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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기분 좋았습니다 (63/79)


63화 기분 좋았습니다
2023.07.08.



“바깥 공기를 쐬지 않으시겠습니까?”

놀란 나를 진정시키려 헤르티안이 한 제안이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수도는 늦봄이라 밤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밤에 피어나는 꽃은 화려한데, 내 눈은 여전히 갈 곳을 잃은 상태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묵묵히 걷는 헤르티안을 멈춰 세웠다. 그는 아까보다 안정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든 질문해도 좋다는 듯 눈을 살포시 깜빡거렸다.


“정말 엄마가 그런 거예요……?”

헤르티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엄마가 왜…….

하지만 그 물음은 그에게 답을 듣지 않아도 유추할 수 있었다.


‘헤르티안이 내게 입을 맞춘 게 다른 뜻이 아니었어.’

정신이 이상해져서가 아니다.

그건 내가 생각한 독약의 종류가 아니었던 거다.


“설마 엄마가 그런 약을 주신 거예요……?”

분명 내게 아기가 언제 생기냐며 언제까지 미루느냐고 물어보셨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아이를 가져야 좋다면서. 근데 그게 당장 오늘 거사를 치르라는 뜻일 줄이야.

창피하다 못해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것보단 제 잘못이 큽니다.”

그는 침실 쪽 테이블에 놓여 있던 비어 있는 와인 병을 들고 왔다.


“약이 아니라 와인만 주신 줄 알고 혼자 과하게 먹은 게 화근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불끈 힘이 솟는 효능이 있는 술인 줄만 알고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단다.

그래서 몸이 달아오르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요, 헤르티안. 제가 부모님께 제대로 말해둘게요.”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평소의 사려 깊은 헤르티안으로.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자신이 불합리한 상황이어도 늘 납득하고 이해하는 버릇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 일도 단순한 사고로 보고 있을 것이다. 무려 진하게 입을 맞췄는데도 말이다.


‘과하게 정직한 거야, 뭐야.’

계약에 충실한 그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계약대로 부모님께 좋은 사이로 보이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생긴 사고라고.

문득 헤르티안의 입술이 평소보다 진하게 보인다.


‘기분 나쁘지 않았지.’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공식 첫 키스는 좋았다. 헤르티안이나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하지만 감상은 거기까지 해야 했다.

우리 둘 사이에 발전은 없을 거니까.

나는 간신히 그의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깨끗한 수도의 밤하늘에도 별이 반짝거렸다.


“이만 들어갈까요?”

오늘 그에게 하려던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해야겠다.


‘근데 오늘 함께 자야 하는 건가?’

엄마가 약까지 쓸 정도면, 기대하는 바가 꽤 컸던 모양인데.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런데, 헤르티안이 내 손목을 잡았다.

약을 먹었을 때와 다른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나는 선득한 감각에 팔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까만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기 전에 잠시 저쪽으로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네?”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지금이요? 어디를요?”

나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하지만 헤르티안.”

“문제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그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렵다.

그는 평소보다 더 깊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오늘따라 간지럽게 느껴진다.


‘헤르티안은 아무렇지 않은 건가?’

나는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며 조금 씁쓸함이 들었다.

불쾌해하지 않아 주어서 고맙기는 한데, 마치 꼬마 아이들이 뽀뽀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이 상황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그에게 우리 키스한 걸 잊어버렸느냐, 굳이 물어보기도 이상했다.

참 애매했다.

***

그가 끝내 발걸음을 돌린 곳은 르앙베리아 백작저 안에 있는 내 약초밭이었다.

봄이 깊어 날이 풀리니 약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헤르티안은 약초밭 근처에 나를 세워두고 홀로, 약초밭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달빛에 의존해 풀을 비춰보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방금까지 입을 맞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로지 약초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찾았다.”

그는 원하던 약초를 찾았는지 그대로 약초를 뜯어 옆에 있던 돌로 약초를 곱게 빻았다. 그리고 조심히 그것을 들고 다가왔다.

나는 의문 어린 눈으로 약초와 헤르티안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방으로 돌아갑시다.”

“네? 네.”

그는 유유히 약초밭을 빠져나갔다.


‘진짜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니겠지?’

약에 내성이 없는 헤르티안이 이상한 묘약을 대량 섭취했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자기 전에 엄마에게 어떤 약을 준 건지 알아 봐야 할 것 같다.

저택으로 들어간 뒤, 나는 계단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인사했다.


“오늘은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니까 홀로 편하게 쉬어요. 저는 제 방에서 잘게요.”

그의 편의보다 나의 편의를 위한 말이었다.

이대로 한 침대에 누웠다간, 밤새 그의 입술을 보다가 밤을 새울 것 같았다.


“잠깐만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그 속을 모르는 헤르티안은 도망치려던 나를 붙잡았다. 정작 본인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일 얘기하면 안 되는 거죠?”

나는 처음으로 그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지금은 그와 조금 멀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알겠어요.”

더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는 한 손에 풀을 쥔 채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에 들어가고 나서도 의미 있는 대화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 그가 하는 행동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가져온 풀을 갈아 성심껏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갔다. 약초를 다루는 거라면 상처를 입어서일 가능성이 컸다.


“어디 다친 데 있어요? 제가 도와줄까요?”

등진 그에게 다가가니, 꽤 익숙한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완성했다.


“다 했습니다.”

“이게 뭐예요?”

“쉐어버터와 박하 잎을 섞은 크림입니다.”

그걸 지금 왜 만들었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아 침대맡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헤르티안, 뭐 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가 옅게 웃었다.


“잠깐 만져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곧 도톰하게 뭉쳐진 약초가 내 입술 위에 올라왔다. 입술에 닿는 생경한 느낌에 놀라 몸이 주춤거리자, 그가 내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그대로 계십시오.”

이번에도 그의 말을 거부하기 어려워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다시 입술에 도톰하게 크림이 올라왔다.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크림을 바르는 손가락이 따뜻했다. 불현듯 그의 입술을 흘긋거리다가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내 입에 이걸 왜 바르고 있는 거야.’

그의 눈을 바라보기도 민망하고 가만히 있자니 몸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그는 꽤 진지한 얼굴로 그대로 내 입술을 관찰했다. 민망했다.


“입술이 부르터서 말할 때마다 아플 겁니다.”

일 분 정도의 숨이 막히는 정적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평소처럼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속이 수런거린다.


“거의 반 시간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그렇죠.”

저절로 속내에 있던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후회했다. 이런 민망한 말을 헤르티안에게 해버리다니.

얼굴이 홧홧거렸다.


“아니, 그렇다고 헤르티안 탓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였으니까요.”

‘나 왜 변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긴장으로 몸은 뜨거워지고 있는데, 입술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싫으십니까?”

“아뇨…….”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헤르티안이 내 입술이 부어 있는 걸 줄곧 생각해 주었다는 뜻이니까.

아까 벌어진 일을 잊지 않고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서.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없던 일로 넘어가 주면 좋은 거 아니었나?’

엄마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내가 입으로 해독제를 먹이기도 했으니까. 서로 잠깐의 해프닝으로 넘기면 되는 일인데.

그러면 되는 일인데…….

그가 아무렇지 않은 것에 서운함을 느끼는 게 이상했다.

마음이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갔다 나오는 것만 같았다.


“다 되었습니다.”

때마침 헤르티안의 손가락이 입술에서 멀어졌다.


“근데 이건 어떻게 만들 생각을 하신 거예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물었다.


“헤르티안도 약초를 잘 다뤄요?”

박하잎을 빻아서 쉐어버터랑 섞었다라.

붓기를 가라앉히면서 부르튼 피부를 촉촉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걸 헤르티안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부인께서 약초를 거액에 판매했다고 하셨죠. 부인께서 오랫동안 약초 연구를 하셨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배웠습니다. 저도 부인과 공감할 이야기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공부하셨어요? 언제요?”

“틈틈이.”

그가 살며시 웃었다.

하는 일도 바쁜 사람이 나를 따라 약초 술을 배우다니.

대단하면서도 헤르티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유난 떨었나 봐.’

심장이 옮겨간 것 같던 입술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박하잎이라고 내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 마음이 차분해졌을 뿐이다.


“헤르티안도 발라요.”

나는 이만 일어나려던 그를 붙잡았다.

원래도 도톰하고 붉었던 그의 입술도 부풀어 올라 있었다.


“자, 입술 쭉 내밀어 봐요.”

살짝 벌어진 입술이 차마 내밀지는 못하고 다물어졌다. 그가 만들어온 크림을 손가락에 듬뿍 묻혔다. 그리고 부드럽게 발라주었다.

헤르티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이전처럼 편하게 헤르티안에게 말했다.


“오늘은 불쾌해하지 않네요.”

지난번에도 불쾌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또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서로 소소한 웃음을 주고받으면서 잘 넘어가기를 바랐는데.


“기분 좋았습니다.”

“네, 네?”

방심하고 있다가 훅 들어온 멘트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만 들고 있던 크림을 놓쳐버렸다.

뭐가 기분 좋았다는 건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무, 무슨 말을!”

헤르티안은 특별한 변명 없이 얕은 웃음을 흘렸다.


“피, 피곤했을 텐데 어서 자요. 저는 오늘 방에서 따로 잘게요. 책도 봐야 하고 이것저것 할 게 있어서……”

나는 그대로 문으로 뒷걸음질치며 함께 침실을 쓰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늘어놓았다.


“잘 자요.”

문고리를 잡자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숨이 저절로 멈췄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봐요!”

재빨리 나오느라 문이 요란한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은 또 이렇게 닫히고 난리야!’

나는 그가 오해할까, 문밖에서 외쳤다.


“일부러 세게 닫은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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