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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문양의 변화 (73/79)


73화 문양의 변화
2023.08.12.


헤르티안을 안내에 따라 들어간 곳은 황궁 내에서도 처음 가보는 길이었다.

큰 본궁 뒤에 자리 잡은 하얀 건물.


“여긴 어디예요?”

“궁정 의원을 보러 갑니다.”

그곳은 황족만 드나들 수 있는 황궁 내 의원이었다.


“설마 제 진료를 보려고요?”

“그렇습니다.”

처음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싶었는데, 내가 대공비가 되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헤르티안도 황족이니 그의 아내인 나도 황족으로서 황궁 내 의원에게 진료를 볼 수 있었다.

문득 세르디스와 나를 이어주려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궁정 의원 밑에서 치료를 받으면 내 병이 호전될 수 있을 거라 믿으셨지.’

궁정 의원을 만난다고 해서 내 병을 치료할 수는 없는데 말이다. 이건 병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우니까.


‘헤르티안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하지만 같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그를 말릴 순 없었다. 나는 묵묵히 그를 따라나섰다.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의원이 보기엔 내 상태가 어때 보이는지. 이건 병인지, 저주인지.

하얀 대리석 복도를 지나 그가 문을 연 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새하얀 가운을 입고 둥근 안경을 낀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사람.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 기다렸다는 듯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보통 황궁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였다.

그를 경외하며 바라보는 기사들을 제외하곤 황궁 내에서 그에게 호의적인 인물은 드물었다. 반은 전쟁귀라는 소문을 듣고 피했고, 나머지는 황후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하지만 이 의원은 헤르티안에게 악의는커녕 호의적인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이쪽은 궁정 의원 에반입니다.”

뒤이어 헤르티안이 그를 소개해주었다. 직접 소개를 해주는 걸 보니 그와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아네트 블란디체예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직접 궁정 의원을 찾아와주시어 감사합니다.”

에반은 서글서글한 눈매를 접으며 나 또한 반갑게 맞아주었다.


“제 이야기는 대공님께 들으신 거예요?”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서는 비 전하의 건강 문제로 제게 자주 상담을 맡기셨습니다. 항상 비 전하를 자기 몸보다 더 걱정하셨죠. 물론 대공 전하의 감상이 많이 섞인 이야기라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헤르티안이 뒤에서도 내 건강을 신경 써주고 있던 모양이다.


“비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상태를 살펴봐도 될까요?”

에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옆에 서 있는 헤르티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토록 싫어하는 황궁을 내 건강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다녀갔다. 게다가 믿을 만한 의원을 소개해주기까지.

단순히 과보호가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네. 좋아요.”

그런 마음이 고마워 기꺼이 진료를 수락했다.


“이쪽에 앉아 주세요.”

나는 그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의원에 들어와 진료를 받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네.”

진료석에 앉자 눈빛이 바뀐 에반을 보고 조금 긴장이 되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바쁘실 테니 제가 대공 전하께 전해 들은 것을 바탕으로 만든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그가 연 진료 기록지 안엔 글자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수면 시간은 현재 5시간 30분 정도가 맞습니까?”

“어? 네.”

“증상은 두통으로 밤에 가장 심하고 일주일에 1번 이상은 불면증에 시달리시죠?”

“정확한데요?”

분명 감상이 섞여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 일상을 지켜본 사람처럼 정확한 수치였다.

그 이후로도 그가 하는 질문에 나는 “네.”로만 대답했다.


“어떠한 약을 먹어도 전혀 차도가 없으셨죠?”

“네.”

“흠.”

한참 질문하던 에반은 말을 멈추곤 깊은 시름에 빠졌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았다라…….”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헤르티안이 한마디를 던졌다.


“부인께서는 정체 모를 병에 대한 치료만 불가능한 게 아니라 모든 병에 약이 들지 않는다.”

놀라 헤르티안을 돌아보았다.

이건 가족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부인이 아무리 아파도 약 하나 먹지 않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내 실수였다.

백작저에 있을 땐 부모님의 시선 때문에 주는 약을 일일이 다 받아먹고 나은 척을 했었다.

하지만 대공저에 있을 땐,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굳이 듣지 않는 약을 챙겨 먹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헤르티안이 저리 빠르게 눈치를 챌 줄이야.’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그래야 조금이라도 저희가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

“부인. 부탁입니다.”

먹먹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걸 듣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말하지 않은 것이지만 결국 숨기는 것만은 답이 아니었다.


“……맞아요. 저는 어떤 약을 먹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심지어 독초조차도.”

나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털어두었다.

다 알고 있는 사람을 대놓고 속일 순 없었다.


“독초도 듣지 않으신다.”

이야기를 듣던 에반이 침착하게 글을 적어 내렸다.


“어릴 적엔 그러지 않았어요. 오라버니인 리안의 몸이 약해지다가 세상을 떠나고 리안처럼 몸이 급격히 약해지고 나서부터는 어떤 약을 먹어도 어떤 수를 써도 몸이 낫지 않았죠.”

“돌아가신 리안 영식께서도 약이 들지 않았습니까?”

나는 애써 슬프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끔찍한 기억이었다. 안에 흉측한 벌레가 가득 들어 있음을 알면서도 여는 상자 같은 기억. 그걸 속에서 억지로 열어보았다. 그 안엔 역시나 어두운 과거가 들어 있었다.


“…… 리안도 온갖 방법은 다 동원했죠. 아버지가 신전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고위 신관에게 치료를 받게 했을 때도 몸에 신력이 담기지 않고 빠져나간다며 치료를 포기했어요. 그나마 남은 거라곤 물약이나 약초 같은 것뿐인데. 리안이 죽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구실에서 약을 배합하고 마시는 게 제 일이었어요.”

내 말이 끝나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던 건데.


“그래도 하나 좋은 건 있더라고요. 누가 저를 독살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거니까 그건 좋아요.”

나는 좋은 점을 늘어놓으며 애써 괜찮은 척해 보였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그게 더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잠시만 안경에 습기가.”

에반이 뒤를 돌아 눈물을 훔쳤다.


“울면 더 얘기 안 할 거예요.”

내 말에 에반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코끝이 빨개져 있었다.


“큼. 그럼 연구하신 내용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뇨. 말하기 싫어요.”

일일이 그때 일을 떠올리는 건 사양이었다.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단호한 태도에 자못 놀란 에반이 곧장 용서를 구했다.


“말하기 싫다고 했지, 연구 내용을 주지 않겠다곤 안 했어요. 백작저에 제 연구실이 남아 있어요. 거기서 자료를 가져올게요. 나머지는 그걸로 확인하세요.”

가뜩이나 동글동글한 에반의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커졌다.


“감사합니다. 모두 꼼꼼히 확인 후에 뒤이어 연구를 진행하겠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마세요. 저는 그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모든 게 시간 낭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거든요. 제 시간을 버린 걸로 충분해요.”

“황족분들을 위해 힘쓰는 게 제 역할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내 탓 하지 말아요.”

연구 자료를 받게 되는 게 기쁜지 에반이 조금 들떠 보였다.


“이왕 다 공개하기로 한 거, 제 문양도 보여 드릴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아뇨. 대공비 전하 말고 대공 전하.”

에반의 질문은 헤르티안에게 향했다.


“그쪽이었구나?”

헤르티안은 깊이 고민하다가 허락했다.


“부인 문양을 보여주십시오.”

“그럼 보여 드릴게요.”

나는 두 사람을 등지고 앉아 어깨 소매를 내렸다. 그 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앞으로 옮겼다.


“날개 죽지에 보이죠? 리안은 하루가 다르게 꽃잎이 풍성하게 피었는데 저는 첫 봉오리가 맺힌 뒤로는 문양에 변화는 없었어요.”

이 상태로 몇 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특이하게 생기긴 했죠?”

보라색 봉오리에 초록색 잎사귀. 예쁜 모양은 아니었다.

그게 두 사람 눈에도 보기 좋지 않았는지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보기 흉측한가?’

약 2분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슬그머니 드레스를 올리고 머리칼을 넘겼다.

두 사람은 서로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많이 이상한가 보네요.”

괜히 문양이 별로인 것 같아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평생 몸에 달고 살 건데 그 정도로 이상하다니.


“괜히 보여드렸네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대공비 전하께서 말해주신 것과 지금 문양이…….”

에반이 말끝을 뭉갰다.


“다른 것은 아니고 지난번에 저에게 보여주셨을 때보다 문양이 짙어져서 약간 놀랐을 뿐입니다.”

헤르티안이 대신 변명을 이었다.


“그럼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제가 직접 확인해 볼게요.”

날갯죽지에 있다 보니 매일 확인하지는 못했기에 더 진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닙니다. 밝은 데서 봐서 더 짙게 보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헤르티안은 다시 내게 망토를 입혀 주었다.

그새 새로운 종이를 꺼내온 에반이 다가왔다.


“대공비 전하. 혹시 리안 영식의 문양 변화를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에요.”

아주 어릴 적엔 나나 리안이나 똑같이 작고 귀여운 잎일 뿐이었는데, 그의 것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하면서 개화했다.


“쇠약해지기 시작하면서 문양도 변화가 있었어요. 마치 그 꽃이 리안의 기운을 먹고 사는 것처럼 꽃이 필수록 리안은 약해졌어요.”

그래서 아직 봉오리 단계인 나는 죽을 때가 아니라고 안심하며 살고 있다.


“한 계절이 지나기 전에, 꽃은 화려하게 만개했고 리안은 가장 허약한 모습으로 시들다 끝내 숨이 끊겼으니까요. 그것도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기는 힘드네요. 나중에 연구자료와 함께 그림을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자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아까부터 헤르티안의 얼굴이 어두웠다.

무슨 일인지 물어봤더니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황제께 다녀올 테니 부인은 잠시 쉬고 계십시오.”

“네. 다녀와요.”

오늘은 버려진 궁이 아닌, 본궁에 있는 귀빈실이었다.

벽에 황금이 콕콕 박혀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한 장소였다.

창밖으로는 관상용 분수대가 있었다.

소파는 너무 푹신해서 머리를 기대면 곧장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눈을 붙일까?’

몸이 고단해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살짝 머리만 기대어 보자니 꾸벅 눈이 감겼다.

그대로 그만 단잠이 들었다.


“어?”

시간이 흐른 걸 느끼자 순식간에 눈이 번쩍 뜨였다.

다행히 헤르티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잠을 자고 있을 순 없었다.


“이만 정신 차리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앞에 놓인 시원한 물 한잔을 벌컥 들이켰다.

몸이 훨씬 가벼웠다.

어깨를 짓눌러오던 만성 통증이 모두 씻긴 듯이 나았다.

이런 경우는 하나밖에 없는데.


“잘 잤어?”

역시나. 세르디스가 와 있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더라. 의원을 불러 줄까?”

그의 능력으로 몸이 나은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아뇨. 그냥 피곤해서 잠깐 잠이 든 것뿐이에요.”

귀신 같은 놈.

언제 어디서나 나를 잘도 찾아다닌다.

세르디스는 자연스럽게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네트. 역시 넌 북부에서 볼 때보다 수도에서 볼 때가 훨씬 좋다. 특히 황궁에서 볼 때 제일 예뻐.”

“그래요? 저는 북부에서 있을 때가 제일 예쁘던데.”

“에이. 거긴 추워서 네가 떠는 모습만 봐야 하잖아.”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통할 리가 없었다.


“근데 요새 비올렛이랑 잘 지낸다며. 원래 친했어?”

“전하를 만나기 전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죠.”

그리고 첫 만남에 드레스를 바꿔 입었고.


“나 때문에 친해진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흐음.”

세르디스는 매끈한 턱을 만지며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설마 나랑 비올렛을 이어주려는 건 아니지?”

내 눈이 살짝 커졌다.

물론 그 의도는 전혀 아니다.

저 착한 비올렛을 이런 쓰레기에게 줘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뼈 아픈지!

그래도 비올렛이 좋다니까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아뇨? 공녀님과 전하 사이에서의 일이지 제가 끼어들 문제는 아니죠.”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나는 세르디스와 이어줄 의향은 있었다.

비올렛이 그토록 원하는 사랑이 이런 사랑이라면 말이다.


“하마터면 서운할 뻔했어. 내가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걸 알면서 다른 여자에게 넘겨버리는 건가 하고.”

나직하게 말한 세르디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아닌 척하더니 이제 와서 대놓고 고백하는 건 무슨 경우지?’

가족이라고 하면서 교묘하게 피해 다녔던 그다. 돌연 속내를 드러내는 것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저한테 마음이 있으셨어요?”

나는 모른 척 어깨를 들썩거렸다. 용기가 없어 강제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던 이에게 내어줄 진심은 없었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저는 워낙 이쪽으로는 둔감한 편이라 말해주시지 않아서 몰랐어요.”

끝까지 모르는 척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이는 대공 전하뿐이라 어쩌죠? 안타깝지만 전하께서는 다른 영애를 알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여타 여인 중에선 비올렛 공녀님께서 심성도 고우시고 탄탄한 샤르페넌 공작께서 뒤에 계시니 황자비로 제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능청을 떨며 비올렛을 밀어주었다.


“왜 제게 마음이 있으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 상황을 모두 고려하셔서 심사숙고해주시길 바라요. 서로 웃으면서 지낼 수 있도록.”

물론 뭔가를 기대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다.

설득되는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티격태격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를 내쫓으려 했을 뿐이다.


“아네트. 장난은 이만하고 진지하게 얘기 좀 할까?”

하지만 세르디스는 그냥 가주진 않을 예정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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