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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그를 조심해 (69/79)


69화 그를 조심해
2023.07.29.


카시안은 매년 아네트의 생일이면 특별한 선물을 보내온다.

첫해에는 편지를 보낼 깃펜을.

둘째 해부터는 디저트를.

편지로 매번 이번에는 어떤 디저트가 맛있고, 저런 디저트가 맛있다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작년엔 블루베리 마카롱의 맛 평가를 논문처럼 써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생일에 블루베리 잼이 도착했다.

그것도 직접 만든 잼이!

한 번 맛을 보고는 별별 생각이 들었다. 매우 맛있어서 카시안은 파티시에일 수도 있겠다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수도에 있는 디저트 가게란 가게는 다 돈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맛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줄곧 편지에 잼을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았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근데 그걸 잊는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그렇지. 내가 좋아한다며 수제로 만들어준 선물까지 잊을 수 있을까?’

이해하려고 해도 이건 너무했다.


“정말 잊은 거예요?”

머리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미카엘을 보자 목이 메어왔다.

그동안 마음을 준 제일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나.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저도 당연히 기억납니다. 저택에서 블루베리 잼을 만들어 보냈고 그 이후로 계속 잼을 빵에 발라먹고 쿠키에 찍어 먹었다고 편지를 보내주지 않으셨습니까.”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왜 다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 거예요.”

내가 하는 말이지만 참 속이 좁게 느껴졌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헤르티안이 있는 자리에서 싸울 순 없었다.


“대공비 전하……. 알겠습니다.”

미카엘이 망설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아네트라고 불렀을 때보다 더.


“잠시 손을 씻고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씻는다는 건 핑계였고 지금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면 이대로 불편하게 있다가 갈 것 같았다.

다이닝 룸을 나선 뒤.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달리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심란한 얼굴이 되어 나온 나를 보고 집사가 와서 물었다.


“아니요. 잠시 손을 씻을까 해서.”

“예.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물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방 안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내 하녀가 들어와 물그릇을 내어 주었다.


“천천히 씻고 나갈 테니까 먼저 나가 있으렴.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말아줘.”

“네.”

하녀가 나가고 물에 깊숙이 손을 넣었다.

시원한 물이 닿자 조금은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내 감정이 앞서 미카엘을 몰아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미카엘을 초대해놓고 추궁이라니. 고작 날 기억해 주지 않는 게 서운해서 그를 몰아붙였다.

미카엘도 자기 일이 바쁠 텐데.

한편으론 자기 일이 벅찬데도 밤을 지새우며 나를 맞춰 주는 헤르티안과 비교가 되었다.


‘카시안이 헤르티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카시안이 소중하다면서 다른 사람이길 바란다니.

내 욕심이 지나쳤다.


“가서 재미있게 놀다 가자.”

나는 이만 물에서 손을 빼냈다. 깨끗한 수건에 손을 닦고 방 한쪽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상기된 볼때기는 또 어떻고.


“이러고 돌아가서 무슨 말을 하려고. 좀 웃자.”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았다. 웃는 게 더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어수룩한 표정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오기를 잠시.

거울 속 비친 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그리고 눈은 퉁퉁 부은 채로 붉어졌다. 마치 몇 날 며칠을 울다가 밤을 지새운 사람처럼.


“내 모습이 아니잖아.”

거울에 있는 여인은 내가 아니다.

한 발짝 물러서려고 했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거울 속 아네트와 눈이 마주쳤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끼쳐왔다. 저건 내가 아니었다.


“헤, 헤르티안.”

사람을 부르려고 하자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누가 몸을 조종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와 반대로 거울 속 아네트의 불어 터진 입술이 열렸다.


[………을 조심해. 조심해.]

누군가를 조심하라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린다. 나와 같은 목소리지만 가라앉은 쇳소리가 기분 나쁘게 고막을 긁었다.


‘제발 움직여라.’

몸은 밧줄로 나를 옭아맨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고 있는 게 괴로웠다.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닌데. 나를 자꾸 비추는 것만 같아 고통스러웠다.

억지로라도 눈을 감는 방법밖엔 없었다.

하지만 눈꺼풀도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예 눈동자를 반쯤 뒤집었다. 발발 떨리는 몸을 타고 눈물이 타고 흘렀다.

쾅, 거울 안 아네트가 문을 두드렸다.


“헉!”

시선이 돌아갔다.

검은 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거울에 붙어 나를 바라본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건 악몽이었다. 그렇지 않고서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어깻죽지가 욱신거린다.


[조심해야 해…….]

그녀의 찢는 듯한 음성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그깟 디저트가 뭐라고!’

미카엘은 침음을 삼켰다.

아네트의 실망 어린 표정이 눈앞에서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을 망쳐버릴 수 있다.

가짜 카시안을 세운 이유도 사라질 테고, 그렇게 된다면 가차 없이 내쳐질 것이다.


‘후작 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어.’

그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나가서 아네트를 구슬리든, 사과를 하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늦기 전에 그녀 뒤를 쫓으려고 일어서려 했을 때였다.


“아네트도 없는데 연기는 이만하지?”

묵직한 음성이 그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헤르티안이 날이 선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카엘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가만히 있는 아네트를 건드려 부스럼을 만든 건 대공 쪽이었으니까.


“절 초대해서 이 꼴을 보시려고 했던 거죠? 처음부터.”

“알았으면 오지 말았어야지. 곧바로 초대에 응할 줄은 몰랐네?”

헤르티안이 여유롭게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대놓고 대공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내서 오지 않을 줄 알았건만, 이렇게 당당하게 찾아와 제 앞에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안 오면 뒤에서 무슨 약을 칠 줄 알고요?”

“약을 치는 건 내가 아니라 너랑 세르디스 아닌가?”

헤르티안이 코웃음을 쳤다.


“할 거면 제대로 하지 그랬나. 엉성해도 너무 엉성해서 뭐 이건…… 웃음 참느라 고생했잖아.”

“…….”

“네가 카시안 행세를 하면 할수록 너나 세르디스한텐 불리한 일일 거다. 이미 편지까지 훔쳐 간 마당에 내가 카시안이라는 증거도 없어졌고. 이대로 계속 아네트 앞에서 연기한다면 나는 카시안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

“저는 편지를 모두 읽었습니다. 오늘은 잠시 실수했을 뿐이지만 앞으로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억울한 것 같은데? 세르디스한테 몇 푼 쥐어 받고 이렇게까지 열연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 차기 후작 자리라도 보장받았나?”

미카엘이 움찔거렸다. 그걸 헤르티안은 기민하게 알아보았다.


“나도 너처럼 열등감에 찌든 서자잖아. 그래서 네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그래. 나였어도 황태자 자리를 줬다면 이깟 연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의 이가 갈렸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페이스에 말리는 것이다.

그는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어쩌실 건데요? 대공께서 안다고 달라질 건 없는데요.”

“그건 그렇지. 내가 네 후작 자리를 봐줄 수도 없으니 이제 와 그만해 달라 부탁하지도 못하지.”

“그, 그렇죠.”

“근데 말이야. 소후작.”

헤르티안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적당히 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마디.

미카엘은 더는 반박하거나 그를 자극하지 못했다.


 
헤르티안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입가를 정리했다.


“할 말 끝났으면 일어나서 아네트라도 찾아보지 그래?”

“……갈 겁니다.”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따라 헤르티안이 일어났다.


“따라오시게요?”

그럴 거면 왜 찾아보라 말했나.

기분 나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헤르티안은 그 말을 무시하고 문으로 걸어 나갔다.


“찾을 수 있으면 열심히 찾아보라고.”

다이닝 룸을 나가는 그를 보며 미카엘을 기가 차서 입술을 짓씹었다.


“황가 사람들은 다 이 모양인가?”

황자며 대공이며. 여자 하나에 빠져서 이러고 있는 꼴이 정상 같지 않아 보였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다급히 룸을 빠져나갔다.

일단은 그 여자를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헤르티안은 집사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미카엘도 질 수 없었다.


“대공비께서 어디로 가셨는가?”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는 미카엘을 무기질적인 눈으로 바라보더니 꾸벅 목만 숙였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뭐? 왜?”

“…….”

집사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을 다물게 한 범인은 바로 앞에 있었다.


“정말 치사하게 이러기입니까?”

이 타운하우스의 주인인 헤르티안뿐이었다.


“아까는 약을 친다더니 이제는 치사하다라. 자기소개를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닌가? 소후작.”

“이…… 대공비 전하를 숨겨 두기라도 하시게요? 손님을 초대해 놓고 내몰기라도 하는 거라면, 다음에 대공비 전하를 만나서 이 사실을 모두 말하겠습니다.”

미카엘이 이를 부득 갈며 조잘거렸다.

그로서는 아네트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으므로.

계속해서 헤르티안이 방해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카시안으로서 대공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방법밖엔.

그러나 이 방법도 우선 당장 아네트를 만나야만 가능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헤르티안이 자신에 대한 무슨 말을 해댈지 모르니.


“이젠 하다 하다 협박도 하는 건가? 황자가 그렇게 해서라도 가짜 시늉을 하라고 시켰나? 뭐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지. 어차피 다시는 아네트를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헤르티안이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미카엘은 그대로 헤르티안이 가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제가 그렇게 둘 것 같습니까?”

이제 아예 그의 말을 무시한 채로 걸어가는 헤르티안을 보고 미카엘은 성큼성큼 그의 뒤를 따랐다.

막지 않는 걸 보니 그도 무언가를 준비한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자신 있었다.

고작 계약 결혼한 상대이니까.

결혼한 지 한 달.

그리고 카시안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은 5년 동안 아네트와 교류했던 친구이다.

디저트 때문에 가볍게 무너질 사이가 아니다.


‘잘 구슬려서 다시는 못 보는 사람처럼 말을 지어내면 그만이야.’

그런데, 헤르티안이 문을 연 그 방 안엔.


“부인……?”

손을 씻으러 갔다던 대공비가 정신을 놓은 채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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