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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78/79)


78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2023.08.30.


황후에게 미친 척 예언했지만, 나를 믿어주는 건 별개 문제였다.

아마 의심은 하더라도 쉽게 결투를 무르진 않을 것이다.

헤르티안의 설득은 실패 전적이 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세르디스를 설득해?’

아니야.

그건 미친 짓이었다.

그런데, 고려해볼 여지도 없는 선택지건만, 왜 세르디스를 선택하는 게 더 빠른 선택인 것 같은지.

내가 하다 하다 세르디스를 고려 대상으로 두게 될 줄은 몰랐다.


‘그건 모순이야. 괜한 오해를 받지 않겠다 해놓고 세르디스랑 작당 모의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 사실을 알게 된 비올렛이 나를 오해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궁리를 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황후궁을 나온 나는 아까처럼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정처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누구에게 고민이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뿐이었다.


“미카엘을 찾아가 보자.”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나 한 발 떨어져 상황을 객관적으로 봐주는 사람.

그건 내겐 카시안뿐이었다.

뭔가 직접 만난 뒤론 예전처럼 내 고민을 모두 털어두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미카엘도 소식을 접해 들었으니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황자 궁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세르디스의 궁을 직접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궁 안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황자궁은 황후궁 못지않게 웅장하고 화려했다.

나는 최대한 세르디스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궁 안으로 들어갔다.

미카엘이 있을 법한 장소는 세르디스의 집무실인데, 그 안에 세르디스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구석진 테라스에 도착한 나는 위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시종을 시켜 몰래 만나는 방법도 있지만, 황자궁에 있는 시종을 믿을 순 없었다.

세르디스는 날 보면 분명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잡을 거고, 다른 이의 눈에 띈다면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섣불리 세르디스를 만날 수 없었다.

온 황궁이 지뢰 같았다.

미카엘이나 세르디스가 나올 때까지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당장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지금은 헤르티안을 보기 껄끄러웠으니까.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황궁에 오고 나서 마음 편한 일이 없었다.


‘헤르티안이 뭐 하고 있으려나.’

모진 말을 뱉었던 게 못내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오셨습니까?”

테라스 벽에 몸을 기대고 잠시 숨을 돌리던 때였다.

테라스 밖, 그늘진 곳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은 남자 목소리에 나는 숨을 죽였다.

곧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져 들렸다.


“소식 듣고 오신 겁니까?”

자세히 들어보니 남자 목소리는 내가 기다리던 이의 것이었다.


‘미카엘이잖아?’

얼핏 본 뒷모습에 미카엘 특유의 은발이 보였다.

하지만 섣불리 나가서 아는 체할 수 없었다.

미카엘 앞으로 다가온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브를 깊게 눌러쓴 작은 키의 누군가.

작은 목소리가 풀이 비벼지는 소리에 흩어져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계속 미카엘의 음성만 이어져 나왔다.


“결투는 순조롭게 진행될 겁니다.”

결투?

세르디스와 헤르티안의 결투를 말하는 것 같았다.


“황후 폐하께서 찾아오시긴 했습니다만 따로 전해 들은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상관없으시면 크게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상대와 주고받는 말이 꽤 미묘했다.

마치 상관에게 보고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상대는 세르디스는 전혀 아니었다.

세르디스였다면 이렇게 뒤에서 몰래 보고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럼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걸까?’

조금 고개를 내밀어 로브를 쓴 사람을 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차 안에서 바라보던 수도 골목 속 누군가.

때마침 구름이 걷어지고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그 덕에 로브 속 숨겨진 머리칼의 색이 반짝거렸다.

선명한 보랏빛.

찰나였지만 똑똑히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비올렛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비올렛은 아니야.’

비올렛이 직접 아니라고 했고, 비올렛과 미카엘이 만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럼 내가 모르는 인물일 터.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끝내 가려진 햇살이 다시 로브 안에 어둠을 내렸다.


‘미카엘이 누굴 만나고 다니는 거지?’

가문의 일원일 수도 있었다.

뒤로 그 골목길에서 미카엘을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그럼 그때도 만나고 있었다는 건데.’

확실한 건 미카엘이 저 사람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


“계약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온 건지 황자 또한 심상치 않고요.”

그리고 나와 관련된 얘기를 누군가에게 보고하듯 전달하고 있단 거였다.

계약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혹시 내가 미카엘에게 계약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것을 뜻하는 건가?

미카엘은 자세한 이야기는 늘어놓지 않았다.


“약속하신 대금은 언제 주시는 겁니까? 이번 주 내로요? 알겠습니다. 늦지 않게 주시고 결투가 끝나거든 자택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로브를 쓴 사람은 수풀을 헤치고 이 자리를 떠났다.

상대의 목소리는 끝내 듣지 못했다.

나는 홀로 남겨진 미카엘을 부르지 못했다.

미카엘도 곧 조용해진 공간을 떠났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한참 동안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도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미카엘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보고하고 있다.

그 대가인지는 몰라도 대금을 받는다는 건, 이 일로 대가를 받는 것이었다.

왜?

대체 누구한테?

카시안이라면 전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아니야.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잖아.”

카시안이랑 알고 지낸 세월이 5년이다.

그동안 서로에 대한 비밀을 끝까지 지켜주고, 서로를 멀리서 응원하고 격려했던 사이다.

내가 이 세계에서 가족들 다음으로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괴로운 건 없을 테니까.

만약 미카엘이 나를 두고 누군가와 거래를 한 거라면…….

끔찍한 생각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아냐. 일단 미카엘과 얘기해보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섣불리 미카엘을 의심하는 건 옳지 않았다.

직접 만나서 확인해 봐야겠다.

***

맑은 해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려진 해는 다시 맑아질 기미 없이 주황빛으로 저물어갔다.

나는 미카엘이 끝날 때를 기다려 그의 뒤를 쫓았다.

미카엘은 자신의 저택인 후작가로 들어섰다.

나는 마차에서 잠시 대기한 뒤, 마차에서 내려 후작가의 문을 두드렸다.

르앙베리아 백작저와 규모가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저택에서 풍기는 무거운 분위기와 안에서 들리는 고함.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안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처럼 큰 소리가 오고 갔다.

이번엔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몸이 움찔거렸다.


“……돌아가야 하나?”

나는 고막을 때리는 거친 목소리를 멍하니 듣다가, 가까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멀대 같은 남자를 보고 꺅 소리를 질렀다.


“누, 누구세요?”

“이 집 아들인데?”

“아.”

그러고 보니 미카엘이랑 같은 독특한 은발 머리였다.


‘미카엘이 막내니까 형이구나.’

나이 차이가 꽤 나는지 미카엘과 다르게 중후한 이미지였다.


“그쪽은 누구?”

나를 훑어보던 그가 물었다. 내가 대공비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저는…… 미카엘 친구예요.”

나를 뭐라고 소개할까 하다가 친구라고 둘러댔다.


“미카엘이 친구가 있었나?”

“편지만 종종 주고받아서 자주 얼굴을 본 사이는 아니에요.”

“그런 것 같네.”

남자는 무감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뒤이어 저택 안에서 큰 소리가 재차 오갔다.


“저는 다음에 올게요.”

“왜? 그냥 들어가지?”

“지금요?”

내가 놀라 묻자, 남자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들어가면 가족들께 민폐가 될 것 같은데…….”

미카엘에겐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었다.


“돌아갔다가 나중에 올게요.”

편지에서도 워낙 가문 이야기를 꺼렸던 터라,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든가.”

남자는 나를 지나쳐 가서 그대로 저택 문을 열었다.


“미카엘. 네 친구 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카엘을 불렀다. 그 자리에 미카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나중에 온다니까요?”

훠이 훠이. 얼른 문을 닫으라고 손짓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중에 와도 민폐는 마찬가지니까 그냥 들어와.”

“그럼 따로 연락한다고 전해주세요.”

미카엘의 형은 이미 늦었다는 듯 문을 활짝 열었다.

뒤로 잔뜩 흐트러진 차림이 된 미카엘이 얼굴을 드러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그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아네트?”

갈라진 목소리와 헝클어진 머리칼이 내 말문을 막았다.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나는 멋쩍게 서서 고개만 주억거렸다.


“무슨 일로 온 거야?”

“그게, 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뒤쫓아 왔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더욱이.


“편지를 주지 그랬어. 오늘은 황궁에서 머문다며? 시종을 시켰으면 찾아갔을 텐데.”

“황궁은 듣는 귀가 많으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혼자?”

미카엘이 내 뒤를 한번 훑어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조금 안심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런 속사정은 들키고 싶지 않을 테니까.


“응.”

“근데 어쩌지? 지금은 얘기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미카엘이 곤란한 듯 불안한 시선으로 저택을 흘끔거렸다.


“내가 멋대로 찾아왔으니 안 되는 게 당연하지. 내일이라도 얘기하자.”

나는 미안하다며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아까 본 미카엘의 형이 다시 내려왔다.


“어머니께 손님이 찾아왔다고 말해뒀다.”

“형!”

“저택까지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낼 수야 있나?”

“아네트가 괜찮다잖아.”

미카엘의 형은 그를 가볍게 제치고 내게 손짓했다.


“안 들어갈 거야?”

나는 미카엘과 미카엘의 형을 번갈아 보았다.

솔직히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멋대로 집에 찾아오는 게 민폐라는 것쯤 아는데.

그럼에도 아까 미카엘이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의심하지 않으려면 미카엘이 뭘 했는지 제대로 봐야 해.’

나는 재차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고 보니까 가족분들께 인사를 안 했네요. 인사만 하고 돌아갈게요.”

“인사 안 해도 돼.”

말을 끝내기 무섭게 미카엘이 나를 말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께 인사는 드리고 나와야지. 너랑 내가 몇 년 친구인데.”

만약 백작저에 카시안이 온다고 하면 우리 가족들은 테이블 다리가 부러지도록 진수성찬을 차려놓으실 거다.

미카엘의 집은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가족들은 너랑 내가 오랜 친구 사이인지 몰라.”

그의 눈빛이 어쩐지 복잡해 보였다.

나는 그를 살짝 도닥이며 말했다.


“잠깐 인사만 드리고 나올게.”

식사까지 대접해 주신다면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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