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결투를 중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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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결투를 중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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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결투를 중지해야 합니다
2023.08.26.
모든 책임을 떠맡으라고?
‘대체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날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결투까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황후가 나서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모르겠다.
“대답을 해줘야죠. 대공비?”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딱 황후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마터면 대놓고 싫은 티를 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표정은 아닌데?”
황후가 뱀 같은 시선으로 내 표정을 훑었다. 말이랑 다르게 표정에선 티가 났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황자 전하와 대공 전하의 안전 문제가 신경 쓰여서요.”
결투에 대한 책임을 져라.
결투에서의 사고는 모두 내 탓으로 돌리겠다는 얘기다.
아직 날짜조차 정해지지 않은 일인데.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야.’
추측건대 황후가 결투를 멀찍이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분명 세르디스가 이기는 방향으로 판을 짜거나, 아니면 보기 좋게 함정을 심어둘 수도 있었다.
두 사람 다 황족인 만큼 황궁에서 벌어진 결투는 남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아질 테니까.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걱정된다면 직접 대공에게 결투를 거두라 말해도 좋고요.”
그러나, 의심스럽다고 황후의 명령을 거절할 순 없었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께서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맡은 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선 받아들이고, 황후가 다른 수를 쓰지 못하게 알아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요. 그래야죠.”
황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겁한 수로 결투를 이길 생각은 하지 말라고 대공께 전해주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되, 속으로는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당신이 관여하지 않는다면 결투에서 일이 벌어지진 않을 거예요.’
겉으로는 수긍하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양쪽 모두 그런 불공정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좋아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리하지는 말고요.”
예의상 건넨 말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황후는 네네거리는 내 대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후후 웃으며 얼굴을 풀었다.
“대공비는 좋겠어요. 장차 황제가 될 우리 아들이 자기를 위해서 싸우니까.”
왜 결투가 벌어지게 됐는지는 모르는 척할 셈인가 보다.
제 아들이 결혼한 첫사랑에 미련을 못 버려서 벌어진 일인데, 황후는 그 점을 신경 쓰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구경하는 사람처럼 즐거워 보였다.
“대공비 표정이 좋진 않네요? 그냥 즐겨요. 잘생긴 남자들이 자기 때문에 싸우는 게 얼마나 로맨틱한데요.”
“불필요한 싸움이에요. 괜히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이에요.”
“누가 죽는 것도 아니고 뭘요. 남자가 돼서 결투 한번은 해 봐야죠. 저는 그 이유가 어쭙잖은 영애들이 아니라 대공비라서 좋은걸요?”
하기야 그때 그랬었지.
헤르티안을 사지로 몰아세우고, 나는 건져내려 했었다.
‘그땐 당장 헤르티안을 죽여서라도 황자의 짝으로 삼으려 하더니.’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도 있었다.
“절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기계적인 대답만을 늘어놓았다. 황후와 나누는 대화가 썩 의미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쉬고 싶다.’
이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며 시선을 슬쩍 바깥으로 돌렸다. 그런 나를 보는 황후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였다.
“오늘따라 대공비가 차분하네요?”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이때다 싶어 일부러 기침을 터트렸다.
“얼굴이 창백한 게 정말 그래 보이네요.”
나는 몸을 잘게 떨어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례인 걸 알지만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오래 기다리게 하고 벌써 일어나려고요? 나는 대공비랑 오래 얘기하고 싶은데.”
“그러다간 황후 폐하 앞에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
이마에 손을 얹으며 아련하게 허공을 쳐다보자니, 황후가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오늘은 이만 가요.”
“양해 감사드립니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나는 여기 앉아서 느긋하게 가십지나 기다려야겠네요. 내일쯤이면 우리 세르디스를 좋아하는 영애들의 부러움이 가득 담긴 인터뷰가 가십지에 올라올 테니까. 그거나 기다려야지.”
일순 몸이 바짝 굳었다.
“뭘 기다리신다고요?”
놀란 눈으로 허둥지둥 물었다.
“왜요? 사교계에 관심 없는 대공비도 흥미가 돋아요? 그럼 하나 보내드리죠.”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이미 황궁에서 파다하게 소문이 퍼진 결투가, 수도 전역을 돌아다닐 거란 생각을.
“그럼 비올렛도 알게된다는 거잖아……?”
나는 멍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녀도 가십엔 관심이 없으니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세르디스 소식이니 알게 되겠죠?”
“아니…….”
“공녀가 우리 세르디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어디 수도 내에 세르디스를 좋아하는 여인이 공녀뿐이겠어요?”
안 돼!
나 때문에 결투가 벌어지는 걸 비올렛이 알면 안 된다.
원작이 원작 수순대로 흐르지 않으면서 비올렛의 마음은 점점 상처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 때문에 세르디스가 결투를 벌인다는 걸 알게 되면?
‘괜히 이 결투의 중심이 된 나를 원망할 수도 있어.’
사소한게 쌓이고 쌓여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을 만든다.
결투가 가진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대놓고 세르디스가 나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싸움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투까지 벌이게 둬도 비올렛이 날 좋게 볼까?’
이미 마음의 병이 깊이 든 그녀다.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내가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번엔 넘어가도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장담할 수 없다.
“황후 폐하.”
내가 나가지 않고 황후를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죠?”
“이 결투는 아무래도 중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요? 이제 와서 공녀 눈치라도 보는 거예요? 이미 세르디스가 대공비를 좋아하는 걸 공녀도 알고 있을 텐데, 뭘요.”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내가 실질적으로 원작에서 나락 엔딩을 맞이하게 된 건, 오로지 세르디스 때문만은 아니니까.
정확히는 세르디스의 눈에 비올렛이 나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던 탓이었다.
그제야 몽롱했던 정신이 바짝 들었다.
“결투를 멈춰야 합니다.”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투를 멈춰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생겼다.
이건 내 생존과도 관계가 있기에 넘어갈 수 없었다.
“대공비, 방금까지 제대로 결투 준비를 하겠다고 해놓고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부디 결투를 막아주세요.”
“아니 갑자기 무슨. 그리고 설령 멈춰야 할 이유가 있더라도 제가 황제 폐하도 아닌데 어떻게 결투를 멋대로 취소할 수 있겠습니까?”
“황후 폐하라면 하실 수 있잖아요.”
실질적으로 황제를 억압하고 위에 선 인물이 황후다.
대공의 참전의 결정권자인 사람이 결투 하나 취소 못 할까.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어렵겠네요.”
“황후 폐하.”
나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결투 취소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대공님은 드래곤도 때려잡은 사람입니다.”
이것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들이 질 것이라는 걸 알고 결투에 내보낼 부모는 없으니까.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겁니까?”
“아뇨. 저는 현실을 말하는 거예요. 대공 전하께선 무수히 많은 전쟁을 이끌며 티끌조차도 다치지 않은 사람입니다. 황후께선 대공님의 맨몸을 본 적 없으시죠? 저는 봤습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어느 하나 늘어진 곳 없이 탄탄한 근육을요.”
“그건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예요!”
황후가 발끈하며 거칠게 콧방귀를 뀌었다.
“내로라하는 황궁 기사단도 세르디스를 상대하지 못하거늘!”
당연히 그러겠지.
훈련을 게을리해도 주인공 버프로 신체적 능력은 최고일 테니까.
“상대는 어릴 적부터 살기 위해 훈련해온 대공님이라니까요. 황후께서는 더 잘아시겠죠. 그동안 제대로 된 수업도 듣지 못하고 오로지 훈련만 받은 대공님을요.”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건 황후 폐하께서 말하는 단순한 사랑 싸움이 아닙니다.”
“그럼 뭐란 말입니까?”
“정말 모르시겠어요?”
느슨해진 황후에게 긴장감을 줄 때였다.
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결과가 어떻든 저희 쪽 손해는 크지 않을 거예요. 대공님은 늘 져주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늘 이겼던 세르디스라면 상황이 다르다.
“단순히 결투의 승패를 떠나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아아, 보입니다. 보여요.”
눈을 희번덕 뜬 나는 미래라도 본 사람처럼 헉 소리를 내었다.
내 능력이야 황후도 익히 아는바.
나는 황후가 시종을 부를 때 쓰는 종을 잡고 거칠게 몇 번 흔들었다.
댕, 댕, 댕!
청량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뭐, 뭐가 보인다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그녀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섰다.
“황궁에 불어닥칠 새로운 바람이요.”
“새로운…… 바람?”
끄덕.
비장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공께선 저를 위해서 결투를 벌이셨지만, 이 결투로 불어올 바람의 의미는 다를 겁니다.”
“뭐가 다른지 제대로 설명을 해줘요. 대공비.”
“저희를 무사히 북부로 돌려보내 주시죠. 황후께선 대공을 적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아군으로 두셔야 할 겁니다. 멀리서 또 다른 위협이 몰려올 텐데 내부에 분열이 있으면 이 제국은 금방 깨져버릴 거예요.”
“다른 위협? 어디요? 쿠르시아? 아니면, 투란? 아니면, 저 멀리 사막 제국?”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은 미래라는 건 알 수 있어요.”
언젠가 타 국가와 전쟁을 벌어질 테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댕!
나는 종을 한 번 더 울리며 황후에게 조언했다.
“서로 검을 겨누는 게 아니라 손을 맞잡아야 좋은 방향으로 흐를 겁니다.”
***
황후는 고민에 빠졌다.
“나를 갖고 노는 건가? 아니면 진짜 미래를 보기라도 한 건가.”
고분고분하게 굴던 아네트가 갑자기 결투 취소를 부탁하는 것이 퍽 이상해 보였다.
“황후 폐하께서 준비하신 걸 알고 막으려고 한 건 아닐까요?”
시녀의 말에 황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누가 얘기하지 않고서야 대공비가 알 리가 있나?”
“저는 절대 아닙니다! 제가 왜 대공비께 황후 폐하 이야기를 하겠어요.”
“누가 뭐라고 했나요? 왜 브리니 자작 부인은 오히려 의심스럽게 큰 소리를 내고 그래요?”
“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황후의 오랜 시녀, 브리니 자작 부인은 연신 고개를 수그렸다.
황후는 됐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아네트를 떠올렸다.
“근데 눈이 너무 이상했다니까요. 정말 뭐라도 보이는 사람처럼 동공이 풀려서는!”
그냥 넘어가기엔 아네트의 행동은 찜찜함을 남겼다.
세르디스가 놓지 못하고 있는 여자라 줄곧 지켜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봤던 아네트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편한 사이인 제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게 제정신이라고 설명이 불가했다.
“갑자기 그 큰 눈을 번쩍 뜨더니 뭐에 쫓기는 사람 같아 보였다니까요?”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에게 손을 잡자니?
분명 아네트가 대공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손을 잡자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지.”
“대공비 전하만의 뜻 아닐까요? 그렇다면 대공 전하께서 결투 신청을 한 이유가 없을 텐데요.”
“근데 그전까지 수긍했던 대공비가 사람이 바뀐 게 이상해요. 원래 예언가들은 종종 우리가 못 보는 걸 본다고 하잖아요?”
아네트의 능력이 독살 사건을 막은 일을 황후가 잊었을 리 없었다. 그 일의 주동자가 제 친지였으니까.
“아, 그리고 블란디체 가문에서 온 영애가 대공비가 사업으로 몇십억을 벌었다고 했죠?”
“예! 기억납니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영애였죠.”
아네트가 가진 능력이 보통이 아님을 사업으로 증명했다.
단순히 약초에 대해 해박한 것으로 수십억을 벌 순 없는 일.
‘그럼 정말 세르디스한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간단 건가? 전쟁도?’
하지만, 능력과 별개로 제게 적대심을 가진 사람을 쉬이 믿을 순 없었다.
“유명한 예언가들을 모두 불러 모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