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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약효가 강했던 이유 (64/79)


64화 약효가 강했던 이유
2023.07.12.


맑게 갠 아침이었다.

그러나, 슈웰리에게는 먹구름이 잔뜩 낀 아침이었다.


“아네트와 따로 주무셨던데…….”

이른 새벽, 버릇처럼 아네트 방을 찾던 슈웰리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당연히 비어 있어야 할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자는 제 딸의 모습을 보고 말이다.

기껏 준비한 묘약을 헤르티안에게 건넸건만!


“제가 드렸던 그…… 그건 어떻게 됐나요?”

차마 약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슈웰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도 효과 좋기로 유명한 묘약이다. 하지만 대놓고 약을 썼다고 하기엔 창피함이 뒤따랐다.


“그걸 드시지 않으신 거예요?”

“그게 주신 걸 모두 마시긴 했습니다만…….”

헤르티안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한 병을 모두요?”

한 잔만 마셔도 약효가 이틀은 갔을 텐데. 한 병을 모두 때려 부은 걸 다 마셨다고?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데도 오늘 멀쩡하게 나왔다는 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효과가 없었나요……?”

불현듯 약효의 조건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약효는 상대에 대한 진심이 있어야만 올라온다. 단순히 본능에 취해 벌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공이 아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약효가 있을 리는 없을 테지.’

그녀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다고 확정 지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양을 먹은 헤르티안이 제 눈앞에서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일은 없을 테니까.

신혼인데 벌써 사랑이 식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없었던 건지.

슈웰리의 얼굴이 실망을 넘어 심각함으로 물들었다.


“덕분에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담담한 헤르티안의 대답에 그녀는 의문을 품고 곧장 되물었다. 그럼 아침에 보았던 아네트는 뭐란 말인가?


“의미 있는 시간이라뇨? 두 사람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이가 밤에만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슈웰리의 얼굴이 희망과 함께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

그가 살짝 미소 짓자, 순식간에 슈웰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나! 그, 근데 그렇게 빨리 돌아올 수가 있어요?”

“실은 제가 몸져누운 걸 본부인께서 제가 식은땀을 많이 흘리는 걸 보고는 해독제를 가져오셨습니다.”

헙,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그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네트는 약효가 들지 않는 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약초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내 실수예요.”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제 딸을 몰라도 너무 모른 탓이다. 그래 놓고 헤르티안을 의심했으니 그녀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찾아볼게요.”

“이미 충분했습니다.”

헤르티안은 정중하게 그녀의 성의를 거절했다.

슈웰리는 한 번 더 제안하려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필요 없단 얼굴이네.’

어제 본 것과 다르게 어딘가 후련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슈웰리는 문득 자신이 과하게 주책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마음이 급해졌나 봐요.”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헤르티안은 민망함에 힘을 주고 있는 그녀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걱정 하지 않으시게끔 제가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주책을 부리지 않겠다고 했건만,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반대로 헤르티안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침 백작 부인께 드릴 선물이 있었는데 구경하시겠습니까?”

“어머, 제 선물이요?”

“다른 건 다 잊어도 백작 부인과 백작께 드릴 선물은 챙겨야죠.”

“섬세하셔라.”

슈웰리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 화제를 돌리는 그를 보며 기쁘게 웃었다.


‘괜한 걱정을 했지. 이런 완벽한 짝이 또 어디 있겠어.’

“먼저 가 계십시오. 잠시 방에 들렀다 오겠습니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헤르티안은 슈웰리가 준비해줬던 차를 마저 마셨다. 따뜻한 날씨라 금방 식지 않은 차에서 좋은 향이 났다.

어제 슈웰리가 준 와인보다는 옅은 향이었다.


“약효가 강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는 어제의 자신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헤르티안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켠 순간,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걸 직감했다. 이 약이 어떤 효능을 가졌는지도 대강 눈치챘다.

슈웰리가 회심의 미소를 그리며 몰래 전달한 약이니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헤르티안은 이내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몸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제야 그의 눈에 와인 병에 딸려 온 설명서가 보였다. 슈웰리가 미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주의 사항]

[본 상품은 상대에 대한 확신이 없는 남녀를 위한 것으로 약효는 상대에 대한 욕망에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아니나 다를까. 위와 같은 조건이 있었다. 고작 한 모금 마신 걸로 몸이 날뛰기 시작한 게 이상하다 싶었다. 가볍게 생각했던 그의 몸은 열을 뿜으며 무너져내렸다.


“전부는커녕 한 잔도 채 마시지 못했지.”

이런 반응을 들키기 싫어 모두 마셨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 모금의 결과는 처참했다.

과한 약에 취해 몸이 말을 안 들었을 때까지는 좋았다. 아네트를 보아도 손가락 까딱할 힘이 생기지 않았으니 이걸로 되었는데. 아네트가 돌연 입으로 해독제를 먹였다.

그것도 입으로. 해독제 때문에 움직이지 않던 몸이 풀리기 시작한 것부터 문제였다. 마신 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해독으로 어설프게 약에서 벗어나,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첫 입맞춤은 괴로웠다.


‘약에 취한 상태로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아네트가 먼저 입을 맞출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이런 상황이 올 줄도 몰랐다. 자신을 억제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 헤르티안은 좌절했다. 정신과 다르게 움직이는 몸을 보고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네트가 날 뭐라고 생각할까.’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까. 그녀가 자신을 꺼리지 않을까.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래며 아네트를 마주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아네트의 시선이 묘하게 자신의 입술을 쫓았다.


‘싫은 게 아니었던가?’

시험 삼아 툭 던져 본 말에, 얼굴을 화르륵 달아오르기까지.

그는 긴 고민에 빠졌다.

여태 알고 지냈던 그녀와는 거리가 있었다.

헤르티안이 아는 그녀는 사람 간의 관계에 매우 신중했고, 쉬이 마음을 내어 주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여태 내가 바보 같은 망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

마침내 깨달았다.

그간의 편지는 그저 그녀의 생각 일부에 불과했고,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걸. 지금의 아네트는 과거와 다르다는걸.


“그놈한테 고마워해야 하나.”

헤르티안은 새삼 편지라는 틀을 태워버린 세르디스가 기특해졌다.

앞으로 그가 편지를 들춰보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

나는 아침 식사는 뒤로하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


“비 전하! 눈 밑이 왜 그래요? 벌써 북부에 적응하셔서 백작저가 불편해지신 거예요?”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던 베티가 내 눈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따뜻하고 편해서 좋았어.”

잠을 늦게 잤을 뿐이지.

새벽 네 시가 훌쩍 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하기야 신혼이신데 피곤한 것도 이해가 가지요. 헤헤.”

베티가 야릇한 눈빛을 보내며 실실거렸다.

엄마에 이어서 베티까지.

나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다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어제 일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아 참. 어제 비 전하께서 벗어두신 드레스는 제가 짐에 따로 챙겨두었어요.”

베티가 짐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씻어야겠다 싶어 벗어둔 드레스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따로 챙기지 않아도 돼.”

“왜요? 마님께서 아가씨께 선물하신 옷이라고 들었어요.”

“북부에서 입기는 많이 얇아서 그냥 세탁해서 옷장에 걸어줘.”

베티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매에 있던 쪽지만 따로 빼둘게요.”

“응, 쪽지?”

“정리하려고 보니까 소매에서 쪽지가 떨어져 나오던데요?”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제 연구실에 가서 주운 쪽지가 있었다.


“응. 그것만 따로 보관해 줘.”

“엄청 오래된 것 같아 보이던데 중요한 쪽지인가 봐요.”

베티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중요한 거면 저런 쪽지에 써두지 않았겠지.”

“아직 안 열어 보신 거예요?”

“응.”

뭐랄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달까.

연구실에서의 기억이 온통 어두워서 지금 그걸 까보았다가는 옛날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내용이 뭐든 간에.

***

내 행선지는 샤르페넌가의 귀빈실이었다.

내일 황궁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북부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 전에 비올렛을 만나 선물을 전해주고 싶었기에 먼저 이곳을 찾았다.


“이렇게 귀한 걸 어떻게 받아요.”

오늘도 비올렛의 반응은 만점짜리였다. 내가 준 인첸트를 보고 벌어진 입이 뻐금거렸다.


“공녀님이 갖고 계신 보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럴 리가요!”

비올렛이 혹여나 내가 오해할까 펄쩍 뛰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그녀는 인첸트를 꺼내 소중하게 품에 껴안았다.

이번 선물은 대성공이었다. 헤르티안이나 비올렛이나 반응이 크니까 주는 맛이 있었다.

그녀를 닮은 보랏빛 인첸트는 목걸이에 달았다.


“밖에 나갈 때는 꼭 끼고 나가주세요. 그냥 보석이 아니라 정화 마법이 걸린 거라 언젠가 한 번은 비올렛 전하를 구해줄 거예요.”

그녀에게는 인첸트의 효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비올렛은 장신구를 많이 착용하지 않아서, 이것도 그저 소중하게 간직하기만 할 수도 있었다.


“목걸이도 감사한 데 마법이 깃든 선물이라니…… 저 울어도 될까요?”

울먹거리는 그녀는 처음 만남 때보다 사뭇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처음엔 딱딱한 줄 알았는데.’

친해지고 나니 이토록 솔직하고 순수하다.

세르디스가 비올렛의 귀여움을 모르는 게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계속 바빴을 텐데 언제 이런 걸 산 거예요?”

“어제 수도를 구경하는데 이게 딱 보이더라고요. 보자마자 공녀님이 생각났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보석상에 다녀오는 건데…….”

그녀가 아쉬움을 삼켰다. 숙인 고개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그 모습이 어제 골목길에서 본 모습과 겹쳐 보였다.


“공녀님. 혹시 어제 낮에 외출하지 않으셨어요?”

그녀가 아니라 미카엘이었다는 걸 안다. 어두운 골목이라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본 사람은 분명 비올렛이었다.

일순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착각인지 표정이 다시 온화하게 바뀌었다.


“저는 줄곧 저택에만 있었어요.”

“역시 공녀님이 그런 데에 계실리는 없겠죠. 닮은 사람이었나 봐요. 머리가 공녀님처럼 길고 보랏빛이 나는 사람이었는데…….”

“저 아니에요.”

조금은 화난 듯한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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