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카시안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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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카시안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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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카시안의 정체
2023.06.10.
카시안이 누구일까.
내가 이 상상을 몇 번이나 해봤을까?
본격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을 땐, 어머니를 붙잡고 귀족가 영식들을 나열해보기도 했다.
‘아네트. 그냥 물어보면 되잖아.’
‘하지만 카시안이 불편해하는걸요. 하나 있는 친구마저 잃고 싶지는 않아요.’
어릴 적 나는 진심으로 마음이 통하는 카시안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보이는 대로만, 내가 느끼는 대로만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참 많이 궁금했었다.
아카데미를 거닐다가도, 데뷔탕트를 치를 때에도.
혹시 저 사람이 카시안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계속했었으니까.
티는 안 내도 은근히 떠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는 내가 상상했던 사람 중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발로소네 소후작님 맞죠?”
은하수를 닮은 듯한 은색 머리칼이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남자.
바로 얼마 전, 세르디스 곁에 있던 미카엘이었다.
“당신이 카시안이라고요?”
“실망했군요.”
놀란 나를 보며 미카엘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니, 실망한 게 아니라 놀란 거예요. 당신이 정말 카시안이라니.”
솔직히 누가 나와도 놀랐을 것이다.
다만, 얼마 전에 본 사람이 카시안이라고 해서 조금 더 놀랐을 뿐이지.
‘그래서 저번에 나를 아주 잘 안다고 했던 거였구나.’
카시안만큼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말 카시안 맞아요? 소후작님 당신이?”
당장 믿기는 무리였다. 누군가 나와 카시안의 관계를 알고 그인 척 나섰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의심 어린 눈빛에 그가 옆에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해요. 저 역시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오랜 친구라고 나타나면 먼저 의심부터 했을 테니까.”
그가 내게 건넨 상자 안에는 파란색 편지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내가 여름에 바다를 그리워하면서 보냈던 편지가.
“세상에나.”
반가운 마음에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카엘은 나를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읽어보지 않을래요?”
“읽어볼래요.”
봉투에 적힌 33이라는 숫자는 이 편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가늠하게 해주었다. 거의 초반에 카시안에게 보냈던 편지였다.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지 못한 채로 서툰 글씨체로 적어 보냈던 그때가.
“몇 년이나 지났는데 방금 보낸 것처럼 깔끔해요.”
편지의 상태가 놀라웠다. 마치 하나하나 신경을 써서 보관한 듯이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설마 편지 전체를 다 보관하고 있었던 거예요?”
“색별로 나눠서 보관했죠. 하나도 빠짐없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받은 편지 몇 개는 찢어지기도 하고 색도 바랐다. 나름 보관한다고 서랍에 잘 넣어두긴 했지만, 이 정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그런 걸 바라고 보낸 편지가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내가 미안한 게 많죠. 저만 아네트를 알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말해주지 못했잖아요.”
그가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리니 처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오랫동안 집안 문제가 있어서 미처 밝히지 못했어요.”
그가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 편하게 해요.”
카시안이라는 걸 알았으니 더는 말을 높여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럴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카엘이 다시 눈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너도 말 편하게 해.”
“그럴게. 근데 집안 사정이라는 건 지금은 해결된 거야?”
카시안은 편지에서 극도로 집안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렸다.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정체나 가문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고. 주로 이야기를 한 쪽은 나였다.
‘발로소네 후작가가 보통 집안은 아니지.’
겉으로 드러난 가정사는 없지만, 발로소네 후작가는 어릴 때부터 강도 높은 교육을 받는 걸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인재를 많이 배출했고 언제나 정계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응. 이제 머리 아플 일은 없을 것 같아. 이대로만 간다면 무사히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고.”
“잘된 일이네.”
미카엘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2명의 형을 제치고 자신이 소후작이 되었지. 그리고 세르디스의 임시 보좌관이 되기도 했고.
나는 물을 홀짝거리다가 그에게 슬쩍 물었다.
“저번에 황자 전하의 보좌가 되었다고 했잖아.”
“응.”
“그건 왜 들어가게 된 거야?”
세르디스가 유능한 인재인 미카엘을 탐냈다는 건 안다. 그로서도 하나뿐인 황제의 후계자인 세르디스 뒤에 서는 게 앞날을 위해서 유리할 테지.
‘설마 복수를 위해서?’
문득 최근에 보냈던 편지가 떠올랐다.
내가 세르디스와 데이트를 한다고 떠들었던 편지. 그리고 다음에 바로 세르디스를 떠나서 계약 결혼 상대를 찾는다고 했었지.
카시안은 그때 뭐라고 했더라.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얼른 말해줘.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줄 테니까.]
분명 그렇게 말했다.
‘처음으로 카시안이 적극 나서겠다고 말한 순간이었지.’
그 뒤로 편지가 한동안 끊겼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르디스 전하랑 네가 무슨 일 있었다는 건 알아.”
그의 말에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길게 늘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네 편지를 받고 놀랐었으니까. 그 뒤에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해서 물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말해줄 수 있어? 전하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짜 궁금해?”
“궁금하지 않았으면 보좌관이 되지도 않았을 거야.”
미카엘의 느른한 미소가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정말 나를 위해서 세르디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보좌관이 된 게 맞았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단지 편지 친구일 뿐인데 내가 뭐라고 그런 일을.
“말하기 힘들면 나중에 말해줘도 돼.”
“정말?”
미카엘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대신 수도를 떠나기 전에는 말해줬으면 좋겠어. 북부는 멀어서 편지를 보내기 어렵더라고.”
“그래. 근데 카시안. 내가 갑자기 결혼해서 서운하지는 않았어?”
말해버렸다.
카시안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지.
하지만 어쩌겠어. 차마 너를 계약 결혼 상대로 이용할 수가 없었는데.
나 딴엔 카시안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찾은 것이다.
“서운했지. 네가 최근에 보낸 편지 읽고 나서는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줄 알았어.”
그렇게 느낄 법도 했다.
원작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는 눈앞이 아찔했으니까.
내 목숨이 아니라 가족과 가문을 위해서 도망쳤다. 원작과 다르게 세르디스가 내게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내 일상도, 내 행복도 모든 게.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는 계약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건 카시안뿐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내가 뭘 해도 이해해줄 사람이었으니까.
“당황스러웠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창피하다니까.”
“얼마나 경황이 없었으면 그랬겠어. 나는 이해해.”
미카엘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편한 건 아니지만 카시안이라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도 속 이야기를 터놓고 할 사람이 필요했구나.’
그동안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면서도 많이 외로웠나 보다. 항상 가족들이 나를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편하게 이야기해줘. 그래야 나도 뭔가 도울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어떤 이야기부터 해주어야 할까.
세르디스와 데이트하게 된 이유부터 알려 줘야겠지.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괜히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피다가 운을 뗐다.
“아카데미 졸업하고 얼마 안 된 시즌이었어.”
미카엘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주문하신 요리 나왔습니다.”
종업원들이 요리를 담은 트레이를 가지고 왔다.
“내가 미리 시켰어.”
“잘했어. 안 그래도 배고팠거든.”
“일단 먹고 마저 이야기할까? 시간은 괜찮지?”
“응.”
앞에 놓인 식사 뚜껑이 열렸다.
입맛을 돋우는 내음이 가득 풍기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오늘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기에 싹싹 긁어먹을 예정이었다.
“맛있게 먹어.”
그런데 선뜻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이거, 훈제 연어구이네?”
“여기서 제일 유명한 요리래. 맛있겠지?”
미카엘은 큼직하게 썬 연어를 맛있게 먹었다. 그를 따라 나도 작게 조각낸 생선살을 입에 넣었다. 특유의 훈제 향과 함께 비린 향이 올라와 와인으로 입을 헹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불편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미카엘의 태도였다.
‘내가 생선 요리를 싫어하는 걸 몰랐나?’
몰랐을 수도 있다. 까먹었을 수도 있고. 나도 카시안과 나눈 이야기를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
시선이 편지를 담은 상자에 머물렀다.
편지는 저토록 소중히 보관하면서 내가 몇 번이고 말했던 걸 모르다니.
‘나라면 잊지 않았을 거야.’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5년. 그의 식습관과 취향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파티에 갔는데 어떻게 되었다고?”
“아무래도 그 얘기는 나중에 해야겠어. 수도에 오고 쉬지 못해서 많이 지쳤거든. 너도 알다시피 어제 황제 폐하를 알현했고 오늘은 오전부터 황후 폐하와 같이 있었거든.”
미카엘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오늘따라 헤르티안이 만들어준 크림 파스타가 당긴다.
***
아침으로 써니사이드업과 갓 구운 크루아상이 나왔다.
타운하우스의 주방장 실력이 꽤 좋았다.
“너무 맛있어요. 이제야 살 것 같아요.”
한입 가득 토스트를 욱여넣자, 헤르티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저녁을 못 드시고 들어오셨습니까?”
헤르티안은 일이 있어 황궁에 갔다가 느지막이 타운하우스로 돌아와 미처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네. 제가 싫어하는 게 나왔거든요.”
문득 어제를 떠올리니 어깨가 축 처졌다.
“생선 요리?”
“어떻게 알았어요?”
“부인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 아닙니까.”
같이 산 지 얼마 안 된 헤르티안도 이렇게 잘 아는데!
문득 어제가 생각나 서운함이 몰려왔다.
“아무튼 생선 때문에 저녁을 대충 먹었더니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누군지 몰라도 부인과 친한 사이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게……. 제일 친한 사람이어서 문제에요.”
“제일 친한 사람……? 백작이나 백작 부인이십니까?”
내가 고개를 젓자 헤르티안이 궁금한 듯 맞은편에 다가와 앉았다.
“부인께 제일 친하고 소중하고 하나밖에 없는 단짝은 한 명밖에 없지 않습니까?”
헤르티안이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 카시안을 설명했다. 예전에 편지를 보았던 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아닐 테고.”
“맞아요. 그 사람.”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제 카시안을 만나고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