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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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안
2022.11.19.
벨리아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이건 분명 어떤 숨겨진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방금, 뭐라고…….”
마주친 푸른 눈동자에서 이채가 반짝였다.
“깜찍한 짓을 했더군. 그 편지 말이야.”
그가 편지를 받았다. 게다가 그 편지의 발신자가 자신이었음도 알아차렸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벨리아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울렸다.
긴장이나 두려움과 같은 떨림이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한 희열이었다.
드디어 복수의 첫 단추를 끼웠다는 고양감이 벨리아의 심장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발갛게 상기된 볼을 감추지 못한 채, 벨리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칼리드 황자…….”
반드시 그를 잘 구슬려 같은 편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곳까지 도달한 것으로 그의 능력은 증명되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저 귀찮은 라울을 떼어놓고 단둘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였다.
“무례하구나. 칼리드.”
그때 칼리드가 벨리아의 귓가에 무어라 소곤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라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거센 손길로 그녀를 붙잡은 그의 손을 떼어냈다.
“다시 한번 묻지. 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라울은 칼리드에게 벨리아가 보이지 않도록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늘 여유롭던 그가 미묘하게 날카로운 태도를 보였다.
‘아?’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벨리아는 자신이 칼리드 황자를 선택한 것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2황자에게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확실하다.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는 라울을 보며 이상하다 느낀 게 그녀만은 아니었는지, 칼리드도 한껏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어째 아주 간단하게 저 속을 뒤집어 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지 않나.
“카지노나 돌아다니면서 도박이나 하고 있을 네놈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여기까지 왔다는 소린 안 통해.”
“원래 내가 뭘 하는지 그렇게 관심이 많았었나?”
“칼리드.”
한껏 비아냥거리는 제 동생의 말에 라울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그래. 저 목소리와 저 말투.
그는 모든 것을 제 아래로 두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에서 평생을 자라온 남자였다.
그렇기에 그것은 분함이나 억울함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부딪혀 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어찌 보면 순수하기까지 한 부름이었다.
벨리아는 그가 2황자를 견제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그가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견제는 하되, 속으로는 그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것 또한.
‘그렇기에 오히려 2황자를 선택한 게 옳았어.’
그가 제 위치에 만족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그때 그의 목을 물어뜯으리라.
벨리아가 제 시야를 가린 라울의 등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흐음. 원래는 그냥 구경이나 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거 형님 얼굴을 보니 그냥 갈 수가 있어야지.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왕성에 방문해 로니카 국왕께 인사라도 해야겠군.”
칼리드가 과장된 몸짓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주 우연히 벨리아 공주와도 마주친 것도. 뭐, 말하자면 인연이니까.”
칼리드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내뱉은 말에 벨리아는 번뜩 눈을 빛냈다.
그가 왕성에 들어온다는 것은, 라울을 떼어놓고 그와 둘이서 대화를 나눌 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울이 로니카의 왕성에서 공주의 사적인 만남을 방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
꽤 괜찮은 묘안이었다.
그래서 벨리아는 라울이 그의 왕성 방문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깐 미처 몰랐습니다. 제국의 2황자인 칼리드 전하셨군요. 로니카 왕국의 왕성은 제국에 늘 우호적입니다. 2황자 전하의 방문 또한 그렇지요.”
정식으로 성에서 마주친 게 아니기에 약식으로 치마만 살짝 잡으며 벨리아가 그의 방문을 허락했다. 이건 분명한 기회였다.
“공주와는 꽤 말이 잘 통하는군.”
척하면 척이라고.
칼리드도 그 편지를 보낸 벨리아가 보통내기는 아니리라 생각하긴 했다.
지금도 잽싸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틀어버리지 않았나.
“칼리드. 분탕을 칠 작정이라면 얌전히 돌아가. 여긴 제국이 아니니까.”
라울이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던진다.
“이봐, 형님. 내가 분탕을 칠지 얌전히 있을지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해. 응?”
칼리드는 슬쩍 허리를 꺾어 라울이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벨리아를 바라보곤 과장되게 말했다.
“게다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공주님께서 내 방문을 환영한다고 하잖아? 그걸 거절할 수는 없지. 안 그래, 형님?”
그의 말에 라울은 벨리아의 앞에서 무어라 크게 반박을 할 수 없었는지,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려버렸다.
* * *
벨리아는 데릭을 만나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두고, 1황자 라울과 2황자 칼리드를 대동하고 왕성으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는 목적을 이루진 못했지만, 따지고 보면 소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데릭이 있는 곳이 주점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그동안 계속 반응을 살폈던 2황자와도 만났다.
양손에 유용한 패를 하나씩 쥔 기분이었다.
“하하. 로니카에 온 것을 환영하오.”
로니카의 국왕은 갑작스레 찾아온 2황자를 마주하고는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제국의 황자 두 명이 같은 시기에 왕국을 방문했다는 건 생각보다 외부에 큰 파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황태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들은 차기 황위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였으니까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현재 제국과 함께 금광을 공동 조사를 하고 있었기에, 자칫하다가는 그들의 세력 다툼에 로니카 왕국이 끼어든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런 이유로 2황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무작정 환영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약간의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는데. 어찌 생각하는가?”
국왕은 깊은 고민 끝에 오늘은 2황자가 아니라 벨리아의 지인이 방문한 것으로 하고, 그가 정식으로 로니카 왕국을 방문할 날짜를 결정했다.
이후 칼리드의 기사단이 모두 수도에 모였을 때, 오늘의 만남은 없었던 것처럼 대대적인 환영식을 열 계획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날짜에 맞춰 정식으로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칼리드 또한 국왕의 결정에 동의했다.
이런 식으로 왕성에 들어와 머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이건 그저, 라울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 벌인 일이었을 뿐.
‘뭐. 겸사겸사 공주와도 할 얘기가 있었고.’
사실 칼리드는 편지에 적혀 있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금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하긴 했으나, 그냥 던진 이야기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엔 누군지 한번 알아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어쨌든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었고, 누군가의 장난질이더라도 짜증은 나겠지만 딱히 손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발신자가 로니카 왕국의 벨리아 공주임을 알게 된 순간,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편지에 적힌 말의 무게도 무거워졌다.
게다가 라울이 현재 애타게 쫓아다니는 여자가 자신에게 몰래 연락을 해 오다니.
그것도 라울을 골탕 먹이려는 숨겨진 의도를 명백히 담고서.
‘재밌군.’
칼리드는 창가를 등진 채 팔짱을 끼고 서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진정한 속내가 궁금했다.
“반가워요.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죠. 벨리아 로니카예요.”
그때 응접실에 들어온 벨리아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왔군.”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칼리드의 표정은 세간에 퍼져 있는 소문처럼 무척이나 싸늘했다. 게다가 황족 특유의 거만한 분위기까지.
노을의 붉은 그림자가 어린 얼굴 사이로 언뜻 보이는 시선은 마치 베일 듯 날카로웠다. 그가 1황자인 라울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오로지 시리도록 투명한 청안뿐이었다.
“칼리드 잉고트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창가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눈에 담은 벨리아가 다시 한번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시간 아까우니 본론만 얘기하지.”
칼리드가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앞에 있는 테이블에 툭, 던졌다.
피차 오늘 처음 본 데다가 쓸데없는 안부를 나눌 사이도 아니니 곧바로 본론이나 꺼내는 게 낫다.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거. 공주가 보낸 거지?”
슬쩍 눈동자만 움직여 편지를 확인한 벨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무슨 소리이신지?”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
보란 듯이 흔적을 남겨둔 주제에 모른 척하는 표정이 가증스러웠다.
칼리드가 다시 팔짱을 끼곤 입을 열었다.
“이 편지를 내게 보낸 이유가 뭐지?”
그의 물음에 벨리아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미소 짓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새하얗고 조그마해 비실거리는 주제에.
겁도 없이 자신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녀를 보며 칼리드가 꽤나 재밌다고 생각할 무렵.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지척까지 도착한 벨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맞아요. 제가 보냈어요.”
벨리아가 산뜻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이유를 묻기 전에 먼저 제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을 주셔야지요.”
금광의 위치를 알려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는 것에 대한 대답을.
“공주.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 그러니 떠보는 건 그만하고 속내나 말해.”
칼리드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감히 제국의 황자를 이곳까지 찾아오게 만든 것만으로도 그녀를 인정해줄 만도 하다.
하지만 봐주는 건 여기까지.
편지에 적혀 있었던 그 내용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니카의 공주인 그녀가 농담처럼 던질 사안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왕성에만 있었다는 여자가 어떻게 금광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칼리드가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는 입을 열었다.
“정보는 어디서 얻었지?”
그녀의 태도를 보아하니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벨리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게 엄청난 조력자가 있는 것인 양 더 여유로운 태도를 꾸며내었다.
“그걸 쉽게 말해줄 수는 없죠.”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상관없다는 듯 벨리아가 확신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전 진짜 금광의 위치를 알아요. 굳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전하께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 또한, 그 정보가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잖아요?”
그는 자신의 손을 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하께서도 1황자 전하에게 한 방 먹이고 싶지 않으신가요?”
“뭐? 하하하!”
비릿하게 웃으며 건네는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이 점점 흐려질 때 즈음.
칼리드가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역시나.
벨리아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제가 바라는 건…….”
그녀의 입꼬리가 무척이나 요사스럽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