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누가 누굴 흉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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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누가 누굴 흉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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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누가 누굴 흉내 내?
2023.06.14.
카시안의 이름으로 아네트 앞에 서는 건 어떤 기분일까?
헤르티안이 이 상상을 얼마나 했는지는 감히 수를 헤아려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네트가 실망할까? 아니면 좋아할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감정을 품을까?’
그의 머릿속에서만 수만 가지 상황이 펼쳐졌다.
게다가 그는 방금 카시안이라는 껍데기를 버렸다. 이제 아네트 앞에서는 당당하게 헤르티안으로서, 남편으로서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네트가 카시안을 만나고 왔다니?
“누가 누굴 만났다는 겁니까?”
헤르티안은 인생 최대의 혼란에 휩싸였다.
진짜 카시안이 여기 있는데 대체 누가 카시안이라는 말인가.
“헤르티안? 갑자기 왜 그래요?”
버럭 소리를 내는 헤르티안을 보던 아네트가 의아하게 물었다.
“너무 궁금해서 그만.”
그는 멋쩍게 웃으며 뒷목을 쓸었다. 마음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게 어떤 자식인지 당장 알아내서 사지를 찢어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혼 전에 제가 편지 친구가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는 그 친구를 드디어 만났지 뭐예요.”
“그래서. 그 정체가 누구였습니까?”
다급하게 묻다가 끝에 말꼬리를 늘였다. 그녀에게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테이블 밑으로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까지 억제하지는 못했다.
“헤르티안은 모르는 사람일 거예요. 귀족이지만 활동은 많이 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었습니까?”
“있더라고요. 집안 문제가 있는지 제게도 가문 이야기하는 걸 꺼렸거든요. 저를 만나는 것도 그래서 꺼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헛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편지를 모두 훔쳐 읽은 것처럼 자신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사람이군요. 그래서 그분이 누구랍니까?”
헤르티안이 입안을 짓씹으며 재차 물었다. 아네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누구인지 말해주었다.
“미카엘 발로소네요.”
그녀의 말대로 그가 잘 알지 못하는 이였다.
한 마디로 자신과 비슷한 핑계를 댈 수 있는 사람을 적절히 골라온 것이다.
‘세르디스 그 새끼가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제 앞에서 편지를 모두 불태운 놈이 세르디스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자신과 아네트의 사이를 질투해 도발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녀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이 카시안이라는 걸 밝히지 못하는 걸 이용해서 벌이는 짓.
“헤르티안? 아는 사람이에요?”
헤르티안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아네트가 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소후작이라니 꽤 직위가 있는 사람이군요.”
“저도 놀랐죠. 게다가 세르디스 전하의 임시 보좌관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세르디스 전하와 틀어진 걸 알고 무슨 일인지 알아내고 싶어서 곁으로 들어갔다나 봐요. 미안하게.”
“개소리!”
순간 참다못한 헤르티안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네트는 처음 보는 그의 욕에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났다.
“화, 화났어요?”
“네. 화가 납니다.”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소후작이라는 놈이 할 일이 그리 없나? 세르디스 같은 놈 옆에 빌붙어 들어간 주제에 아네트를 걱정한 척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괘씸했다.
그가 씩씩거리고 있자, 아네트가 짐꾸러미를 뒤적거리며 그에게 약환을 건넸다.
“부정맥 심해져요. 진정해요.”
“감사합니다.”
“근데 헤르티안은 뭐가 화나는 거예요?”
그는 짧게 고민했다. 화가 나는 이유야 수천 가지지만,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것 중엔 이것이 가장 적당했다.
“부인께 생선 요리를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생선 때문에 화가 나셨다고요?”
아네트는 계속해서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저는 그런 센스없는 사람이 제일 싫습니다. 저였으면 처음 만나는 친우에게 제일 좋아하는 요리를 대접할 겁니다.”
결국 아무거나 떠오르는 말로 변명했다. 물론 센스 부족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흉내를 낼 거면 제대로 알고 흉내를 내야지. 감히 아네트에게 생선 요리를 대접해?
‘나는 입맛까지 바꿨는데?’
헤르티안은 결혼 후에 입맛까지 바꾸었다. 즐겨 먹던 생선 요리를 다 집어치우고 날마다 그녀가 좋아하는 달걀 요리나 고기를 즐겼단 말이다. 혹여나 냄새를 맡은 아네트가 불쾌할까 봐.
“생각할수록 괘씸합니다.”
그가 이를 으득 갈다가 재킷을 집어 들었다.
“어디 나가려고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오늘은 부인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려야겠습니다. 그런 나쁜 추억은 잊어버리게.”
***
헤르티안은 맛집을 알아보겠다며 먼저 타운하우스를 빠져나갔다.
나는 그가 빠져나간 자리를 보며 쿡쿡 웃었다.
“가끔 보면 나를 제일 잘 아는 건 카시안이 아니라 헤르티안 같다니까.”
한 번도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결혼하기 전부터.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내가 원하는 걸 척척 내어주었다. 마치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사처럼.
덕분에 카시안과의 만남으로 가라앉았던 기분이 단번에 좋아졌다.
“후식으로는 마카롱을 먹으러 가자고 할까? 어제 먹었으니까 다른 걸 먹을까.”
나는 입가를 정리하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식사를 마친 걸 보고 노 집사가 다가왔다. 그는 음식이 남아 있는 접시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님. 음식이 입에 안 맞으셨습니까?”
“훌륭했어요. 근데 점심에 맛있는 걸 먹으러 나갈 예정이라 조금만 먹었어요.”
“그러셨군요. 다행입니다.”
노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주인님께서 마님께서 아침으로 즐겨 드시는 음식이라고 하셨는데 혹시나 입에 맞지 않으신 걸까 걱정했습니다.”
“대공님께서요?”
내 물음에 노집사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제 하우스로 돌아오시자마자 마님이 편하게 지내도록 식사부터 가구 배치까지 지시하셨습니다.”
의아하기는 했지만, 워낙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 금방 이해되었다.
“대공님이 꼼꼼하신 편이잖아요. 이해해주세요.”
내 말에 집사가 눈을 키우더니 이내 허허 웃었다.
“힘든 건 전혀 없었습니다만, 꼼꼼하시다는 건 그간 주인님을 모시면서 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그런가요? 제가 지켜본 대공님은 철저한 분이세요.”
“아마 마님이시기 때문에 대공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잘 보이고 싶어지는 법이니까요.”
노집사가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반면에 나는 헤르티안의 철두철미함에 재차 감탄했다.
배려심은 물론이고 오래도록 헤르티안을 모신 노집사마저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보게 하다니.
오늘도 그에게 한 수 배워간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오늘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도 계약 결혼 때문이겠지.’
이 모든 게 계약 결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아니라면 이런 다정함도 배려도 모두 사라질 걸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허했다.
언젠가 이혼하게 되면 헤르티안이 더는 내 앞에서 웃을 일은 없겠지.
그때가 되면 이혼한 부부를 연기하려고 나를 차갑게 대할 것이다. 그는 철두철미한 사람이니까.
안 좋은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님. 외출준비를 도와드릴 하녀를 부를까요?”
노집사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나는 식사를 모두 치우고 온 집사를 보며 서둘러 대답했다.
“부탁할게요.”
그는 예의를 갖춰 묵례를 건넨 뒤, 나가기 전 짧게 덧붙였다.
“부디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오십시오.”
상투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내 잡생각을 사라지게 하였다.
‘그래도 이 순간을 즐기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 잡생각 때문에 괴로워하긴 싫으니까.
***
헤르티안과의 약속은 정오.
단장을 마치고도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그동안 수도의 거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날씨 정말 포근하다.”
맑은 하늘. 선선한 바람. 따뜻한 햇볕까지.
북부에선 좀처럼 만끽할 수 없는 날씨가 내 기분을 설레게 했다.
나는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걷다가, 한 보석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 보는 특이한 간판이 시선을 끌었는데, 전시되어 있는 장신구들이 하나같이 예뻤다.
내가 북부에 가 있는 동안 새로 생긴 보석상인 듯했다.
“이건 비올렛한테 잘 어울릴 것 같네.”
그중에 은은한 보라색 보석을 보자, 곧바로 그녀가 떠올랐다.
얼마 전 비올렛이 북부에 왔을 때, 약초 거래와 리리 때문에 미처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게 줄곧 마음이 쓰였다. 수도에 올라가게 되면 꼭 들리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선물도 함께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용돈도 두둑하게 챙겼으니 이 정도 목걸이를 살 돈은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보석상 문을 열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널찍한 내부. 독특한 패턴의 벽지에 밝은 샹들리에 빛 때문에 보석들이 은은하게 광을 내었다.
“어서 오십시오!”
보석상 직원이 밝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이거 포장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곧바로 아까 보았던 목걸이를 골랐다.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안에 그보다 더 멋진 장신구들이 많은데, 구경 한 번 해보지 않으시고요?”
그의 말대로 다른 보석상보다 전시된 장신구가 꽤 많았다.
지금 보니 많은 것 정도가 아니라 쌓아 놓고 파는 수준이었다.
“종류가 너무 많은데요? 이 정도 보석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색도, 모양도 다양한 장신구들이 즐비했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그것들을 구경했다. 그러자 뿌듯한 얼굴이 된 직원이 알아서 설명을 해주었다.
“저희 가게는 단순히 보석을 가공해서 만드는 장신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저희는 마석에 천연으로 색을 입혀 각기 다른 힘을 부여했기 때문에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인첸트라고 부르지요.”
인첸트는 마법이 깃든 물건을 가공한 것이다. 주로 보호구나 무기에 쓰이는 방식으로 들어만 보았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보석이 마석이라니.
“완전 흥미가 돋는데요?”
소설 속 세상의 재미가 이제야 나타나는 듯했다.
“그럼 이 보라색 인첸트에는 무슨 능력이 있어요?”
“설명해 드리기 전에 선물할 상대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그분은 소중한 분입니까?”
“네. 소중한 사람이에요.”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했죠.”
나는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직원이 “그렇다면!”이라고 외치며 뭔가 번뜩인 듯 눈을 키웠다.
“처음부터 안목이 출중하시다 생각했는데 역시 딱 맞는 인첸트를 고르셨군요.”
“소중한 사람에게 주기 좋은 능력이군요. 보호 마법인가요?”
“보호 능력도 좋지만, 전쟁에 나갈 것이 아니라면 크게 필요한 상품은 아니죠. 그것보다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는 보라색 인첸트를 꺼내와 내게 보여주었다. 비올렛을 닮은 영롱한 빛이 퍼져 나왔다. 벌써부터 이걸 착용하고 기뻐할 비올렛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여기엔 정화 마법이 들어 있습니다. 절망으로 가득한 순간에 나쁜 기억을 잊게 하고 몸에 있는 독소를 배출해 깨끗하게 정화 시키는 마법이지요.”
무난하지만 비올렛에게는 필요한 능력이었다. 원작에서도 항상 궂은 일만 당하는 불행한 사람이니까. 그녀에겐 꽤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혹시 위치 추적 능력이 있는 인첸트도 있나요?”
“최근에 치안이다 뭐다 말이 많아서 어린 영식, 영애분들께 인기가 많은 상품이지요. 다만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합니다.”
“괜찮아요. 주세요.”
이건 헤르티안을 위한 선물이었다.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쉽게 그를 찾을 수 있도록.
“예! 그럼 색별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