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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후계 싸움 (79/79)


79화 후계 싸움
2023.09.02.



 
발로소네 후작가 내부는 예상했던 대로 엉망이었다.

바닥엔 깨져 있는 장식품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로비를 살폈다.


‘진짜 들어와도 되는 거 맞나?’

로비엔 발을 디딜 곳이 없어 하녀가 급하게 치우고 있었다.


“때마침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잘됐네.”

미카엘의 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바작거리는 장식품을 짓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미카엘도 화난 듯한 얼굴로 형을 따라 들어갔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들 뒤를 따라나섰다.

만찬장엔 미카엘과 형 그리고 나밖에 없었다.

이내 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와 미카엘의 형을 불렀다.


“카마엘 님.”

이름은 카마엘이었다.

그는 열린 문틈을 바라보며 집사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들어가서 쉬시겠답니다.”

“손님이 왔는데 아쉽게 됐네.”

카마엘이 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가기 전이라도 만나 뵙게 되면 인사드릴게요.”

내가 여기 들어온 게 부인을 만나고자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실 미카엘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다.

내 오랜 친구이기도 한 사람이기에.

그가 자랐던 곳이 어떤 곳인지는 늘 궁금했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는 무엇이었는지.

미카엘에게 직접 물어보기 전에,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이름은 듣고 성은 못 들었던 것 같은데. 가문은 어디지?”

카마엘이 내게 물었다.

그러자 미카엘이 곧장 내 말문을 막았다.


“조용히 식사만 하고 나가게 할 거야. 귀찮게 물어보지 마.”

“내 집에 들어온 손님한테 묻는 말이다.”

“굳이 식사 한번 하는데 가문이니 뭐니, 필요해? 그냥 먹자.”

숨이 턱턱 막힌다.

이런 불편한 식사 자리는 황궁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동생인 미카엘이 소후작이 되어서겠지.’

가문 내에 싸움이란 후계자나 재산 싸움 둘 중 하나니까.

가문 일은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였다.


“저는 블란디체 아네트입니다.”

하지만 고작 이름 하나로 싸우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미카엘이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어디서 이름을 많이 들어본 것 같더니, 그 유명한 대공비셨군요.”

카마엘은 바로 높여 불렀다.


“편하게 부르세요. 저는 미카엘의 친구로 온 거니까요.”

“그럴게, 그럼.”

카마엘이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단순히 이름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근데 유명하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그 유명한 대공비?

결투 소문이 벌써 후작가까지 퍼졌나 싶었다.


“마르카바 아카데미에서 유명했잖아. 너.”

예상외의 답변이었다.


“마르카바 아카데미 출신이세요?”

카마엘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하기야 마르카바 아카데미 출신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죠.”

수도에 있는 귀족 자제들은 대부분 규모가 가장 크고 좋은 교수들이 있는 마르카바 아카데미를 다녔다. 황자인 세르디스도 다녔으니 그쪽으로 몰리는 건 당연했다.


“유명할 건 없었는데. 제가 워낙 연구실에만 갇혀 살아서.”

“밖에 나오지 않아서 더 유명했지. 연구실에서 사는 공주라고.”

“그런 말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데…….”

오그라드는 별명에 손발이 저절로 말려들어 갔다.

연구실에 사는 공주라니.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연구실에만 있는데 소문 들을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미카엘, 너도 들어본 적 없지?”

나는 미카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카엘도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니까.

카시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와 처음 편지를 주고받은 건 아카데미 안에서였다.


“어…… 그렇지.”

잠깐 뜸 들인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본 적 있다고? 진짜 나 모르게 별 이야기를 다 했구나.”

“원래 소문이라는 게 그렇지 뭐.”

미카엘이 덤덤하게 얘기했다.


“그나저나 시간이 너무 빠르다. 너랑 편지 처음 주고받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그때 카마엘이 식기를 내려놓고 흥미롭다는 듯 물어보았다.


“처음에 만나게 된 게 편지였거든요.”

“생전 부모님께도 편지 안 쓰던 녀석인데. 너도 아네트한테 관심 있었구나?”

미카엘은 시선을 회피한 채 묵묵히 제 앞에 놓인 고기를 썰었다.


“그러고 보니까 네가 누구랑 친했으면 소문이 났을 텐데 소문이 없었던 걸 보면 편지로 친해진 게 맞나보네.”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당연하지. 나도 가문이니 뭐니, 공부만 했는데도 네 소문은 알고 있었으니까.”

카마엘의 말에 괜히 낯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아카데미 얘기는 그만하지.”

때마침 미카엘이 포크를 거칠게 내려두고 말을 끊었다.


“아카데미 친구인 손님을 모셔두고 지루한 가문 얘기라도 해야 하나?”

“형. 다 먹었으면 일어나.”

“이젠 소후작이라고 형을 여기서 내쫓기라도 하려고?”

“쫓겨나기 싫으면 평소처럼 조용히 식사하자.”

또다시 별거 아닌 걸로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우애 좋은 형제를 찾아보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성이 들어왔다.


“대공비 전하가 오셨다고요!”

아까 다이닝룸을 나가던 집사가 내 신분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발로소네 후작 부인이세요?”

귀부인의 미소가 귀 끝까지 걸렸다.


“맞습니다. 제가 발로소네 후작 부인입니다.”

후작 부인은 드레스를 끌고 단숨에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순 술 향기가 훅 퍼졌다.

미카엘도 술 냄새를 맡았는지 곧장 일어나 제 어머니의 팔을 잡아끌었다.


“술이 많이 취하셨습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이거 놔!”

그녀는 그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 바람에 날카로운 손끝이 미카엘의 얼굴을 사납게 긁어 기어이 피를 보게 했다.


“미카엘…… 괜찮아?”

미카엘은 일상이라는 듯 손수건으로 피를 찍어 눌렀다.


“대공비 전하. 이곳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인은 미카엘이 상처가 난 걸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마지막 동아줄인 것처럼 붙잡았다.


“저희 후작가의 불순한 움직임을 바로 잡아 주시러 오신 거죠?”

“네?”

“형제들 간에 피 싸움으로 후작가가 망가질 지경입니다.”

다시 한번 부인의 매서운 손끝이 향하는 건 미카엘이었다.

소후작이 된 미카엘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세계에서는 장자 승계가 기본 원칙이었으니까.

자식의 실력과 무관하게 첫째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막내인 미카엘이 소후작이 된 건 크나큰 이변이었다.

물론 그게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내가 끼어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후작 부인.”

“황자에게 무엇을 대가로 받은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자께서 직접 관여해서 우리 카마엘을 잘라냈을 리가 없어요!”

울부짖듯 쏟아낸 말에 가시가 있었다.


“아네트. 어머니가 취해서 하는 말이니까 들을 필요 없어.”

미카엘은 거칠게 부인을 떼어냈다.


“놔! 너는 카마엘이 그동안 어떤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르잖아! 어떻게 동생이 되어서 형 자리를 뺏으려고 드는 거야!”

“집사. 어머니를 방으로 잘 모셔다드려.”

“대공비 전하. 황자와 대공께서 당신 말이라면 듣지 않겠습니까? 제발 후작가의 후계자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해주십시오! 황자께 물어봐 주십시오!”

부인은 끝까지 나만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듣자 하니 이상한 말이었다.


“세르디스 황자께서 발로소네 후작가의 후계 관리에 관여했단 말씀이신가요?”

아무리 차기 황제로 독보적인 세르디스라 하더라도 한 가문의 후계싸움에 관여할 수는 없다.

발로소네 후작가가 다른 가문에 비해 규모는 작아도, 학문으로는 전통 있는 가문이다.


“아니야. 단지 보좌관인 내게 힘을 실어주신 거지.”

미카엘의 말에 부인이 악을 지르며 말했다.


“저 말에 속지 마세요! 황자께서 보낸 사람이 저희 후작님을 찾아와 협박했습니다!”

“술에 취하셔서 아무 말이나 하시는 거야.”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미카엘을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후작 부인의 말을 그냥 넘기기는 어려웠다.


“미카엘.”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카마엘이 고상하게 입을 닦고 일어났다.


“네가 우리한테 좋은 감정이 아닌 건 알겠는데. 어머니까지 제정신 아닌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옳은 거냐?”

묵직한 음성에 미카엘과 부인마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어떤 거짓을 지어냈냐?”

“형이야말로 내가 갑자기 후계자가 된 걸로 꼬투리를 잡고 싶은 거겠지.”

카마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넌 그게 억울해서 가족들을 그런 취급 하고 있는 거냐? 뒤에서 네가 어머니가 미쳤다는 소문을 흘리고 다닌 것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야.”

“형이나 어머니나 똑같네. 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

미카엘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네트. 데려다줄 테니까 가자.”

그리고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당연히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인 그의 손을 잡는 게 맞는 선택이다.

편지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은 진심처럼 그의 말을 믿고 싶어서 온 곳인데.


‘왜 자꾸 미카엘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아네트.”

날 부르는 저 목소리에 이질감이 들었다.


“미카엘. 나는 말이야…….”

하지만 고민 섞인 대답은 끝내 맺어지지 못했다.

쨍그랑!

그릇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뒷덜미가 아찔해졌다.

뒤로 보이는 후작 부인이 그릇을 깬 탓이었다. 그녀는 바닥에서 그릇 조각을 골라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대공비 전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첨예하게 쪼개진 조각이 닿아, 그녀의 여린 살을 찢었다. 하얀 그릇 위로 맺힌 붉은 선혈이 모두를 기함하게 했다.


 


“부인. 그러지, 그러지 마세요.”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저는 미카엘 친구로서 단순히 식사 자리에 참석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대공비 전하시잖아요! 황자 전하께 한 번만 여쭤봐 주실 수 있잖아요!”

다른 사람의 눈엔 나와 세르디스가 퍽 친한 사이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저는 대공님의 사람이지 황자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저희를 외면하실 건가요?”

부인은 신음을 토하며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불안하고 간절해 보였다.


‘이게 술에 취해 뱉는 거짓말일까?’

미카엘의 말을 우선으로 듣고 싶었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은 아니라고 답하고 있었다.


“아네트. 너는 먼저 올라가. 어머니는 내가 잘 추스를 테니까.”

그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카엘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상황을 수습하기보다 나를 먼저 내보내려 했다. 아예 후작 부인에게서는 등을 돌린 채로.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해 보이는 건 나뿐인가? 미카엘은 부인 보다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너는 내가 빠지는 게 중요한 거구나.”

그가 이토록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는 나였다.

내가 들어선 안 될 이야기가 있어서.

그리고 그게 의심을 키우는 증폭제가 되었다.


“후작 부인. 그만 손을 내리세요. 무슨 말이든 들어드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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