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대공비가 왜 좋은 거지?
(67/79)
67화 대공비가 왜 좋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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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대공비가 왜 좋은 거지?
2023.07.22.
미카엘은 난데없이 날아든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상대가 만만하진 않네요.”
초대장엔 블란디체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기존 아네트가 보내왔던 편지와는 다른 형식이었기에, 이것을 그녀가 보내지 않았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초대의 주인공은 블란디체 대공, 헤르티안이었다.
“저번에 아네트가 초대한다고 하지 않았어?”
초대장을 건네받은 사내가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었다.
“골목길에서 마주쳤을 때는 대공에 대한 말은 없었습니다. 황자 전하.”
상대는 제국의 유일무이하다고 해도 무방한 황자, 세르디스였다.
얼마 전.
미카엘은 말도 안 되는 제의를 받았다.
황자의 임시 보좌관의 기회를 준다는 연락을.
추가로 형제들을 제치고 차기 후작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덧붙였다.
상대는 세르디스 황자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남자. 의심할 구석은 없었다.
그저 후작가의 삼남으로 형제들을 뛰어넘을 능력도, 세력도 없는 그에겐 눈앞에 뚝 떨어진 보물 더미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조건이 뒤따랐다.
‘아네트의 편지 친구 흉내를 내면 끝. 간단하지?’
하지만 고작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도 따른 판에 고작 거짓말로 여자 하나 속이라는 명령을 못 따를까.’
미카엘은 이 순간을 그저 즐기기로 했다.
여자 하나 속이는 걸로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데,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면 바보지.
그는 속으로 세르디스가 유하다고 생각했다.
차기 황제나 다름없는 직위를 갖고 여자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으니.
‘이복이라도 동생이라 못 죽이나?’
그래봤자 제대로 덤빌 뒷배 하나 없는데 무슨 상관이지. 자신이었다면 죽이든, 여자를 강제로 데려오든 간단한 방법을 찾았을 거다.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어쨌건 이런 유한 면 때문에 자신이 특혜를 받게 되었으니까.
“하여간 거슬리는 새끼.”
세르디스는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내버려 둔 채, 초대장을 먼저 훑었다.
“그래? 근데 그 자식이 직접 초대를 걸어온 거면 아네트가 그놈에게 네 얘기를 했다는 건데.”
아네트는 먼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마음의 문이 열리고 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건네는 정도.
이미 돈독한 관계인 카시안에게 헤르티안 얘기를 하는 건 몰라도, 헤르티안에게 카시안의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었다.
‘왜지? 계약 결혼 관계일 뿐이잖아.’
머리를 쥐어짜 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르디스는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거절할까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기민하게 그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미카엘이 넌지시 말했다.
세르디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초대를 거절하면 그놈 의도대로 되는 거야. 만약 네가 안 가서 아네트에 대한 카시안의 신뢰가 점점 떨어지면? 그놈은 그냥 너를 카시안으로 만들고 꼬리를 잘라버리면 그만이지.”
그렇게 되면 가짜 카시안을 세운 이유가 사라진다.
“가서 완벽하게 카시안을 연기하고 와. 편지를 다 숙지했으니까 그 정도는 간단하잖아.”
세르디스는 시선을 틀어 미카엘을 바라봤다. 알아서 잘하라는 눈빛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자리를 빼앗겠다는.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카엘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극적인 목표가 대공비와 친분을 쌓는 거라면, 최대한 카시안이 되어 보겠습니다.”
“목표? 내 목표는 그놈을 죽이는 건데. 적당할 때에 죽이고 오면 돼.”
노골적인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제가 대공을 죽여야 하는 겁니까?”
세르디스가 죽이는 거면 모를까, 아직 후작이 되지도 못한 자신이 직접 피를 묻히는 건 위험 부담이 있었다.
아무리 그가 후작 자리를 준다고 해도 말이다.
“이제 와서 발 빼는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조금 당황스러워서.”
“내가 뭐 하러 귀찮게 후작이랑 척을 져가면서 너를 차기 후작으로 내세웠는지 생각을 해 봐. 자리는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게 아니야. 내 말이 틀려?”
“아닙니다. 맞는 말씀이죠.”
그는 곧장 수긍했다.
머리를 굴려 보았자, 이제 와 발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은근히 몰아붙이던 세르디스도 그의 태도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아까와 다르게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미카엘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저 굴복하는 자신이 웃긴 건가. 아니면 직접 대공을 죽여 없앨 사람이 생겨서 기쁜 걸까.
한참을 포복절도한 끝에, 세르디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농담이니까 긴장 풀어.”
사람 죽이는 걸로 농담이라.
미카엘은 황자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지에 몰린 쥐를 가지고 놀다가 서서히 죽이는 고양이처럼. 그도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고.
아니나 다를까.
세르디스는 언제 기분 나빴냐는 듯 기대 어린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래. 많이 즐겨두라지. 곧 편지를 다 불태워버린 내 앞에서 고맙다고 고개 숙일 날이 올 거니까.”
참전을 막아준 것은 자신이니까.
편지를 훔쳐다 태워 먹고도 감사 인사를 받는다.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초대장을 직접 보낸 걸 보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나도 가고 싶어지네.”
세르디스의 눈동자에 요상한 빛이 돌았다.
“네가 제대로 약 올려줘야겠다.”
“성심껏 해보겠습니다. 대공비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그래. 돌아오는 대로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세르디스가 나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챙겼다.
“이거 아네트에게 전해주고.”
“선물입니까?”
예쁘게 포장된 상자였다. 포장 끝에 파티세리의 이름이 적힌 상자.
디저트인가?
미카엘은 왜 제게 이런 걸 주나 싶었다.
“우리 아네트가 단 걸 참 좋아하거든.”
그제야 알아챘다. 편지 속 대공비가 디저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지.
그래도 궁금증이 생긴다.
“오늘 초대가 올 줄 어떻게 아시고 선물을 준비하셨습니까?”
디저트는 하루만 지나도 맛이나 형태가 달라지는데.
며칠 지난 디저트를 줄 리는 없고.
“내가 먹으려고 산 건데.”
“황자 전하께서도 디저트를 즐기십니까?”
“원래 안 좋아했는데. 아네트가 하도 맛있게 먹는 모습만 떠올라서 몇 개 집어먹었더니 그 뒤로는 매일 찾게 됐다고나 할까.”
처음으로 세르디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원래 내 건데 아네트한테는 특별히 양보해야지.”
저건 진심이다.
‘대공비의 어디가 좋은 거지.’
여자보다 권력에 관심 있는 미카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
손님 맞을 준비가 모두 끝났다.
“너무 준비가 완벽해서 부담스러워하겠어요.”
“저 장식은 떼 버릴까요?”
헤르티안이 벽에 걸린 장식을 가리켰다.
“아뇨. 저건 헤르티안이 간신히 매단 거잖아요.”
“간신히라니. 저런 장식은 몇백 개쯤 우습습니다.”
“에이. 이마에 땀 맺혔는데요?”
나는 순식간에 화려해진 타운 하우스를 바라보며 그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손님맞이 준비로 어제의 사건으로 인한 어색함 또한 사라졌다.
“그럼 부인께서 닦아주십시오.”
“자 이마 대 봐요.”
손수건을 들어 그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물론, 어색함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의 입술이 예전보다 두드러지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따라 촉촉해 보이네.’
그가 직접 만든 박하잎 크림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붓기는 가라앉고 입술에 윤기가 돌았다.
반면에 내 입술은 약초의 효과가 돌지 않으니 여전히 퉁퉁 부은 채였다.
열기도 남아 있는 것 같고.
그래서 계속 어제 일이 떠오르나 보다. 부기가 가라앉으면 어제 일도 더는 떠오르지 않겠지.
“땀이 많습니까?”
그가 살포시 감았던 눈을 뜨고 물었다.
얼굴이 가까워진 줄도 모르고 딴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움찔거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아, 아니에요. 그새 말라 버렸는지 없어요.”
그가 살짝 웃으며 멀어졌다.
“이제 손님이 오시겠군요.”
“네. 그렇네요.”
“제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헤르티안은 아까부터 계속 물었다.
자신이 조심하거나 주의할 게 있는지.
“가문 이야기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오랜 친구인 나도 처음 만났던 만큼. 혹시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이 된 모양이다.
“다른 부분은 편하게 말해도 됩니까?”
“물론이죠. 카시안은 가문 이야기만 아니라면 정말 열려 있는 사람이에요. 꽉 닫혀 있는 저랑은 다르게 배울 점도 많고 상냥하고 배려심이 깊어요.”
사정이 있어 만나지 못한 것이지. 카시안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헤르티안과도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저도 친구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그때 부인의 편지를 처음 보고 이 사람이 진심으로 된 사람이다. 저도 느꼈거든요.”
환한 웃음이 쏟아졌다.
“그렇죠? 항상 편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한 글자, 한 글자 허투루 쓴 게 아니라 편지를 보는 사람을 생각해 주었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카시안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아봐 주어 기뻤다.
“만나서도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셨습니까?”
하지만 그 질문에는 선뜻 “네!”라고 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만난 카시안에게서는 편지 속 다정함을 느끼지 못했다.
나를 배려해주고는 있지만, 어딘가 눈빛은 어딘가 피곤해 보인달까.
‘내가 예민한 건가. 미카엘은 가문 문제가 있으니까 지쳤을 수도 있는데.’
“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오늘 만남이 기대됩니다. 분명 좋은 사람일 거란 확신이 듭니다.”
어쩐지 나보다 헤르티안이 더 기뻐 보인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좋으세요?”
“저도 소중한 친구라곤 하나뿐이라서.”
그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그렸다.
그러고 보니 헤르티안도 자주 어울리는 친구는 없었다.
어렸을 적에 대공가로 쫓겨나 지냈을 때의 친구들뿐일 것이다. 그마저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진 않았다.
그가 말하는 소중한 친구라는 건 엘레노어겠지.
“대공 전하. 밖에 미카엘 소후작께서 와 계십니다.”
때마침 타운 하우스 상주 집사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오늘 당신께 소중한 친구가 한 명 더 생겼으면 좋겠어요.”
헤르티안이 뒷짐을 진 채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내게 소중한 사람은 자신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듯이.
나는 그런 헤르티안의 표현이 좋았다.
아마 오늘 미카엘과의 만남도 이전보다 훨씬 좋을 거라 생각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