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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하필이면 잘생겨서! (72/79)


72화 하필이면 잘생겨서!
2023.08.09.



 
짧은 시간 동안 내게 일어난 일을 돌이켜 보자면, 헤르티안이 나를 좋아한다. 그게 전부였다.

그 하나가 내 머릿속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아네트?”

혼이 빠져 있는 내 앞으로 미카엘이 툭, 고개를 내밀었다.


“어? 어?”

“깨어났단 얘기 듣고 들어왔어.”

“어? 어.”

나는 계속 멍한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답했다. 자꾸 아까 일이 떠오른다. 잊고 싶어도 자꾸 떠올라서 미치겠다.

짝!

양쪽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야야…….”

아프긴 해도 잡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갑자기 왜 그래?”

미카엘은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미안. 갑자기 쓰러졌대서 놀랐지?”

“으응, 네가 몸이 약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쓰러지는 건 처음 봐서. 몸이 안 좋으면 쉬지. 무리하게 날 왜 초대했어.”

“컨디션은 괜찮았는데 갑자기 거울을 보는데…….”

불현듯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거울 속 내가 아닌 아네트가 나한테 경고를 보냈다.

계속 누군가를 조심하라고.


“아.”

생각하려고 할수록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렇게 쓰러진 건, 세르디스와 마카롱을 먹으러 갔을 때뿐이었다.


“아직도 몸이 많이 안 좋아?”

“오늘은 아무래도 쉬어야 할 것 같네. 수도에 있는 동안 너랑 좋은 추억 남기고 싶었는데 망쳐버렸다.”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건데.”

미카엘은 덧붙여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와 장난을 주고받기엔 우리 사이도 애매했다.


“그럼 더 늦기 전에 들어가.”

그렇다고 부러 아까의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근데 아네트.”

미카엘에 대한 배려라 생각했는데, 그는 아니었나 보다. 먼저 다이닝룸에서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네 생일 선물, 잊고 있었다고 한 거 사과하고 싶어.”

“솔직히 그건 너무하긴 했어.”

나는 어색해지기 싫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진심이기도 했다.


“대공 전하 앞에서 계속 너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나야 너랑 제일 친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하께서는 또 다르게 생각할 수 있잖아?”

“헤르티안은 안 그래.”

아니. 이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헤르티안……? 이름으로 불러?”

무심코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미카엘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부르긴 해.”

이번엔 미카엘 눈치를 봐야 하나?

미카엘도 나를 좋아한다고 헤르티안이 그랬는데.

아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아네트. 있잖아.”

미카엘이 돌연 분위기를 잡았다.


‘오늘만 두 번 고백을 듣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고개를 획획 젓고 있으려니.


“너 대공 전하와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지?”

심장이 쾅 내려앉는 질문을 던져왔다.


“그걸 왜 물어?”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올리며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때 편지로 네가 계약 결혼 상대를 구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 뒤로 연락이 잠시 끊겼고, 다른 얘기 없이 대공 전하와 결혼했다고 하길래 일반적인 결혼은 아닌 것 같아서 물어보고 싶었거든. 설마 계약 결혼을 한 건 아니지?”

미카엘이 심각한 얼굴로 내 답을 기다렸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을 해줄지, 말지 고민했다.

그라면 내가 어떤 상황인지 모두 털어두어도 좋지만, 또 다른 희망 고문이 될 것 같아서.


‘내가 계약 결혼을 했다고 하면 이혼하라고 할 게 뻔하잖아!’

그럼 모든 관계가 엉망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안 된다.


“아니. 계약 결혼 아니고 진짜 결혼이야.”

“나한텐 편하게 말해도 돼. 네가 왜 계약 결혼했는지 알아야 내가 도울 수 있어.”

너랑 결혼하라고 할 거지?


“그런 거 아니야. 아까 봤잖아? 나랑 헤르티안 사이는 좋아. 계약 결혼은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지. 정략결혼이면 모를까 계약 결혼 같은 게 어디 있겠어.”

미카엘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딱 봐도 의심하는 얼굴이 되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가 서운하게 해서 그렇구나.”

거짓말하는 티가 역력했는지 그는 나를 믿지 않았다.

미카엘, 미안하다.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내 마음도 이해해주길 바라.


“중요한 건 나는 지금 더 없이 만족하고 행복해한다는 거야. 그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는 달라질지 몰라도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랬다.


“정말 말해줄 수 없는 거야? 대공 전하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똑똑.

그때,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헤르티안이 방문을 두드렸다.

문에 기댄 채로 우리를 번갈아 응시하던 그가 나를 대신해 답했다.


“비밀이라고 하긴 했지.”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돌아간 줄 알았던 손님이 부인의 침실에 들어왔다는 걸 알고 바로?“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쓰러진 사이에 친해졌나?

주고받는 대화가 친구 대하듯 편해 보였다.


“근데 대공께서 비밀이라고 하셨다니. 역시 두 분은 제가 생각한 그 관계가 맞았군요.”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나는 단지 부인이 내가 언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냐 궁금해하길래 비밀이라고 했을 뿐인데.”

그가 나를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뜨거운 시선에 온몸이 열기로 홧홧하게 끓어올랐다.


“그렇죠, 부인?”

그의 멘트에 미카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더니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 전하. 비 전하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자리를 비켜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헤르티안은 그의 말을 대충 들으며 품에 있던 시계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 소후작.”

“잠깐이면 됩니다.”

그가 흐뭇하게 웃으며 팔꿈치로 옆에 있던 화병을 툭 쳤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 화병을 보고 무슨 일을 벌이는가 싶었더니.


“아이쿠. 이런. 실수로 화병을 깨트렸는데 부인이나 소후작이 돌아다니다가 다치면 안 되니 치워야겠네. 하던 이야기는 마저 해. 나는 없는 사람처럼. 괜찮죠, 부인?”

나가지 않으려고 일부러 깬 것이다.

미카엘은 제발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미카엘과 둘이 이야기해도 그에게 해줄 이야기는 없었다.


“미카엘, 나는 너한테 해준 이야기가 전부야. 나는 더 할 말 없어.”

“아네트…… 일단 알겠어. 네가 나한테 느꼈던 서운함만은 기억에서 잊어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어주었다.

이만 미카엘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쉬움으로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뒤로는 헤르티안이 까닥이는 고갯짓으로 무언의 축객령을 내렸다.

미카엘은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나가려는데 헤르티안이 그를 옆으로 밀었다. 휘청거리던 미카엘이 벽을 짚고 섰다.


“뭡니까?”

“발 조심해야지. 소후작이 다치기라도 하면 내 마음이 몹시 아플 것 같아서.”

“전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래,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혼자 돌아갈 수 있겠지? 준비해둔 마차는 친히 거둬주겠네.”

“……갑니다.”

미카엘이 나가고 다시 둘만 남은 자리.

나는 몸을 옹송그리면서 헤르티안을 타박했다.


“따지고 보면 당신 때문이에요.”

헤르티안이 벽에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당신이 카시안의 편지를 보고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해서. 괜히 미카엘만 보면 나를 좋아해서 저러는 것 같고 미안해지잖아요.”

모든 말과 행동이 나를 의식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요?”

그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편지를 읽었을 땐 부인에게 진정한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만나보니까 제가 착각을 한 모양이더군요.”

“어떤 부분이요?”

“오랜 친구보다 부인을 더 잘 알고 부인을 이해하는 건 저라서.”

그가 눈을 가볍게 찡긋거렸다.

나는 낯선 헤르티안의 모습을 보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헤르티안…… 근데 원래 그런 성격이에요?”

고백한 전후가 너무 다르잖아.

마치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특유의 부드러운 눈매도 오늘따라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어떻게 보이십니까?”

“원래 말랑하고 귀여운 곰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우가 따로 없네요?”

가끔은 내가 보살펴 줘야 할 정도로 어수룩한 그였다.

헤르티안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부담되지 않으려 곰으로 살아볼까 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잘 안 돼서. 평생 곰으로 남느니 한 순간이라도 부인께 여우로 남겠습니다.”

나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다가, 이불을 끌어당겨 침대에 퐁당 누웠다.

***

다음 날이 되어도 몸은 가뿐해지지 않았다.


“하루 더 쉬고 황궁에 가는 게 낫겠습니다.”

마차에서부터 줄곧 내 창백한 안색을 걱정한 헤르티안이 걸음을 멈추곤 휘청거리는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황궁까지 와서 돌아갈 순 없죠. 여기서 얼른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요. 수도에서 꽤 오래 있었더니 북부의 냉엄한 바람이 그리워지려 그래요. 맞고 정신 좀 차리고 싶네요.”

“머리가 많이 아픕니까?”

“당연하죠.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프고 귀찮은 일투성이인 황궁이잖아요.”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헤르티안의 눈엔 미안함이 가득 어렸지만.


“헤르티안 오늘은 다시 곰 된 거예요?”

“지금 장난이 나옵니까?”

“네. 나오네요. 그 정도로 안 아프니까 아주 술술 나와요.”

나는 혀를 살짝 내밀어 그를 놀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몸이 조금 무거울 뿐이지 힘든 수준은 아니었다.


‘이것도 남들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거지?’

진심이라면 고맙기보단 부담스럽다.

자리에서 멈춰 고개를 돌렸다. 헤르티안이 긴 기럭지로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온다.


“당신. 가끔 우리 부모님 같은 거 알아요?”

이내 가까워진 그가 내 어깨에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었다. 부모님 같다고 말한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부모든 원수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안위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단단히 망토를 여며주는 손놀림은 여느 때와 같은 헤르티안이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선 예쁘게 리본을 묶어주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말대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그였다.

하다못해 리본 묶는 것도 나를 위해 온 신경을 쏟아붓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가 나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섬세하게 리본을 매던 그가 시선을 느끼고 내게 눈을 맞췄다. 사르르 눈매가 휘었다.

청량한 바람에 흔들거리는 흑색 머리카락. 인형처럼 뽀얀 피부가 명화 속 미의 신을 보는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하필이면 왜 이렇게 잘생겼어?’

보통 잘생긴 것도 아니다. 무지하게 잘생겼다.


“리, 리본은 됐으니까 이만 들어가요.”

분명 과보호는 이만하라고 단단히 일러줄 생각이었는데, 내가 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간신히 그에게 고정된 시선을 떼어내 몸을 돌렸다.

더 있다가는 리본 묶는 모습에 홀려버릴 것이다.


“부인? 얼굴이 빨갛습니다.”

“더워서 그래요! 날씨가 얼마나 따뜻한데 이런 두툼한 망토를 덮으라고 해요.”

“그래서 그런 겁니까? 난 또 설레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예?”

“농담입니다.”

장미꽃보다 빨갛게 농익은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꿀이 뚝뚝 흘렀다.


‘내가 이걸 여태 눈치채지 못했다고?’

나 정말 바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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