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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부끄러워서 그랬습니다 (54/79)


54화 부끄러워서 그랬습니다
2023.06.07.



“꺄악!”

어두워진 하늘 아래, 영애들의 비명이 사냥터를 가득 채웠다.


“피, 핏덩이가!”

헤르티안의 등장에 사냥터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헤르티안을 비롯한 기사들. 그리고 그가 질질 끌고 온 것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황후께서 제 걱정을 하고 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헤르티안은 빨갛게 물든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제야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등장한 헤르티안을 보던 황후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 사냥이 잘되었나 보네.”

“누구 덕분에 목숨을 걸고 싸웠더랬죠.”

“다행이구나.”

반면에 황후는 덤덤하게 제 발밑에 있는 걸 내려다보았다.


“황후께서 이걸 간절하게 원하신 것 같길래 직접 준비했습니다.”

“냄새가 고약하구나.”

거대한 구체의 핏덩이.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황후가 일어나 그것을 발로 툭 차기 전까지는.


“눈, 눈알입니다!”

푸른 동공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건…….


“드래곤의 눈입니다.”

“뭐? 드래곤의 눈?”

그의 말에 황후의 여유롭던 모습이 씻은 듯 사라졌다. 나도 놀랐다. 헤르티안이 동굴에서 무사히 도망쳐 나온 줄 알았건만, 드래곤의 눈알까지 뽑아 왔다니.


“인상 쓰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많은 주름이 더 늘어납니다.”

“네가 감히 드래곤을 죽였다는 거니? 신성한 드래곤을 죽였다는 거야?”

“선물이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저는 또, 이 눈알에 피부 주름이 가시는 효과라도 있는 줄 알고 열심히 뽑아 왔는데.”

헤르티안이 비꼬듯 말했다.


“무슨!”

“일전에 부인께 피부 관리법에 대해 물으신 적 있으셨습니다. 마침 그게 딱 떠올라 혼신을 다했죠.”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에 황후가 주춤거렸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이전과는 달라 보였다.


“와. 대공 전하께서 드래곤 사냥을 다녀오신 겁니까?”

“소수의 기사를 데리고 소탕에 나서신 거고요?”

어느새 주변엔 드래곤 이야기를 듣고 영식들이 몰려 있었다. 황후는 차마 그들 앞에서 화를 낼 수 없어, 피 묻은 드레스를 잡고 휙휙 자리를 떠났다.

헤르티안은 눈을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영식들에게 눈알을 넘기며 말했다.


“황후께서 필요 없다 하시니 그건 너희가 가져라.”

그러고는 드디어 나를 돌아보았다.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하얀 피부에 닿아 흉측하게 덩어리졌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야위어 보이는 그에게서 정말이지 고약한 피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싫지가 않았다.

헤르티안이 다시 돌아온 게 그저 다행이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몸에 이 피는 다 뭐예요.”

나는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쓱쓱 닦고 그의 몸을 살폈다.

속상하게도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걱정할까 봐 얼굴만은 웃고 있었다.


“저야말로 부인의 계획을 망쳐서 미안합니다. 돌아가서 다시……”

“지금 제 걱정할 때예요? 본인 몸도 성치 않으면서.”

“저는 항상 부인 걱정뿐입니다.”

“제가 뭐라고…….”

살짝 감동할 뻔했는데.

주변엔 아직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다.


‘헤르티안은 이런 상황에서도 프로답구나.’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도 항상 이 이유 때문이었지.

원래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오늘따라 조금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

헤르티안과 나는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타운하우스에 머물기로 했다.

수도 한가운데 위치한 타운하우스는 꽤 널찍하고 좋았다. 따로 관리해주는 상주 사용인도 있었으며 기사들이 머물 곳도 있었다.

먼저 몸에 있는 피를 씻어낸 헤르티안이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거. 부인이 보낸 거죠?”

하얀 보자기.

어제 내가 엘레노어에게 함께 보낸 물건이었다.

그녀를 통해 나는 소원을 바꾸겠다는 말을 남겼다.

헤르티안과 기사들이 모두 실종 상태이며, 사냥터와 이어진 곳으로 흔적이 있어 예상컨대. 그는 플라보 동굴에 있을 것이라고.

갇혀 있을 헤르티안의 탈출을 위해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내가 직접 연구했던 약초 가루와 함께. 투란의 보물은 반납하고 대신 사람을 보낼 기회를 얻었다.

세르디스가 헤르티안이 죽을 줄 알고 참전 명령을 거둔 지금, 투란의 보물을 가진 건 큰 의미가 없으니까.


“네. 맞아요. 드래곤에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단숨에 그 많은 양의 가루를 들이마시면 단숨에 정신을 잃게 되거든요. 황실에 있는 기사들을 보낸다고 해도 드래곤을 상대하기는 어려우니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약속대로 황제가 기사를 보내준 덕분에 헤르티안에게 무사히 전달되었다.


“효과는 있던가요?”

“네. 덕분에 저희도 정신을 잃을 뻔하긴 했지만.”

헤르티안이 보자기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방금까지 드래곤을 상대하고 온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럼 그냥 자게 내버려 두지 왜 눈알을 뽑아와요!”

나는 화가 나 버럭 소리쳤다. 위험하게 드래곤을 왜 자극한 거야.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자게 내버려 두고 싶었는데 눈을 감은 채로 공격을 해오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그래서 정말 드래곤을 죽인 거예요?”

내가 경악하며 묻자, 헤르티안이 급히 설명했다.


“아닙니다. 죽이진 않고 눈 하나를 뽑으니 쓰러져 그대로 동굴을 빠져나왔습니다.”

“다친 사람들은 몇 명이에요?”

“동굴 입구에서 미물 떼가 몰려와 싸우던 기사 다섯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중상은 아닙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저도 기사분들 치료에 힘쓸게요.”

“부인이 없었더라면 저희는 아마 드래곤의 식사 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그저 다행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그가 없었던 동안 일어난 일을 말해주었다.


“참전 명령은 거둬졌어요. 세르디스가 선뜻 황제 폐하 앞에서 책임질 테니 참전 명령을 거둬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마 당신이 멀쩡하게 돌아오지 못할 걸 알고 흔쾌히 부탁한 걸 거예요.”

그가 죽을 거라는 확신은 없어도 헤르티안이 며칠간 자리를 비웠다는 걸로 어떻게든 이용할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겠지만.


“본격적으로 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나 봅니다.”

“걱정 마요.”

헤르티안이 죽으면 나도 죽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서로가 서로를 철저히 이용해 먹을 때까지 우리 중 누구 하나도 사라져선 안 된다.


“고작 저들 손에 죽지 않을 거예요.”

나는 헤르티안의 손을 꼭 잡고 다독였다. 그러다 아차 싶은 마음에 손을 떼어냈다.


“그나저나 저에 대한 화는 다 풀렸어요?”

헤르티안이 사라지기 직전의 일이 떠올랐다. 궁전에서 옷장 속에 일어난 작은 해프닝 때문에 그가 나를 피했던 일이.


“예? 제가 부인께 화를 냈습니까?”

“그때…… 옷장에 숨었다가 나오고 나서 제게 많이 불쾌함을 느끼셨잖아요. 그래서 새벽에 먼저 떠나버리시고.”

“그건 불쾌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가 곧장 대답했다.


“그럼 왜?”

“그게…….”

어느새 벌게진 얼굴의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헤르티안이 불쾌하다고 생각하죠, 뭐.”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그가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실토했다.


“부끄러워서 그랬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부끄럽다고요? 그렇다기엔 저희 결혼하고 나서 매일 같이 껴안고 잤잖아요.”

“정말 잠만 잤으니까요.”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제가 더듬기도 했는데요? 헤르티안 몸이 너무 따뜻해서.”

단순히 잠만 자지는 않았지. 그가 자는 동안 손이 너무 시려서 그를 파고들었으니까.

그런데도 나와 접촉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그가 새삼스러울 뿐이다.


“부인은 저를 마음껏 만지셨지만, 저는 부인을 만진 적이 없으니까요.”

그가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귓불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알겠어요. 오해는 풀린 걸로 해요.”

나는 그만 이야기를 끝맺었다. 나도 계속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기에. 이 주제로 계속 이야기하다가는 머릿속에 빨간 불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깨끗한 천을 들고 돌아왔다.


“눈이나 감으세요.”

시중 없이 혼자 씻은 탓에 그의 얼굴에 피딱지가 남아 있었다.


“무얼 하려고요?”

“천으로 뭘 하겠어요. 얼굴 닦아 드리려고요.”

“다른 것을 하셔도 됩니다.”

“떽.”

장난기 어린 말투에 나는 그의 눈을 강제로 내리눌렀다. 그제야 조용해졌다.


‘오늘따라 더 잘생겼네.’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봐서 그런가.

고작 이틀도 안 되는 시간을 떨어져 있었다고 그의 얼굴이 새롭게 느껴졌다.

헤르티안이 죽으면 여러모로 나라 손해지. 이런 미남은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니까.


“다행히 얼굴에 상처는 없네요.”

헤르티안의 뽀얀 피부가 이제야 깨끗해졌다.


“아까 거울을 보는데 무슨 괴물이 서 있더군요.”

“저도 놀랐어요. 얼굴에 피가 잔뜩 묻어서 왔을 때 저는 무슨 저승사자가 온 것 같더라니까요.”

“……저승사자가 뭡니까?”

아차.

저승사자는 여기 없는 말이지.

이곳에서 산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종종 이전 생의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인께서는 가끔 저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시고는 합니다.”

헤르티안이 눈을 살며시 떴다. 그 바람에 가까이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얼굴을 닦고 있는 내 손을 살포시 맞잡으며 나붓이 속삭였다.


“늘 그게 어디서 온 말인지 궁금했습니다. 주변에 물어도 책을 찾아도 나오지 않아서요.”

 

 
곤란하네.

내가 하는 말을 하나같이 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제가 사실은 현대에서 온 사람인데 거기서는 죽을 때 저승사자가 온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데, 그때였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때마침 침실 문을 두드리고 타운하우스 상주 집사가 찾아왔다.


‘집사님 나이스 타이밍.’

내가 닦던 수건을 옆으로 치워두고 헤르티안에게 눈짓하자, 그가 집사에게 다가가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대공비 전하 앞으로 사람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부인 앞으로?”

“오늘 저녁 약속 장소로 데리고 가겠다고 마차를 함께 보냈습니다.”

집사의 말에 편지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어제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오고 나서 방에 있던 카시안의 편지.


‘저녁에 나를 찾아온다고 했었지.’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려온 만남인데도 말이다.

헤르티안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날짜를 미뤘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헤르티안. 저 잠시 밖에 다녀올게요. 저녁 식사만 간단히 하고 돌아올게요.”

“따로 약속이 있으셨습니까?”

헤르티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황궁에 오고 나서 흉흉한 일뿐이라 내가 어디 나가는 게 걱정스럽게 느껴질 법도 했다.


“네. 잠시 저녁 약속이요.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저녁만 먹고 들어올 거에요.”

나는 생긋 웃어 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굳이 카시안을 만난다곤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런 사생활까지 털어두기엔 수도로 온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헤르티안도 내게 많은 걸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담백하게 덧붙였다.


“기사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

510통.

그간 카시안과 주고받은 편지 수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작은 손거울을 꺼내 내 얼굴을 확인했다.

분명 도착하기 전까지 전혀 긴장되지 않았는데, 막상 만날 시간이 다가오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착한 곳은 수도의 한적한 레스토랑.

내가 들어가자, 종업원이 자연스럽게 나를 프라이빗룸으로 안내했다.

그가 문을 열어주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열린 문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보여 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직은.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남자는 내가 들어온 걸 보고 의자를 꺼내 주었다.


“고마워요.”

아, 카시안이니까 반말을 써야 했나?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시선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자기소개라도 할까?’

카시안에게 먼저 만남을 청한 건 나인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어색하게 구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헤르티안이 해준 말 때문에.

나는 아직도 카시안의 편지를 볼 때면 종종 그 말을 떠올린다.


‘편지를 보낸 분이 아네트 영애를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그전까지는 잔잔하게 흘렀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어두워 보이네요. 어딘가 불편해요?”

온갖 잡생각에 잠긴 그때. 카시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도 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아니요. 아니. 불편하다기보다 어색해서.”

“우리끼리 어색할 게 뭐가 있어요.”

그건 그렇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그러지 말고 편하게 있어요.”

봄바람 같은 목소리가 나를 달랬다.

그런데,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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