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해독제를 먹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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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해독제를 먹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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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해독제를 먹여야 하는데
2023.07.01.
헤르티안이 황태자가 된다.
말하자면 그렇다.
지금까지 확신해 마지않았던 세르디스의 자리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마 대부분은 빼앗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헤르티안은 정실의 씨가 아니니까. 나조차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가정이다.
‘헤르티안이 황태자에 오르면 영지 문제는 물론이고 황후의 견제도 피할 수 있어.’
황태자에 책봉된 것만으로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황태자를 공격하는 자체만으로도 역모에 해당한다.
현재 황후의 손을 잡고 있는 귀족 중, 역모를 일으킬 배포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가정에서 걸리는 문제가 한두 가지는 아니야.’
나는 베티가 떠난 방에 홀로 앉아, 원작 내용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원작 속 헤르티안은 끝내 대공비를 들이지 않았다. 끝내 본인의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기에 황좌 자리는커녕 황태자 자리도 넘보지 않았다. 그저 북부에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지냈던 사람이다.
그렇다는 건 황후가 그를 끝까지 괴롭히지는 않았다는 뜻. 지금과 달랐다.
“나랑 결혼해서 원작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얕은 한숨이 흘렀다.
그에게 득이 되는 결혼인 줄 알았는데, 되레 독이 되는 면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게 설득할 방법은 없을까?’
헤르티안이 황태자가 되는 길은 가시밭길이다. 세르디스를 밀어내자니 비올렛이 걸리고. 황후에게 그가 위협적이지 않다고 설득하는 건 말도 안 되고.
나는 잃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을 떠올렸다.
헤르티안과 비올렛.
그러다 어렴풋이 한 일화가 떠올랐다.
‘둘이 만난 적이 있었어.’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을 만큼 어색한 장면이 그려졌다.
헤르티안이 세르디스를 도왔던 적이 있었다. 비올렛의 설득 때문에.
비올렛이 그를 적이 아닌 아군으로 만들며 세르디스의 위기를 돕도록 했고, 그녀는 남주의 조력자이자 짝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어떤 계기로 그가 도왔는지에 대한 건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이 책은 그저 세르디스와 비올렛의 사랑 이야기일 뿐이고, 거기에 헤르티안이라는 조연은 사랑을 키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그럼 헤르티안에게 세르디스를 도와서 견제를 피하라고 해야 하나?”
서로 피해를 보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다. 물론 세르디스와 엮이는 자체가 싫다. 그렇지만 내 문제 때문에 헤르티안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세르디스를 사랑하는 비올렛을 잃고 싶지 않아.’
남주는 고사하고 여주까지 적으로 돌릴 자신도 없었다.
문제는 비올렛처럼 헤르티안을 설득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 심지어 세르디스를 피하려 계약 결혼까지 했는데, 인제 와서 그와 편을 먹으라는 말에 설득력이 있을까?
없지.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비올렛을 만나서 답을 구하는 건?
여주인 그녀라면 분명 답을 알고 있을 터.
“그 전에 헤르티안의 의견을 물어보자.”
아무리 싫다고 해도 세르디스에겐 황후만큼 깊은 악감정은 없을 거야. 그래서 원작에서도 도왔던 거겠지.
나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방에서 나왔다.
어느새 복도엔 노을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었다.
‘아직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마지막에 보았던 응접실이 아닌, 부부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가 돌아오는 것을 전달받은 어머니가 직접 준비해준 방이었다.
내 방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 누가 보아도 어머니가 달아놓은 꽃장식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우치에 앉아 있는 헤르티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문을 두어 번 두드려 인기척을 낸 뒤 안으로 들어섰다.
“헤르티안, 저예요.”
내 부름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자고 있나?’
피곤할 법도 했다. 수도에 와 있는 동안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을 테니까.
나는 방을 둘러보다가 고이 접혀 있는 담요를 가져와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단잠에서 깨지 않도록.
얼마나 피곤했으면 앉은 상태로 잠이 들었을까.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며 카우치에 앉아 있는 그의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뜨거운 기운과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헤르티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헤르티안?”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건 물론이오, 얼굴을 벌겋게 달뜬 채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정신 차려 봐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나는 그를 천천히 눕힌 채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를 닦았다. 그런다고 열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나는 급한 대로 테이블에 있던 물을 그대로 손수건에 쏟아부어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닦았다. 그제야 차가운 기운에 정신이 들었는지 헤르티안이 느른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네트?”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입으로 처음 듣는 내 이름이 낯설어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부인.”
그것도 잠시. 숨을 몇 번 들이켜던 그가 나를 원래의 호칭으로 바꿔 불렀다.
“네. 저예요. 정신이 들어요?”
그는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눈을 가볍게 감았다가 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게…….”
망설임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설마 황후? 저희 집까지 사람을 붙여서 약을 쓴 거예요?”
여태 참았던 화가 치솟았다.
“더는 못 참아요. 돕는 거고 나발이고 없어! 내가 황후고 뭐고 다 밀어버릴 거예요!”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거친 말이 쏟아졌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했던 고민이 산산이 부서졌다.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늘 강인하게 나를 바쳐줬던 그가 처음으로 쓰러졌다. 그 충격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정신이 무너져내렸다.
‘우리는 왜 날마다 가시밭길인 건데.’
새삼 그 사실이 서러워서 눈물이 터졌다. 엉엉 울어버렸다.
“왜……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왜 우리한테만 이런 시련이 있느냐고요.”
세상 불공평하다.
누구는 악행을 벌여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우리는 치열하게 사는데도 당하고만 사는 걸까?
고작 조연 나부랭이라서?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도망 다니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건데.
나는 그의 배에 얼굴을 묻어버리고는 훌쩍거리며 눈물 콧물을 짜냈다.
“서러워요 정말…… 나는 왜 항상 일찍 죽어야 하는데…… 나도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현실 한탄을 이어 이제 빙의 한탄까지 하기 시작했다.
‘억울하잖아.’
병에 걸려 죽는 시한부 인생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래서 곱게 죽었잖아. 그런데 왜 기껏 빙의시켜 줘놓고 나를 또 죽이려고 하는지.
“세상에 신이 있기는 해? 있으면 그건 X신이지 X신!”
헤르티안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밀려드는 억울함에 취해 그만, 욕까지 뱉어버렸다.
신에게 벌을 받을 만큼 욕을 하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신음을 흘리며 끙끙 앓는 헤르티안이 보였다.
“아, 헤르티안…… 기다려요. 내가 치료해줄게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때였다. 덥석, 내 손목에 크고 따뜻한 손이 감겼다.
“가지 마십시오…….”
“그대로 두면 밤새 아플 거예요.”
킁.
흘러나오는 코를 먹으며 맹맹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그는 힘없는 손으로도 나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아픈 거 보기 싫어요……. 그러니까 제발 치료하게 두세요.”
또 울컥 눈물이 맺혔다. 아픈 사람을 보는 건 늘 괴로웠다. 아픈 건 나 하나로 충분한데, 리안도 너무 아프게 죽었다. 그걸 보았던 나도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파서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를 만큼.
“오해…….”
“더는 소중한 사람이 아픈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 몸을 획 돌렸다. 덕분에 나약하게 눈물을 흘리는 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방에서 빠져나가 내 약초 연구실로 뛰었다.
***
약초 연구실.
한참 들어와 보지 않았던 백작저 꼭대기 층. 햇볕에 약초가 변질될까 봐 창문을 모두 가려둔 그곳은 캄캄하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나는 손을 더듬어 성냥을 찾아 불을 켰다. 오랜만인데도 몸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이곳을 찾은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시간을 보낸 것 같아서. 리안을 죽인 병을 찾아내지 못했고, 리안이 행복하게 즐겁게 살라고 말해줬는데도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까.
“해독제가 어디 있더라…….”
이제 그만 훌쩍이고 정신 차려야 해.
소매로 남은 눈물을 마저 닦아냈다. 그리고 해독제를 모아둔 서랍 문을 열었다. 그곳엔 스무 개가 넘는 종류의 해독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왜 병을 치료한다면서 해독제를 만들었냐고?
일부러 만든 게 아니다.
연구를 하다 보니 해독이 되는 배합법을 찾은 것뿐이지.
“여기 있다.”
아마 헤르티안이 먹은 건 미약일 것이다.
사람을 죽일 용도가 아닌, 겁을 주기 위한 용도.
황후가 대놓고 사람을 죽일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얼른 헤르티안에게 가져가자.”
혹시 모르니 두 병을 챙겼다. 그리고 안 좋은 추억이 가득한 이곳의 불을 껐다.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거칠게 발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어깨에 부딪힌 촛대가 굉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왜 여기다가 촛대를 둬서는.”
나는 괜히 촛대를 탓하며 바닥을 놔 뒹구는 초를 찾았다. 구석으로 떨어진 초 끝에 불씨가 남아 있었다. 심지 끝에 붙은 희미한 불씨를 짓이기고 있자, 그 옆으로 무언가 보였다.
“쪽지?”
열어본 흔적 없는 쪽지였다. 후후 입김을 불자 쪽지 한 면에 붙어 있던 먼지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열어보고 싶은데, 열어볼 자신이 없었다. 바닥으로 내려간 기분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 나는 그만 쪽지와 함께 해독제를 챙겨 연구실을 떠났다.
***
“헤르티안!”
곧장 그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카우치로 내달렸다가 그만, 그를 보고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갑자기 왜 벗고 있어요?”
셔츠를 입고 있던 아까와 달리, 그는 지금 시원한 반나체가 되어 있었다. 셔츠는 찢어진 건지 바닥을 나뒹굴었다.
‘몸에 열이 많이 나서 벗었구나.’
그는 북부에서도 얇게 입고 돌아다닐 만큼 열이 많은 체질이니까. 열이 더 오르니까 많이 갑갑했겠지.
나는 애써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몸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몸을 축축하게 적시다 못해 뚝뚝 흐를 만큼.
“안 되겠다. 땀부터 닦아줄게요.”
아까 그의 몸을 닦던 수건을 가져왔다. 마저 그의 몸을 닦아냈다. 몸은 또 왜 이렇게 단단한지. 땀 때문에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에 윤기가 더해져 육감적인 몸매가 되었다.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가슴도…….
‘나 변태였나? 아픈 사람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몸은 매일 같이 껴안고 잤던 몸이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감탄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눈길이 가는 건, 단순히 보기 좋은 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버렸다.
“읏…….”
땀을 닦아낼 때마다 움찔거리며 탄식을 터트리는 헤르티안은, 정말 위태로워 보였다. 안쓰러우면서도 묘하게 야릇했다.
‘나야 괜찮지만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어.’
그가 아픈 게 아니라 흥분한 줄 알 것이다.
나는 담요를 반으로 접어 그의 가슴에 살포시 덮어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땀을 닦는 데에 집중했다. 아까보다 열이 내린 것 같다는 생각에 꼼꼼하고 샅샅이 몸을 닦았다. 이제 그의 배를 지나 옆구리를 닦을 차례였다.
“그, 그만…….”
헤르티안이 크게 몸을 뒤틀며 내 손을 치웠다. 그런데 분명 괜찮아지고 있던 몸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헉. 괜찮아요?”
그의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사과같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심한 상태였다. 그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몸을 웅크렸다.
“헤르티안! 잠깐만 정신을 차려 봐요. 해독제, 해독제를 마셔요.”
급하게 해독제를 꺼내 들었지만,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건지 미동조차 없었다.
“정신 차려요!”
나는 강제로 그의 입을 벌려 해독제를 밀어 넣었다. 벌어진 붉은 입술 옆으로 해독제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입에 든 무엇을 삼키지도 못할 만큼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이다.
“진작 해독제부터 줬어야 했는데……. 어떡하지?”
이대로 의원을 부르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알린다면 이 상황을 모두 설명해야 한다. 그와 상의 없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도.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른 방법은 없다. 이 방법밖에는.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는 남은 해독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