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어느 날의 오후 (4/88)


#4. 어느 날의 오후
2022.11.12.


한가한 오후.

과거의 벨리아는 이맘때 즈음 라울과 늘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그땐 그의 청혼에 단박에 긍정의 답을 보냈고, 일사천리로 약혼의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으니까. 정말 뭐에 씌었던 것처럼 온 세상이 라울로 가득했었다.

그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처럼 한없이 다정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로니카 왕국에 머물 때는 바쁜 와중에도 매일 시간을 내어 그녀를 만나러 왔으며, 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꾸준히 애정으로 가득한 연락을 보내왔다.

몇 번은 벨리아가 보고 싶다며 참지 못하고 로니카 왕국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제국에 도착했을 때도…….’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곧바로 달려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벨리아를 보는 라울의 시선은 늘 따스했다.

그게 다 입에 발린 소리와 꾸며진 행동이었다는 것은 황후가 된 다음에야 깨달았지만.

그러니 과거로 돌아온 벨리아는 이 소중한 시간에 라울 따위를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가 자꾸 멋대로 찾아오는 것도 제게는 민폐였다.


“언니. 자꾸 딴생각할 거야?”

“으응? 아, 미안해.”

“흠……. 수상해.”

클로제가 볼을 부풀리며 눈을 세모꼴로 떴다.

그에 벨리아는 자연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웃으며 물었다.


“뭐가 수상해.”

“혹시 뭔가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어?”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속으로 무척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클로제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닌 척해도 이 클로제는 못 속이지!”

클로제가 쿠키를 쏙 집어 먹더니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벤 경과 둘만 몰래 얘기하는 거, 내가 다 알고 있거든?!”

대체 얜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벨리아는 조용히 클로제를 추궁했다.


“……너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야아!”

몰래 훔쳐봤다고는 말 못 한다.

클로제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벨리아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웃어버리곤 다시 물었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면서 다른 사람한테 말한 건 아니겠지?”

“에이, 언닌 날 뭐로 보고! 당연히 입 꾹 다물고 있었지!”

그러면서 클로제가 씩 웃더니 입을 손으로 가리는 시늉을 한다.


“하아…….”

그나저나 정말로 2황자에게선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최근 벤과 자주 회의를 이어간 것도 그에게서 어떤 반응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벌써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런데 그 어떠한 반응도 없다니.


‘……설마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버린 걸까?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나.’

벨리아가 팔꿈치를 테이블에 받치고는 손에 얼굴을 기대었다.

볼이 눌리면서 뚱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으음. 정말 수상하단 말이지. 내 예민한 감이 말해주는데! 이건 남자와 관련된 게 분명해!”

클로제가 씨익 웃으면서 소리쳤다.

벨리아는 속으로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곤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얜 대체 누굴 닮아 이렇게 영특하고 눈치가 빠른 걸까.

그런 벨리아의 반응을 살펴본 클로제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접고는 물었다.


“언니. 설마 1황자랑 결혼할 마음이 생긴 건 아니지?”

……조금 전 했던 말은 취소다.

벨리아는 다시 한번 딱 잘라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난 라울 황자와는 절대로 결혼 안 해.”

“그럼 뭐야아.”

자신이 짐작한 사실이 틀렸다는 게 민망한지 클로제가 의자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퉁명스럽게 묻는다.


“클로제. 너 라울 황자보다는 칼리드 황자가 훨씬 괜찮다고 했었지?”

뜬금없는 벨리아의 질문에 클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씨익 웃는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몸을 바짝 가까이 붙이며 물었다.


“왜에? 2황자한테 관심 생겼어?”

“……아니다. 내가 지금 너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벨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을 회피하려는 벨리아의 기색을 재빠르게 눈치챈 클로제가 한 번 더 보챘다.


“아이참! 언니이!”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빛내는 제 동생을 보며 벨리아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냥. 지난번에 2황자에 대해 이야기했었잖아.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진짜?!”

클로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반동으로 의자가 뒤로 넘어졌지만, 클로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넘어진 의자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언제부터?!”

언제나 주변에 무심하던 언니였다.

그런 언니가 누군가를 궁금하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사실이 기꺼워 클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황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어디야.’

사실 클로제는 보고 만 것이다.

라울이 벨리아를 등지고 서서 짓던 묘한 미소를.

그것은 결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분명 첫눈에 반했다고 했으면서.

하지만 사람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던 언니는 그가 눈앞에서 미소 짓고 사랑한다고 얘기하면 그게 모두 진심인 줄 알았다.

아무리 언니가 행복하면 됐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라울 황자의 그 묘한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클로제는 조용히 쓰러진 의자를 세우곤 자세를 똑바로 했다.


“나 들을 준비 됐어. 뭐든 얘기해 봐, 언니.”

벨리아는 어쩐지 어른스러운 클로제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으니 적당히 다른 이야기로 돌려야 했다.

그렇게 벨리아와 클로제는 장난스럽게 2황자에 대한 가십거리를 꺼내며 대화를 이어갔다.

정말로 즐겁고도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 * *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산세와 파란 하늘.

누가 보아도 절경이라 부를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풍경을 지켜보는 남자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푸른 눈동자만 좌우로 움직이며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라울의 것과 같은 색이었지만, 느껴지는 온도가 전혀 달랐다.

아마도 더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저 차가운 눈빛 때문이리라.


“전하. 이제 어찌할 예정이십니까.”

“철수한다.”

 

 
2황자 칼리드는 로니카 왕국의 어느 작은 마을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조사단에게서 시선을 떼곤 몸을 돌렸다.

무슨 좋은 게 있길래 라울이 로니카 왕국으로 쪼르르 달려갔는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별 건 없었다. 게다가.


“금광은 이곳에 없다.”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퍼졌다.


“하지만 금광을 1황자 측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그럴 리가.”

그의 단호한 대답에 아시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런 미약한 반응이라니. 가능성이 적긴 하겠군요.”

아시드는 자신이 들고 있는 마도구를 내려보았다.

복잡한 수식이 걸려 있는 원반 모양의 마도구에선 희미한 빛줄기만 내비칠 뿐이었다.

로니카 왕국과 잉고트 제국의 합동 조사단이 활용하는 수색용 마도구는 특정 광석에 한해 광범위의 반응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지고 온 마도구는 그것보다도 훨씬 고위 마법이 걸려 있는 물건이었다.

수색 가능한 범위는 좁았으나 더욱 확실한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마도구가 고작 이 정도의 빛으로 반응했다는 건, 이곳에 금광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규모의 금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사단의 보고서도 이미 전부 확인했다. 이곳에서 기대했던 정도의 금광이 발견되기는 어렵겠지.”

“허탕 쳐서 1황자 측 놈들이 무척 화가 나 있을 것을 생각하니, 어째 조금 즐겁습니다.”

아시드가 슬쩍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칼리드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래. 그러니 이곳에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럼 철수 명령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서두르라고 해.”

“예!”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아시드가 기사들에게 다가가려던 그때.

기사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와 아시드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지?”

그는 사정을 설명하고는 품에서 편지 뭉치를 꺼내어 자신의 상관에게 내밀었다.

종종 이런 식으로 황자궁에 도착한 편지들을 취합해 받곤 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시드가 그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곤 칼리드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기사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기사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으, 조금 이상한 편지가 있어서……. 바로 전하께 전달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상한 편지?”

그의 말에 아시드가 받은 편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아무런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편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제가 처리하려고도 했으나, 우선은 보고 드리는 게 먼저인 듯하여.”

기사가 황궁에서 편지를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칼리드는 황궁에 머무는 시간보다 밖에 나와 있는 날이 많았기에, 황자궁으로 도착하는 편지들은 늘 한 공간에 모아두었다가 오늘처럼 기사가 발신인을 확인한 후 적당히 걸러내 가져오곤 했었다.

보통은 귀족가에서 보내온 초대장이거나 투자를 부탁하는 편지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종종 이렇게 아무런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편지들이 끼어있을 때가 있었다.

아주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흠? 내용은 확인하지 않았나?”

아시드는 의아한 듯 물었다.

칼리드에게서 미리 어떠한 편지가 올 것이라는 언질이 없을 경우, 이런 수상한 편지는 사전에 내용까지 확인한 후 전달하거나 폐기하곤 했다.

하지만.


“실링에 쓰인 왁스가 제국에서 나는 게 아닙니다.”

기사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기사는 늘 본인이 편지 운반을 담당했기에 아는 게 많았다.

이건 결코 제국에서 쓰이는 실링 왁스가 아니었다.

이렇게나 출처가 불분명한 편지가 어떻게 황자궁까지 왔는지도 의문이었다.


“처음엔 편지의 내용을 확인할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어서 확인을 보류하고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어쩐지 이건 그저 눈에 띄어보고자 보내는 의뭉스러운 편지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막상 실제로 적힌 내용은 별 볼 일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으나,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자신이 편지를 열어보았다가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보다는.

기사는 뻣뻣하게 서서 아시드의 결정을 기다렸다.

아시드가 다시 한번 발신인이 없는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실링에는 아무런 문양도 찍혀 있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색상이기는 했다.

게다가 종이가 고급 재질인 것을 보아 장난으로 보낸 건 아닌 듯했다.


“알겠다. 전하께 바로 보고하도록 하지.”

아시드는 다시 몸을 돌려 칼리드에게 다가갔다.

방금 명령을 전달하러 갔던 아시드가 다시 돌아오자 칼리드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짓했다.


“전하. 황궁에서 가져온 편지입니다.”

아아. 오늘이었던가.

아시드의 손에 들려 있는 고작 몇 장뿐인 편지들에 시선을 준 칼리드는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대답했다.


“대충 확인하고 전부 버려.”

어차피 쓸데없는 이야기뿐일 테니까.

굳이 라울이 황궁에 없는 이 시기에 제게 연락해 온 것을 보면 내용은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자신을 이용하려 안달이 난 위선자들의 말들을 보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뻔뻔한 놈들.’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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