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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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끝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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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끝과 시작
2022.11.01.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방 안.
벨리아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곧 들이닥칠 누군가를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의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시녀들의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차가운 표정의 한 남자가 방 안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온다.
“황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벨리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내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비어 있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그대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나, 일국의 황제에게 너무하는 것 아니오?”
마치 연인에게 투정을 부리는 듯, 친근하고 다정한 어조였다. 하지만 벨리아는 그 말에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너무하다니. 대체 뭘?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남자가 저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던가.
“그냥 하려던 말씀을 하십시오.”
“…….”
“어차피 제 앞에선 그런 같잖은 연극 따위, 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하, 그래.”
황제는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시녀들이 들어와 일사불란하게 티타임을 준비했다. 먼 과거의 언젠가 그에게 좋아한다고 이야기했었던 다과들과 향이 진한 홍차까지.
“함께 티타임이나 즐기도록 하지.”
황제가 그렇게 말하며 홍차를 따르자, 무척이나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벨리아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지?”
“폐하께서 제게 한 말이 맞는지 의심이 들어서요.”
황후가 되어 황궁에 들어온 지 벌써 8년이나 지났다.
그 시간 동안 황제와 티타임을 함께한 것은 고작 두 번.
벨리아는 그의 소홀해진 태도를 모두 이해하고 수긍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무척이나 바쁠 테니 어쩔 수 없다고.
그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러니 이건 그도 원치 않은 상황일 거라고 애써 믿으면서.
‘……정말 바보 같았지.’
그때 황제가 찻잔에 따라진 차를 그녀에게 권했다.
“마시도록 해.”
“싫어요.”
“……그대는 이걸 마셔야 할 거야.”
낮아진 황제의 목소리에 벨리아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힘겹게 입술을 떼어 물었다.
“독약입니까.”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벨리아는 이 차 한 잔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준비된 것임을 확신했다.
“이렇게 제 모든 것을 빼앗아가야 했습니까. 어찌 이리도 지독하게 구십니까!”
“그대의 하나뿐인 오라비는 살려주겠어. 그대의 왕국도 더는 건들지 않겠다고 약조하지. 그러니 스스로 이걸 마셔줬으면 좋겠군.”
벨리아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켜내려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비참한 마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처절하게 소리쳤다.
“거짓말!”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과 그릇을 쓸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쨍그랑,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오라버니가 전장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내게 감춘다고 모를 줄 알았습니까!”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를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그리고 동생까지 모두 황제가 죽였다. 자신의 고국 또한 이 남자의 손에 무너졌다.
그런데도 그는 저렇게 뻔뻔한 얼굴을 들이밀며 거짓말을 반복했다.
“하아. 그대가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황제가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그가 시녀들이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짓하자 다시 새로운 홍차와 다과가 준비된다.
“이만 죽어줬으면 해, 벨리아.”
그는 벨리아의 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
안쓰럽다는 감정조차 없는, 가지고 있던 물건이 필요 없어졌다는 그런 무감각하고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이 모습이 저 사람의 본 모습이었을 텐데.
어째서 그가 겉으로 하는 행동과 말에 현혹되어 모든 것을 망쳐버렸는가.
벨리아는 황제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결국, 지금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
모든 것을 잃고 이 지옥 같은 삶을 더 살아가고자 하는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마저 사라지고 나면 로니카 왕국은?
로니카의 유일한 왕족으로서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는 없다. 구질구질하고 비참하더라도 살아야했다.
벨리아는 황제가 건네는 찻잔을 빤히 바라보며 끝까지 버텼다.
그러나 황제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벨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거친 손길로 턱을 붙잡고는, 찻잔 속 내용물을 그녀의 입으로 쏟아부었다.
“읍!!”
“마셔.”
고저가 없는 무심한 목소리였다.
“으읍!!”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가녀린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더 거세게 쥐었다.
그러고는 남은 한 방울까지 모조리 그녀의 입에 쑤셔 넣는다.
“컥!”
황제가 빈 찻잔을 테이블로 내려놓는 그 짧은 시간.
목으로 넘어간 독약이 온몸을 불태우듯 뜨겁게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속이 뒤틀리며 뱃속이 찢어지듯 아팠다.
벨리아는 손톱이 파고들어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고통을 참아내었다.
하지만 곧 속에서 울컥, 하고 무언가 올라왔다.
“쿨럭!”
손으로 황급히 입가를 막아보았으나, 하얀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벨리아. 고마웠소. 그대가 제국을 더욱 부강하게 만들어줬으니.”
황제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싸늘한 눈빛으로 죽어가는 벨리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대는 나를 꾀어내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바치고 황후가 된 표독스럽고 잔인한 악녀로, 에르제는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어질고 현명한 황후로 남을 것이오.”
에르제……. 에르제!
벨리아는 더없이 처참했다.
그녀의 마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진창으로 처박혀버렸다.
황제가 사랑하는 에르제는 꽃같이 웃으며 그와 백성의 사랑을 받고 행복한 삶을 지낼 것이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감내했던 벨리아는 희대의 악녀로 남아 그녀가 쌓아온 평생을 부정당하고 이렇게 목숨을 잃어야 했다.
왜? 사랑한다며 매달렸던 것은 황제가 아니었나.
그런데 어째서 자신만 이렇게 억울하게 삶을 마감해야 하는가.
지독한 고통으로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 벨리아의 눈에서 투명하고도 처연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던 찰나.
“……황제여, 너를 저주한다.”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져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가련한 여인이 황제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너를 사랑했던 내 시간을 저주한다. 내 나라를 무너뜨리고 내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간 너를 저주해!”
피맺힌 절규를 내뱉는 벨리아를 향해 황제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벨리아. 버틸수록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오.”
얼핏 들으면 친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또한 조롱이겠지.
벨리아는 어떻게든 몸을 지탱해보려 팔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독이 퍼진 몸은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황제가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벨리아를 무감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너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죽어도 내 원념이 너를 불행으로 이끌리라……!”
피를 울컥 내뱉으면서도 벨리아는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네 미래는…… 영원히…… 고통받을지어다…….”
“하아. 질리는군.”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로.
“……너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벨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황제는 손에 묻은 찻물을 불쾌하다는 듯 닦아내며 말했다.
“이런. 카펫에 차를 흘렸군. 바닥이 더러워졌으니 치우도록.”
그러고는 죽은 황후를 툭, 하고 발로 가볍게 차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 * *
“여기서 자면 감기 걸려요.”
벨리아가 햇살에 찡그리며 눈을 떴다.
뿌옇게 흐린 시야 속에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더없이 다정한 얼굴을 한 황제가 보였다.
……이게 무슨?
‘나는 죽었을 텐데……?’
게다가 자신에게 직접 독약을 건넸던 황제가 대체 왜 이러는가.
벨리아의 팔뚝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바람이 아직 찬데……. 그래도 열은 없는 것 같군요.”
벨리아는 자신의 이마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찰싹, 하는 마찰음이 들릴 정도로 거센 손길이었다.
황제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제 노력이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게다가 황제는 무슨 속셈이고?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째서 죽어가던 자신이 갑자기 정원 한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었는지.
황제는 왜 이렇게 살갑고 다정하게 구는지.
“더 노력하겠습니다.”
“……대체 왜…….”
“하하. 그대에게 반해버린 제가 노력할 수밖에 없지요. 부디 마음을 열어주시길. 벨리아 공주.”
공주라는 말에 벨리아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포근하고 따스한 곳.
……바로 로니카 왕국이었다.
그것도 벨리아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왕성의 후원.
“그댈 향한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러니…….”
벨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익숙한 길을 따라 자신의 방으로 뛰었다.
8년 동안 황후로 지냈던 그 황량한 방이 아닌, 온기가 가득한 가족들의 품으로.
‘……말도 안 돼.’
타탁, 소리와 함께 급하게 성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밝게 웃으며 벨리아를 맞이해 준다.
“공주님! 설마 오늘도 정원에서 주무신 거예요?!”
“벨리아 공주님!”
불에 탄 왕성을 빠져나오지 못했던 하녀들도.
“언니! 어디 갔었어?! 아바마마께서 아까 언니 찾던데!”
“클로제…….”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동생도.
“벨리아. 1황자가 또 찾아왔더구나.”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던 오라버니도.
“오늘따라 넋을 놓고 있구나. 황자가 네게 무례하게 굴더냐?”
“아뇨. 아뇨…….”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모두가 살아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꿈인가……?’
벨리아는 슬쩍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꽉 꼬집었다.
“아…….”
뺨이 얼얼하게 아팠다.
“언니! 왜 갑자기 뺨을 꼬집고 그래?!”
“아파…….”
뺨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고통과 함께 이 모든 게 현실임을 깨달은 그 순간, 벨리아가 꾹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언니 울어?!”
“흐윽…….”
가슴을 부여잡고 끅끅, 울음을 터뜨리는 벨리아의 모습에 클로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주 앉아서 눈물을 닦아준다.
앞서가던 헤럴드도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1황자가 네게 무례했느냐? 응?”
“언니이.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애. 울지마아.”
벨리아는 뿌옇게 흐려진 눈가를 문질러 닦아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자신의 동생과 오빠였다. 제대로 보아야 했다.
“미안해……. 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자신이 그를 선택해서, 그래서 이 평화롭고 사랑스럽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
“무슨 소리야, 언니. 왜 그래? 내 푸딩 훔쳐 먹었어?”
“벨리아. 악몽이라도 꾸었느냐?”
악몽. 그래, 그건 지독한 악몽이었다.
‘과거로 돌아왔어…….’
제국의 황후가 아닌, 로니카 왕국의 벨리아 공주인 시절로.
“안색이 창백하구나. 아바마마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너는 방에 가서 쉬어라.”
등을 토닥이는 오라버니의 손길에 한참을 흐느끼던 벨리아가 서서히 울음을 멈췄다.
‘……꿈이 아니야. 정말로 과거로 돌아온 거야.’
그것도 황제를 사랑하기 전으로.
우습게도 황제가 자신에게 매달리며 구애하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벨리아 공주!”
벨리아를 뒤따라온 황제가 그녀를 불렀다. 아니, 지금은 1황자던가.
자신에게 다정한 눈빛을 건네는 그를 바라보면서도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그에 대한 사랑은 이미 옛적에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죽기 전에 간절하게 바랐던 것처럼 이번엔 절대로 그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기회야.’
과거로 돌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을 황제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벨리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1황자를 차갑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니 앞으로 처절하게 무너지도록 해.’
저주는 이제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