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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네가 책임져 (76/79)


76화 네가 책임져
2023.08.23.



“어쭈. 다 컸다? 감히 내 걸레도 빼앗으려고 하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빵모자 위로 꿀밤 놓는 시늉을 했더니 럭키가 눈을 찌푸린다.


“아주 황궁 물 먹었다고 대든다 이거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기는. 됐어. 네가 계속한다면 나도 옆에서 널 계속 도우면 그만이니까.”

럭키가 꾹 쥐고 있던 걸레를 쏙 빼냈다.

내가 아무리 허약하다고 해도 10살짜리 꼬마 이길 힘 하나 없을까.


“그럼 하던 것마저 하자고.”

다시 무릎을 꿇으려고 드레스 자락을 잡으려고 하자, 럭키가 자신의 걸레를 내려두었다.


“이러면 됐죠?”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네.”

나도 그를 따라 걸레를 내려두었다.

럭키는 깨끗한 천을 가져와 내 손을 닦아 주었다. 작은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기름이라 지우는 데 오래 걸리실 거예요.”

“씻는 거야 어렵지 않지.”

“드레스에도 묻으셨는데요?”

럭키가 그새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드레스를 보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드레스에 기름 묻은 걸 알면 마님이 잔소리하실 거예요.”

럭키가 걱정하는 건 백작 부인인 우리 엄마의 잔소리였다.


“나 대공비인데?”

“그래도 잔소리는 들으실걸요?”

“음. 아무래도 그러겠지?”

수도에서 입었던 드레스는 다시 백작저에 보낼 생각이니까.

엄마가 발견하신다면 분명 잔소리를 가득 담은 편지를 보내올 것이다.


“무조건이요.”

럭키가 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평소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럭키를 보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진짜 럭키를 만난 것 같네.”

“제가 가짜 럭키인 줄 아셨어요?”

“아니? 사춘기가 빨리 와서 안타까워했지.”

“근데 말이야 너…….”

럭키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궁정화가가 된 거야? 정말 축하해. 나는 어리고 실력 있는 네가 언젠가 빛을 발할 줄 알았다니까.”

화가로서는 최고의 직위.

작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근데 얼굴은 왜 더 상했지? 황궁에서 삼시세끼 다 안 주고 굶기고 그래?”

“아니에요. 다 잘 챙겨주세요.”

“근데 얼굴이 왜 이럴까?”

조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온 것도 그렇고.

궁정 화가들이 쉬는 장소는 따로 마련되어 있을 텐데 말이다.


‘어린 나이에 들어와서 적응이 힘들 수도 있지.’

궁정 화가는 대게 예술 작품에서 높이 평가받은 명망 있는 화가들이니까.

적응이 힘든 것도 이해가 갔다.


“럭키. 힘들어도 조금만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분명 올 거야.”

“……네.”

“어깨 펴고! 나는 네가 내 결혼 선물로 준 그림을 침실에 걸어두고 매일 본다니까? 이제 최연소 궁정 화가가 그려줬다고 자랑하고 다녀야겠다.”

“다른 사람들이 욕할 거예요.”

럭키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손만 꼼지락거렸다.


“너 진짜 변했어. 예전에는 그런 그림쯤 며칠이면 금방 만든다면서 어깨가 이만하게 올라가 있더니.”

“제가 언제요!”

“결혼식 때 그랬잖아. 기억 안 난다고 하지 마.”

럭키 배를 잔뜩 간지럽혔다.


“하, 하지 마세요!”

“계속 그렇게 처져 있으면 밤새 괴롭힐 거야.”

“제발, 아하하하. 제발요!”

“지금처럼 웃을 거야 안 웃을 거야?”

“웃, 웃을, 하하하, 게요!”

럭키가 얼굴이 벌게져선 깔깔 웃었다.


“정말?”

“네, 네, 네!”

나는 럭키를 믿어주기로 했다. 작은 배를 간지럽히던 손을 툭툭 털어냈다. 그제야 럭키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너무하세요!”

“앞으로 매일 열 번씩 웃지 않으면 괴롭히러 올 거야.”

“알겠어요. 웃을게요.”

용품실엔 값비싼 염료부터 구하기 힘든 염료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경매에서 놓쳤다는 보라색 조개를 갈아 만든 염료도 한가득이었다.

구경하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네 작품을 알아봐 준 사람은 누구야? 어머니가 알면 무척 좋아하실 거야.”

럭키는 계속 망설였다.


“설마 황제 폐하셔?”

그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황자 전하예요.”

황자라면 세르디스?


“세르디스 황자 전하가 널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네.”

그가 눈을 꾹 감았다.

마치 내가 혼을 낼 걸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전하가 보는 눈이 있으시네.”

하지만 나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황궁에서 태어나서 눈이 얼마나 높은 분인데. 황자 전하 눈에 들었다는 건 네 그림이 정말 뛰어나서일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기는 우리 어머니만 봐도 네가 그린 벽화를 보고 바로 널 후원하겠다고 데려오셨는걸.”

나는 움츠러든 어깨를 살포시 도닥여 주었다.

럭키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작은 발밑으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가만히 그의 등을 도닥이다 그의 주머니 속에 초콜릿 두 개를 넣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귀빈실에서 챙겨둔 초콜릿이었다.


“나중에 또 괴롭혀 주러 올 거니까 웃는 거 잊지 말아.”

 

***

먼저 궁 안의 시종을 만나, 용품실의 청소를 부탁했다.

시종은 선뜻 알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궁정 화가들은 따로 시종이 붙지 않나?”

“아닙니다. 가장 좋은 환경일 때 좋은 그림이 나오는 법이라 황궁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에 궁정 화가분들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던 대로 궁정화가의 처우는 귀족 못지않았다.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왜 혼자 청소하고 있었을까?”

“화가님께서 직접 청소를요?”

시종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런 일이 흔하게 있는 게 아니란 건 확실했다.


“굳이 사람을 부르기 싫었을 수도 있지. 그래도 신경을 먼저 써줬으면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귀빈실을 나설 때만 해도 기분이 울적했는데.

나보다 더 울적해 하는 럭키를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럭키가 세르디스를 말하면서 겁을 먹었지.’

그게 줄곧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내가 세르디스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의 추천으로 궁정화가가 되어서?

럭키는 그 정도로 세심한 꼬마는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게 있다면 모를까.


‘대공 전하를 조심하래요. 겉은 안 그래 보여도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고.’

불현듯 럭키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럭키가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그땐 왜 헤르티안을 조심하라고 했는지 몰랐는데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분명 세르디스가 시킨 걸 거야.”

순진한 럭키를 꼬드겨 그런 말을 한 것이라 시킨 것. 그리고 그 대가로 궁정화가 자리를 내어준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고작 그 한마디로 내어주기엔 궁정화가는 무척 높은 자리였다.

럭키의 실력이 뛰어나지만, 아직 다른 궁정화가처럼 인정받은 작품은 없었다.

그리고 작품이 없는 화가를 황궁으로 들여보낸 거라면 뻔했다.


‘헤르티안을 위험하다고 하는 것 말고도 다른 게 있었을 거야.’

럭키와 헤어지기 전, 그에게 부탁한 편지.

카시안에게 보냈던 편지가 있었다.


‘설마 편지를 세르디스한테 넘겨준 거야?’

편지로 대체 뭘 하려고.

설령 편지를 가져갔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럭키에게 물어볼 수도, 세르디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냥 모른 척하면 될 일을 키워 럭키의 자리를 빼앗을 순 없으니까.


“대공비 전하.”

그때, 중년의 시녀 하나가 나를 보고 다가왔다.


“황후 폐하께서 대공비 전하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황후의 시녀였던 모양이다.


‘결투 소식을 들었나?’

“무슨 일로?”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이따가 찾아뵙도록 하겠네. 보다시피 손에 기름이 잔뜩 묻어서.”

천으로 닦았어도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제가 닦아드리겠습니다.”

“굳이?”

“길이 엇갈릴 수도 있고 황후 폐하께서 무척 급히 대공비 전하를 찾으셔서요.”

시녀가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황후가 나를 급히 찾을 이유가 있나.

급히 찾더라도 냉큼 가주고 싶지 않았다.

황후 때문에 헤르티안이 죽다 살아났으니까.


“드레스에도 기름이 묻어서 말이야.”

“어디 가요? 크게 티가 나지 않으십니다.”

“응? 그럼 이 꼴로 가서 황후 폐하께 인사를 드리라고? 너 황후 폐하의 시녀 맞아?”

“네?”

시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황실 최고 어른께 이런 추레한 모습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라는 건 황후 폐하를 만만하게 본다는 뜻이잖아.”

“그,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알아. 황후께서 기다리시니까 서두르자는 거잖아. 하지만 서둘러 가서 탈이 나는 것 보다 제대로 갖춰 입고 인사드리는 편이 나을 거야. 안 그래?”

“……대공비 전하 말씀이 맞습니다.”

시녀가 졌다는 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애꿎은 시녀를 골탕 먹이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황후의 뜻대로 고분고분히 가주기가 싫었을 뿐이다.


“내가 늦을까 걱정되면 따라서 와서 기다리도록 해.”

나는 시녀를 뒤로한 채, 방향을 틀어 귀빈실로 향했다.

뒤로 시녀의 종종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말고 먼저 가 있어.”

“아닙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아닙니다. 천천히…… 큼큼.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드레스를 갈아입고 몸을 닦을 때까지 시녀는 줄곧 문 앞에서 대기했다.

밖에서 재촉하려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종종 문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밖으로 나왔다.

시녀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어서 가시지요.”

“그래. 가자.”

 

***

황후궁은 본궁과 다르게 붉은빛의 보석이 콕콕 박혀 고아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뽐냈다.

루비 궁이라는 이름이 걸맞은 곳이었다.

원형의 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기둥 같은 중심부가 황후의 본거지였다.


“대공비. 나를 이토록 애타게 기다리게 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겠죠? 아니 있어야 할 거예요.”

황후는 오랜 기다림으로 조금 지친 얼굴이었다.


“드레스에 얼룩이 져서 갈아입는다는 게 그만. 황후 폐하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황후는 내 말을 듣고 시녀에게 확인받았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이해했다는 얼굴로 인자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너그럽게 넘어가네?’

생글생글 웃는 낯을 보니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바쁜 대공비를 위해서 내가 그 정도도 못 기다릴까요. 어서 앉으세요.”

내가 마주 앉자 황후가 기다렸다는 듯 운을 떼었다.


“우리 세르디스가 결투 신청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 그렇다고 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황후를 적대시하는 것 또한 헤르티안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방금까지 헤르티안에게 내게 간섭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두고, 그의 오랜 숙적인 황후를 건드리는 건 어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황후를 기다리게 하는 것뿐.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럼 이번 결투 준비를 대공비가 해보는 건 어때요? 보다시피 제가 단순히 가문의 여주인이 아니라 황궁의 모든 식솔을 관리하는 사람인지라 시간이 통 나질 않아서요.”

“하지만 저는 황궁 사람이 아닙니다.”

“제국법상 황족에 속하기는 하죠.”

황후는 끈질기게 내게 결투를 도맡으라고 종용했다.


“엄연히 말하자면 대공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대공비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얌전한 황자가 먼저 결투 신청을 받았다고 하니 어미로서 얼마나 놀랐는지.”

황후가 제 가슴을 한차례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다란 속눈썹을 바짝 올려 무섭도록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번 결투에 모든 책임은 대공비가 맡아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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