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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당신을 좋아합니다 (71/79)


71화 당신을 좋아합니다
2023.08.05.


헤르티안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려던 건 아니었다.

몇 시간 전.

아네트가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졸도하면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서 곤히 자곤 했다.

하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채 고통스럽게 몸을 옹송그리는 평상시의 그녀가 아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눈이 뒤집힌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이성의 끈이 끊어졌음을 느꼈다.


‘아네트를 잃는다.’

곧 그녀가 죽을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다가 이내 멎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헤르티안 또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태 내가 뭘 한 거지?’

그녀의 마음을 얻고 나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겠다는, 쓸데없는 계산을 했다. 그녀가 언제 죽을지 모를 병을 앓고 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며 모든 것을 재고 따졌다.

안일했다.

그녀는 죽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자신을 위안했다.

벨라돈나 꽃의 움직임이 줄었고, 쓰러지고 나서도 그녀는 멀쩡한 듯 벌떡 일어났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미카엘과 쓸데없는 말싸움을 주고받을 시간에 그녀를 먼저 챙겨야 했는데.


‘언제까지나 그녀가 기다려 줄지 알았나?’

건강은 둘째치고라도 그녀 마음을 얻는 데 무슨 자신감이 있던 거지?

카시안이라는 이름도 이젠 아무런 쓸모도 없는 마당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해놓고 결국 겁을 먹었던 거다.

오랜 마음을 거절당할까 봐.

아네트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

헤르티안은 혼이 빠진 얼굴로 집사에게 물었다.


“……의원은 아직인가?”

“기사들을 보내 최대한 빠르게 데리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의원을 기다리는 동안, 헤르티안은 자신의 무능함을 뼈아프게 체감했다.

누워 있는 아네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의원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침대에 누운 아네트의 식은땀을 연신 닦아주는 손길이 잘게 떨렸다.


“열을 내리는 약을 가져왔어요!”

때마침 하녀가 약을 가져왔다.

그가 약을 가지고 아네트의 입을 열었다. 그리고 스푼에 조금씩 따라 그녀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다행히 아네트가 입안에 고인 약을 꿀꺽 삼켰다.

많이 쓴지 눈을 감은 채로 눈을 찌푸렸다.

곧 끓어 넘칠 것 같은 열만큼이라도 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약을 먹였고, 의원이 오기로 했으니까 그만 진정하시죠?”

헤르티안의 흐트러진 모습을 줄곧 바라만 보던 미카엘이 입을 열었다. 일순 살기 어린 눈빛이 그를 향했다.


“집사. 손님을 밖으로 내쫓을 시간이다.”

집사가 곧장 묵례를 했다.

바라던 사항이었다.

도움은 고사하고 주인을 들쑤시는 미카엘을 모두가 거슬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대공비 전하는 종종 이렇게 쓰러진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대공 전하 앞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눈을 뜨실 텐데 뭐 하러 이렇게 안달복달이십니까?”

미카엘은 이때다 싶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황자 앞에서도 쓰러진 적 있었다고 했고. 훔쳐본 편지에서도 종종 졸도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건 북부에서도 마찬가지일 터. 원래 몸이 약한 대공비인데 굳이 호들갑 떨 필요가 있을까?


‘곧 깨어날 사람인데 누가 보면 죽은 줄 알겠네.’

대공이라는 사람이 아까의 여유로움은 모두 잃은 채, 반쯤 넋이 나간 것도 그렇고 괜히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유쾌하지 않았다.


“네놈이랑 말할 시간이 없다. 꺼져.”

낮게 울리는 욕지거리에 움찔한 미카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어떡하죠? 대공비 전하의 열이 떨어지지 않아요.”

아네트의 상태를 살펴보던 하녀의 말에 헤르티안이 시선을 틀어 그녀를 살폈다.

약을 썼지만 전혀 호전되지 않은 몸 상태.

몸이 식기는커녕, 열이 끓어오른 채 발발 떨렸다.


“약효가 아예 들지 않고 있다…….”

“약을 다시 확인해볼까요?”

“아니.”

그동안 아네트를 따라 약초 공부를 했던 헤르티안이다.

이미 약의 상태를 확인하고 먹였다. 약이 잘못된 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효과가 왜 나타나지 않을까?


“아니면 약을 새로 가져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이유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아네트가 평소에 약을 먹은 걸 본 적 있던가?’

자신의 부정맥 약은 살뜰히 챙겨줬으면서, 정작 자기는 약을 먹지 않았다.

단순히 감기에 걸렸을 때도. 디저트를 배불리 먹었다며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약을 찾았던 적이 없었다.

쉬면 낫는다며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병에 대한 약만 안 듣는 게 아니었나?”

불현듯 백작을 통해 아네트에게 주었던 많은 약이 스쳐 지나간다.

아카데미 내내 연구실 안에서 그녀가 고통받았던 이유.


‘어차피 저는 언제 죽을지 모르거든요. 고치는 방법도 모르고.’

제 병에 대한 원인도 치료 방법도 찾지 못했고. 결국, 체념해 버렸다는 걸.


“약이 들지 않는 건 그 병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였어.”

그건 그녀의 고질병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어떤 식으로 아파도 몸을 치료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난…….”

어리석게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후회 어린 한숨이 방안을 울리자, 일순 얼음물을 끼얹은 듯 공기가 서늘해졌다.

그의 말을 이해한 이는 없었다만 심각한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집사도 감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건 작정하고 헤르티안에게 도전장을 내민 미카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끼어들었다간 조용히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눈치껏 방에서 나갔다.

집사와 하녀들도 의원을 데리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남겨진 헤르티안은 조용히 아네트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빌었다.

한 번만 아네트를 깨어나게 해준다면 다시는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

미지의 공간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눈앞에 해롱해롱거렸다.

온전한 정신으로 들었다 해도 이 말을 온전히 해석하기는 어려웠을 텐데.

두통이 남은 상태로 이런 말을 들으니 혼란스러웠다.

싸우다가 고백?


“왜, 무슨.”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그동안 헤르티안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고백이라는 거,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면? 고백도 여러 종류가 있을 것 아니야?

괜히 설레발쳤다가 흑역사를 만드느니 침착하게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건 아닌데.”

고장 났다가 되돌아온 나를 보고 헤르티안은 답답하다는 듯이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눈치 없는 부인이 내 마음도 몰라준 채로 세상을 떠나버리면 제가 죽기 전까지 눈을 못 감을 것 같습니다. 아마 죽어서도 영혼으로 남아 부인 곁을 떠다닐 만큼.”

격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계속 튀어 올랐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내가 생각한 그 고백이 맞았다.

헤르티안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게 전했다.


“하지만…… 당신은 엘레노어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상하다.

내가 본 헤르티안은 엘레노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겁니까?”

“그게…… 당신이랑 저는 계약 관계고, 리리가 당신은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거든요. 그때 딱 나타난 사람이 엘레노어고.”

엘레노어는 그와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낸 사이. 나와 다르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라고 확신이 들었을 뿐이다.


“정말이지 리리는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건지.”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 손가락으로 작은 얼굴이 모두 가려졌다. 마구 흔들리는 목소리에 그가 우는 건가 싶어 고개를 기울여 마주 살폈다.


“제가 마음을 준 사람은 부인뿐입니다.”

이내 그는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려 눈만 빼꼼 내민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움찔 굳어 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달 뜬 열기를 내뿜는 탓에 나는 그대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저를 좋아한다고요……?”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많이.”

쿵쿵.

이번엔 가슴이 난장판으로 날뛰었다. 누가 심장을 헤집어 세게 꼬집어 놓는 듯이, 아프게.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여태 계약 결혼이라 내게 잘해줬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모두 날 좋아했기 때문인 거야?’

연기라고 착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연기에 대단한 소질이 있다던 내가 바보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진심임을 알아도 달라질 것 없는 상황에 미안할 뿐이라는 것.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연애를 못 했을 뿐이지 고백을 걷어차는 건 내 전문이니까.

아카데미를 입학하고 나서부터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애들은 한두 명씩 있었고, 신발장 속 편지나 어딘가로 불러내 제 마음을 전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처럼 가차 없이 거절하면 되는데 그때와는 상대가 달랐다.

헤르티안.

그가 나에게 꽤 소중한 사람이 되었기에 그의 마음을 함부로 밀어내기 어려웠다.


“헤르티안 나는…….”

편협하게도 그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말끝이 흐려졌다.


“엘레노어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까 당신이 엘레노어를 잊지 못해서 결혼이 아니라 허울뿐인 부인을 찾고 있는 거라 생각했어요. 어차피 못 할 거 아무랑 해도 좋다는 마음인 줄 알고…….”

차마 칼같이 거절하지 못하고 다른 말만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시선을 피하고 있는 나를 보던 헤르티안이 제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이젠 돌려 드려도 될 것 같네요.”

내가 부정맥 완화용으로 만들어준 환.


“부정맥이 나타나는 건 부인 때문이니까.”

응?


“제가 왜……!”

곧 그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나 이렇게까지 눈치 없는 애였어?’

나랑 있을 때만 심장이 뛴다는 거잖아.

그것도 모르고 나는 매일 그의 가슴을 몰래 만지면서 진정되지 않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의문을 표했다.


“미, 미안해요!”

픽, 속 시원한 얼굴로 그가 웃음을 흘렸다.


“부인에게 마음을 받아달라는 것도, 속 썩어갔던 지난날을 보상해달라는 것도 아니니까 긴장 푸십시오.”

내게 한 치의 기대도 없어 보였다. 마치 거절할 걸 미리 알고 있는 눈치였다.


‘헤르티안이 싫어서가 아닌데.’

이런 몸으로는 누군가의 진심을 받아주기 어려웠다. 가벼운 연애로 가볍게 즐기다가 서로 쿨하게 뒤돌아서는 거라면 모를까. 헤르티안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감정이 커지면 내 삶에 대한 미련이 깊어지고 그땐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내 삶에 대한 집착이 심해질 것이다.

그 끝을 알기에 섣불리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헤르티안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마음도.


“그것도 미안…….”

“미안하다고는 하지 말아 주시고.”

“옙.”

입이 앙 다물렸다.


“제게 마음이 생겼다면 언제든 말해주셔도 좋습니다. 그 마음에 뜨겁게 보답할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으니까.”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예쁘다고 여길 웃음인데 사악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언제부터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한 걸까?


“헤르티안 혹시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부끄러움을 참고 물었다.

그를 놀리려는 건 아니었다.

원작 속 헤르티안도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그땐 내가 결혼했으니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원작에서 헤르티안이 무성욕자 소리를 들어가며 결혼하지 않았던 거라면?


“궁금합니까?”

끄덕.

고개를 잽싸게 주억거렸다.


“비밀.”

“예?”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저에 대해 알고 싶으면 노력해주십시오.”

헤르티안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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