄까? 응?”

그는 자신이 마치 악당이라도 되는 양 벨리아를 향해 빈정거렸다.

마치 그녀가 자신을 선택할 리 없다는 것처럼.


“그런데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후회한다고 해도 무를 수 없을 테니까.”

그가 나지막이 마지막 경고라며 속삭이는 말에 벨리아는 오히려 눈까지 사르르 접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네.’

이 순간 갑자기 떠오른 클로제의 말.

그때엔 우스갯소리로 넘겼었지만,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자신이 훨씬 이득이라는 계산이 끝났을 텐데도 이렇게 여러 번 경고를 던지는 사람이다.


‘생각보다는 다정한 편인가……?’

정말 나쁜 사람은 듣기 좋은 말만 꺼내며 자신을 선택하라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벨리아에게 후회할 결정은 하지 말라고,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기회를 주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해 온다.

벨리아가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결혼해요, 우리.”

그녀의 말에 오히려 칼리드가 더 당황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더욱 재밌다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이 결혼으로 우린 서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반대할 이유가 없죠.”

“후회하지 않겠나?”

“물론이죠.”

벨리아의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칼리드 전하.”

그녀의 말에 잠시 눈썹을 찌푸리던 칼리드가 조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젠 전하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 순간부터 우린 연인이니까.”

“……연인?”

생소한 단어였다.

입 밖으로 꺼내자 더 어색했다.

단어의 한 글자 한 글자가 전부 입에서 까끌거리는 기묘한 느낌.


“이왕 하는 연극, 더욱더 완벽하게 꾸미는 게 좋겠지.”

사실 칼리드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계획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진행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의 반경에 뛰어 들어온 벨리아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좋아요. 그럼 계약 성립이군요.”

벨리아가 그에게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서로 나쁘지 않은 조건의 거래였다.

벨리아는 자신이 검이 되어줄 수 있는 자를 손에 넣었고, 칼리드는 꽤 괜찮은 결혼 상대를 얻었으니까.


“조만간 왕성을 다시 방문할 때엔, 세상에 그대의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처럼 맞이해 주길 바라.”

칼리드가 벨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곤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벨리아.”

그의 입에서 나온 그녀의 이름이.

어울리지도 않게 더없이 달콤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