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로운 선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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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선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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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선택지
2022.11.05.
“하아, 하아. 갑자기 그리 뛰어가서 놀랐습니다.”
급히 따라온 듯 숨을 고르는 1황자를 바라보며, 벨리아가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러고는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실례할게요.”
그와는 대화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라울 황자 전하.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헤럴드가 정중하게 말을 전했다.
그제야 벨리아가 울었다는 것을 눈치챈 1황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요.”
그렇게 1황자를 보내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심상치 않은 기색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 벨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는 말이 없다.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헤럴드와 클로제의 시선에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벨리아가 애써 웃어 보였다.
“정말로 별일 아닌 게 맞느냐? 무슨 일이든 걱정되는 게 있다면 내게 꼭 상의하렴. 난 언제나 네 편이니.”
헤럴드는 벨리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저 다정한 위로를 듣자 또 마음이 울컥 차오른다.
“……그보다 오라버니. 오늘 많이 바쁘신가요?”
“왜 그러느냐.”
“클로제와 함께 오후에 티타임 어떠세요?”
벨리아는 지금 자신이 왜 과거로 돌아왔는지 의문을 표하기보다는,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황제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복수도 증오도 잊은 채 그저 따뜻한 가족의 품을 더 느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으음. 오늘은 조금 일이 많은데…….”
“그래도 잠깐 시간 내주세요, 오라버니.”
“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데 어찌 거절하겠느냐. 아바마마께 보고드릴 것이 있으니 금방 다녀오도록 하마.”
자신의 남편인 황제에 의해 로니카 왕국의 왕성이 불타 무너졌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미처 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부모님의 부고를 들어야만 했고, 사랑하는 동생이 성에서 투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쳐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벨리아의 마음은 산산이 조각나 무너져 내렸다. 도무지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어리석게도 황후의 자리에 오른 후 자신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황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귓가에 속삭이던 달콤한 말들도, 온 세상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듯 애틋한 시선도.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언니.”
클로제가 벨리아의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난 무조건 언니 편인 거, 알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제국의 황자라고 억지로 시집갈 필요 없다는 이야기야. 난 언니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클로제는 이렇게 착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황제에게 그렇게 농락당해야만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순수한 클로제의 얼굴을 마주하니 어쩐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있잖아. 사실 나 1황자 별로 안 좋아한다?”
갑자기 클로제가 몸을 한껏 가까이 다가오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왜?”
“그냥. 사람이 뭔가 영 마음에 안 들어.”
벨리아는 클로제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어이 오라버니의 죽음까지 전해 받아야 했던 그 순간, 가족들이 모두 모여 딱 한 번만이라도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이룰 수 있었다. 망설일 필요는 없다.
“방으로 가서 얘기하자.”
“응응! 오늘 내 간식도 언니한테 전부 양보할게.”
“됐거든요?”
“피……. 이거 진짜 내 피와 살을 나눠주는 기분으로 말하는 거라고오! 매정하긴!”
볼을 부풀리며 소리치는 클로제를 보고 있노라니 벨리아는 정말로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이 실감 났다.
* * *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방.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 그리고 테라스 구석에 놓여 있는 못생긴 조각상까지. 그토록 그리워했던 자신의 방이었다.
“공주님. 다과는 이쪽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클로제가 좋아하는 달고 부드러운 디저트부터, 벨리아가 좋아하는 구움과자들까지.
성심성의껏 준비되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소박하지만 거한 성찬이었다.
“그래서?”
벨리아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뭘 그래서는 그래서야. 일단 얼굴값 하게 생겼잖아.”
그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하며 클로제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는 포크로 케이크를 콕 찍어서 입에 넣었다.
“뭐? 하하.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얼굴값이라니…….
아직 15살밖에 되지 않은 클로제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제 언니가 영 마음에 안 드는지, 클로제가 버럭 외쳤다.
“제국에 시집갈 거면 차라리 2황자가 낫지!”
“2황자? 칼리드 황자 말하는 거야?”
“응. 맞아.”
2황자 칼리드 잉고트.
벨리아가 겪었던 미래에서는 험준한 동부의 영지를 다스리는 대공이었다.
“칼리드 황자라면 소문이 안 좋지 않나……? 냉정하고 차갑다고 들었는데.”
그는 벨리아가 황후가 되고 난 이후 단 한 번도 수도에 오지 않았었다. 물론 그 전에도 그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벨리아가 1황자와 연애하던 시절,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2황자에 대해 궁금함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슬쩍 물었을 때 라울이 굉장히 싸늘한 태도로 칼리드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것도 조금 이상했어.’
그렇게나 예민하게 굴면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다니.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모양새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라울은 필요 이상으로 칼리드를 견제하고 있었다.
물론 2황자에 대한 소문도 썩 좋지 않았다.
사람을 깔보는 시선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예의도 모르는 안하무인의 황자.
음침한 구석이 있는 잔인하고도 극악무도한 황자.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늘 친절한 1황자와 비교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었는데.
“어휴! 언니! 정말 뭘 모르네!”
클로제가 가슴을 탕탕 치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저렇게 라울 황자처럼 뭐든 다 해줄 것같이 구는 사람들이 나중엔 변하기 마련이라고! 차라리 칼리드 황자처럼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알고 보면 내 여자에겐 따뜻한 법이야!”
씩씩거리며 클로제가 열변을 토해냈다.
“클로제……. 너 내가 소설 그만 보라고 그랬지.”
“소, 소설이 아니고! 암튼!”
정곡을 찔렸는지 클로제가 차를 마시는 척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옅은 한숨과 함께 포크를 쥐고 빈 접시를 콕콕 찌르며 중얼거렸다.
“난 가끔 언니를 이해 못 하겠어. 내가 언니였으면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봤을 텐데.”
“클로제.”
“그렇잖아. 예쁘다고 여기저기 소문나면 뭐 해. 맨날 성에서 책만 보니까 갑자기 나타난 1황자가 조금만 잘해줘도 헬렐레 빠지는 거 아냐.”
정말이지. 얘는 언제부터 이렇게 단어 선택에 문제가 많아진 걸까?
동생이 꽤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한 벨리아가 클로제의 말에서 뭐를 먼저 짚어주어야 할지 고민하다, 피식 웃어버렸다.
오랜만에 본 동생에게 잔소리부터 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탓이었다.
이런 감정조차 너무나 사치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안 빠졌어.”
“그럼 며칠 뒤에 빠지겠지.”
“클로제. 너 진짜…….”
한마디도 지지 않겠다는 듯 받아치는 클로제의 말에 기가 막혀 한마디 하려던 순간.
테라스의 문이 열리며 헤럴드가 들어왔다.
“내가 많이 늦진 않았겠지?”
“물론이죠, 오라버니.”
벨리아가 미소 지으며 비어 있는 자리를 권했다.
얼마 만에 셋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온기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눌러 삼키고는 아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정말로 이렇게 셋이 모여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그러니?”
“고마워요.”
살아 있어줘서.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읊조린 벨리아는 일부러 더 크게 호들갑을 떨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구움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 * *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벨리아는 한 장의 서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찌할 테냐.”
아주 반듯한 글자로 청혼서라고 적힌 이 종이를 누가 보냈는지는 명확했다.
“라울 황자가 네게 퍽 애틋하더구나.”
“아바마마.”
“너도 그에게 마음이 있지 않았니.”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벨리아는 순식간에 라울에게 푹 빠져버렸으니까.
하지만.
“거절해 주세요.”
“……그를 좋아하던 것이 아니었더냐.”
“잠시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자 마음먹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벨리아의 말을 경청했다.
“저는 라울 황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딸의 단호한 말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로니카 왕국은 소국이지. 우리가 아무리 평화롭다고 하여도 결국엔 강대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의 여파를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는 작은 나라란다.”
“그래서 제게 그와 결혼하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벨리아가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
“나쁘지 않은 혼처다.”
제 아버지는 늘 이렇게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벨리아에게 선택권을 넘겨준다. 그 책임 또한 오롯이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조금 서운해진다.
“그렇다면 더 좋은 혼처도 있을 테니 거절해 주세요.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라울 황자는 차기 황제의 자리에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 그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명분이 있어야 하지.”
거절할 명분 따위!
그가 싫다. 라울이 정말 싫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가?
결혼의 말이 오가는 당사자가 싫다는데 어째서 명분이 필요하단 말인가.
“제가 싫다는 것으론 부족하다는 건가요? 제 마음이 그를 원하지 않는다는 데도요?”
“벨리아. 아이처럼 떼쓰지 말거라. 그를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이지 않으냐.”
벨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아…….’
그런데 이 순간 어째서 칼리드 황자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클로제와의 대화 때문일까?
생각해보니 라울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그에 대항할 존재가 필요했다.
제국의 황자, 나아가서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를 가정한다면, 소국의 공주라는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돌려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검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칼리드 잉고트.’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벨리아는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정보를 이용한다면.
‘……라울이 아닌 칼리드 황자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라울의 곁에서 그가 쟁취해 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황제의 관을 받는 그 순간까지 벨리아는 황제의 가장 큰 조력자로 곁에 있었다.
비록 황후가 되어 그가 숨겨둔 정부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마지막엔 그에게 죽임당하고 말았지만, 적어도 그전까지 황제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아바마마.”
과거로 돌아온 벨리아는 라울이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길 빌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에게서 빼앗아 온 모든 찬사를 가져갈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만약 그 인물이 2황자가 된다면.’
라울은 그 어떤 상황보다도 분노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나 견제하던 제 동생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니.
벨리아는 잠깐 상상해본 그 모습에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어쩌면.
처절한 고통의 나락 끝에 그를 네 발로 무릎 꿇게 만들 사람.
끈적이는 절망의 암흑 속에 그를 밀어 넣을 사람.
제국의 2황자 칼리드.
그가 적임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