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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뜨거운 입맞춤 (62/79)


62화 뜨거운 입맞춤
2023.07.05.


헤르티안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서로의 숨결이 맞닿는다.

그의 뜨거운 숨이 내 볼을 간지럽혔다.


‘아니, 이러니까 꼭 키스라도 하는 것 같잖아?’

나는 이상한 상상으로 나가 있던 정신을 잡았다.

이건 엄연히 그를 치료하기 위함이다.

물론 치료라고 해도 이런 짓을 하는 건 잘못일지도 모른다.


‘어느 누가 약을 못 삼킨다고 입으로 먹일 생각을 하겠어.’

이번엔 코가 맞닿았다. 아무리 잡념을 떨치려고 해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 해독제를 뱉을 수도 없다.

이게 마지막 해독제였으니까.

나는 처음처럼 굳은 다짐을 하고, 눈을 꾹 감은 채로 그의 입술로 직행했다.

막상 닿으니 큰 감흥은 없었다.

그것보다 이 쓴 해독제를 빨리 넘겨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창백하게 말라버린 입술을 비집고 해독제를 조금씩 밀어 넣었다. 완전히 맞붙지 못해 생긴 틈새를 타고 해독제가 흘러내렸다. 뚝뚝 흘러내리는 걸 보고 나는 강하게 그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게.

정신을 잃은 그는 입에 머금은 걸 밀어내지 못해 본능적으로 꼴깍거렸다. 입에 남은 해독제는 금세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꾹 감았던 눈도 슬며시 떴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헤르티안이 정신을 잃어서 다행이야.’

만약 멋대로 입을 맞대는 걸 보았다가는 불쾌해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입술에 묻은 해독제를 쓱쓱 닦고는 천천히 뒤로 몸을 뺐다. 그가 바로 정신을 차리면 곤란하니까.

그러나, 조용히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어?”

그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지던 순간, 다시 그에게 끌려가 버렸으니까. 긴 팔로 내 목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이번엔 해독제가 없는 맨 입술이었다.

뜨거운 그의 열기를 가득 담은 촉촉한…….

누구는 토끼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누구는 눈을 뜨지 못한 채였다.

마치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고운 미간을 구긴 채로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술만을 연신 탐했다. 어느새 해독제의 쓴맛이 사라진 입술은 무언가를 갈구하듯 내 입술을 먹고 또 머금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가 내 등과 허리를 매만지다, 옷을 움켜쥐었다. 혹시나 내 옷마저 헤르티안의 셔츠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나갈까 식은땀이 흘렀다.


 


“헤르…….”

목소리는 끝내 그의 입술 틈새로 말려 들어갔다.

아까랑은 다르다.

고작 입을 맞추고 해독제를 밀어 넣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감각.


‘이상해.’

심장이 난동을 부렸다. 헤르티안의 심장처럼.

머릿속은 적신호가 번쩍거렸다.


‘이러다 큰일 나겠어.’

힘껏 헤르티안을 밀어 보려 했지만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그의 맨살에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그는 나를 더 파고들었다. 이제는 입술을 넘어 그 안쪽까지 파고 들려는 움직임에.

콰직.

그의 살덩이를 깨물어 버렸다.

그 덕에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괜찮아요?”

근데 너무 강하게 물었나. 그가 실낱같이 눈을 떴다. 잃었던 정신도 돌아오게 만드는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한숨이 내 얼굴을 간질였다. 조금 벌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헤르티안…… 정신이 들어요?”

그러자 그가 괴로운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웃통을 벗은 채 내게 입을 맞추다가 우는 남자라. 근데도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해서 나도 같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손을 뻗어 매끈한 볼을 축축하게 적시는 못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내 위로에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족합니다.”

“그 정도면 됐지. 뭐가 또 부족하다고…….”

민망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해독제가 부족…… 부족해서 몸이 이상해…….”

아. 해독제가 부족하다고.

그를 두고 이상한 생각을 해버린 내가 변태처럼 느껴졌다. 엄연히 따지면 헤르티안이 입을 맞춰온 탓에 머릿속에 그렇고 그런 상상들로 가득하지만 말이다.


“저기…….”

나는 어깨에 이마를 꾹 누르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그의 등을 토닥토닥 달랬다. 우선 그를 떨어트려 놓고 해독제를 가지고 오려는 생각이었다.

서글피 울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해독제를 더 가져올게요.”

나는 슬며시 까만 머리를 내 어깨에서 떼어냈다.

내 얼굴만큼이나 그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이건 제정신인 사람이 아니었다. 맑은 눈에 빛이 사라지고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해독제가 더 필요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여기서 그를 자극하지 않고 나가야 했다.


“빠르게 다녀올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쉬고 있어요.”

아주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달래며 방을 살폈다. 물이라도 한잔 따라주며 시선을 돌리고 싶었는데, 이미 손수건에 모두 부어버린 상태였다.

나는 슬그머니 카우치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여기서 쉬고 계시면 저는 금방 돌아올 거예요.”

마치 사육사가 된 기분이랄까.

나를 빤히 바라보는 헤르티안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멀어지고 이내 문 쪽으로 몸을 돌리니.


“어디 가.”

내 뒷모습을 보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줄기를 타고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녀오십시오.”

이내 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평소와 같은 다정한 헤르티안의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에 속 깊숙한 곳에서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가슴근육에 하마터면 소리를 꽥 질러버릴 뻔했지만 말이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오셨어요?”

기척도 없이 눈앞으로 다가온 그는 다시 숨을 헐떡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두렵기보다 무서웠다.

그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황후가 사람이 망가지는 약을 줬나 봐.’

혹시 그가 망가질까 봐.

헤르티안이라면 나한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곧 내 얼굴처럼 망가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얼른 가십시오!”

다시 헤르티안이다.

그의 자아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얼른!”

그가 괴롭게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손을 놔줘야 가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은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더니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자꾸 만지고 싶어서 이럽니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어서.”

그는 고통스럽게 제 팔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빼려고 하면 뺄수록 손에 가해지는 힘만 커졌다.


“윽.”

이윽고 나도 아플 만큼 아귀힘이 세졌다. 티를 내지 않으려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이미 그가 보았던 모양이다. 그는 제 팔을 잡던 손을 내리고 장식장에 있던 거대한 도자기를 꺼내 들었다.


“헤르티안?”

“아무래도 부인을 놔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몸이 조종당하기라도 하는 건가요?”

걱정스럽게 물었다. 대체 무슨 약을 먹으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하는지.


“본능한테 철저히 당하는 중입니다.”

그가 도자기를 높게 쳐올렸다.


“지금 그걸로 뭐 하려는 거예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멈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 돼요. 멈춰요!”

하지만 내 부름은 끝내 그를 멈추지 못했다.

***

헤르티안이 스스로를 기절시킨 덕분에 무사히 방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자기 머리를 내려쳐.’

나는 바닥에 쓰러진 헤르티안을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속으로 황후 욕을 하다 보니 금세 연구실에 도착했다.

이번엔 그의 머리에 난 상처와 해독제를 동시에 챙겼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인지.’

십 분 전까지 나에게 펼쳐진 상황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걸 반증하듯 부풀어 오른 입술은 아직도 뜨거웠다.


“아냐 아니야. 이건 엄연히 사고야.”

헤르티안이 약에 취해 있었고, 스스로도 몸을 제어하기 힘든 상황이었잖아.

그게 아니라면 내게 입을 맞출 이유도 없지.

내가 그에게 해독제를 넣으려던 것처럼, 그도 약 기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제발 나대지 마. 심장아.’

그렇게 결론짓는다고 없었던 일이 되진 않았다.

다시 돌아간 방안.

헤르티안을 보니 옆구리를 누가 간질이는 듯했다.


‘그러게 왜 잘생긴 데다가 몸은 좋고 난리야.’

나는 그의 완벽한 외모를 탓하며 거칠게 해독제 뚜껑을 열었다.


“아까는 정말 죄송합니다.”

어느새 깔끔히 옷을 갖춰 입은 그가 죄인 모드가 되어 내게 사과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의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서.


“쭉 마셔요.”

그래도 독한 해독제로 준비했다. 몸에 남아있는 약 기운을 쫙 뽑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헤르티안은 군말 없이 해독제를 꿀떡 넘겼다.

어느새 시계는 저녁 시간을 한참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났네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식사 시간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부모님이 오늘은 식사 얘기가 없으셨다.


“혹시 모르니까 저는 부모님께 식사는 따로 하겠다고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하십시오.”

그도 시선을 피하며 얼른 다녀오라며 나를 등 떠밀었다.

나나 헤르티안이나 아까 일에 관한 얘기는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법. 내가 먼저 말꼬를 텄다.


“그리고 부모님께는 황후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저희 집에 만약 황후의 끄나풀이라도 있다면 저희 부모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 헤르티안을 이런 상태로 만든 사람이 수도에 있는 부모님이라고 망가트리지 못할까…… 저는 걱정이 돼요.”

헤르티안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미안하지만,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집안 사용인 중에 끄나풀이 있다면 더욱 큰일이고.

멜슨에게 한 번 배신 당한 이력이 있어 부모님이 더욱 조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배신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그 전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당황하며 나를 멈춰 세웠다.


“헤르티안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저도 일을 키울 생각은 없는데 눈앞에서 헤르티안이 아픈 모습을 보니까 저도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어요.”

계속 도발하는 황후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더는 피하는 게 상책이 아니다.


“이번 일은 황후가 벌인 일이 아닙니다…….”

그는 명확히 누가 자신에게 약을 먹인 건지 아는 눈치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황후가 아니라니.

그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혹시 세르디스 황자님인가요?”

세르디스도 내가 그의 아내가 된 걸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을 터. 황후가 아니라면 세르디스밖에 없었다.

미안함에 고개가 푹 떨어졌다.


“나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게 해서 미안해요.”

“세르디스도 아닙니다.”

그가 낮게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그는 내 눈을 피해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곤란한 눈치였다.

헤르티안이 내게 이 정도로 망설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두려움이 서서히 커졌다.


“대체 누구길래……?”

머뭇거리던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백작 부인이십니다.”

예?

우리 엄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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