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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카시안은 이제 없다 (52/79)


52화 카시안은 이제 없다
2023.05.31.


타닥타닥.

불 속으로 빠르게 타들어 가는 것.

그건 아네트의 편지였다.

5년 동안 헤르티안이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소중한 편지.

그걸 지켜보던 오센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못해 몸이 덜덜 떨렸다. 헤르티안이 어떤 심정으로 저걸 보았는지 곁에서 줄곧 지켜보았기 때문에.


“어, 얼른 불을 꺼야 합니다! 너희 얼른 일어나라!”

오센은 급히 기사들을 깨웠다. 정신을 차린 기사 여럿이 동굴 안에 지펴진 불을 보고 급하게 달려가 망토로 덮었다. 불은 금세 꺼졌지만, 이미 타버린 편지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후, 후.”

오센은 몇 개라도 건져보고자 잿더미를 털었다. 잿더미가 코를 찌르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건 헤르티안이 가장 아끼던 편지. 그걸 손쉽게 훔쳐 태워버린 사람들이 원망스러워 감정이 격해졌다.


“이건 주인님에 대한 도발입니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계실 겁니까! 언제까지 이런 취급을 당하고만 있어야 하냔 말입니까!”

눈에 띄게 어두워진 오센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블란디체의 기사들도 편지가 헤르티안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에 건방진 오센의 태도를 지적하지 못했다.

헤르티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남은 편지를 줍고 기사들을 저지하고, 그나마 형체가 있던 것들과 함께 모두 태워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센은 다급히 헤르티안을 말렸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그러십니까…….”

“어차피 다 외웠다.”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외워도 매번 처음 열어 보는 사람처럼 열지 않으셨습니까. 전에는 적진에 편지를 놓고 왔다며 다시 습격하지 않으셨냐고요.”

오센은 지금 헤르티안이 어떤 마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삶은 아네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으니까.

그때, 동굴 반대편에서 큰 소리의 폭파음이 들렸다.

동굴을 막고 있던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그리고 그곳으로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 뚫린 곳으로 다수의 마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르티안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을 보다 오센에게 말했다.


“오센. 503번째 아네트의 편지가 왔을 때를 기억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센은 잠시 당황했지만, 헤르티안의 달라진 눈빛을 보고 대답했다.


“기억합니다. 그거 받고 나서 거의 일주일은 전쟁터가 피바다였잖습니까.”

503번째 편지엔 세르디스와 데이트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편지를 보고 그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아네트를 잡지 않았던 이유도 알겠네.”

“비 전하께서 행복하길 바라셨던 게 아닙니까?”

“아니. 제일 안전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내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졌거든.”

전쟁을 돌며 세력을 구축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안전하길 바라서가 아니라 제 옆에 있는 아네트가 안전하길 바라서였다.

편지 안에 담긴 아네트는 항상 불안정해 보였으니까. 마치 죽음을 직전에 둔 사람처럼. 그렇기에 그는 아네트 옆에 있는 사람만큼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세르디스 자체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가 가진 배경만큼은 아네트를 안전하게 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네트를 보내주려고 했다.


‘물론, 다음 편지에 갑자기 계약 결혼 상대를 찾는다는 걸 보고 곧바로 후회했지만.’

세르디스가 아네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그녀는 세르디스를 버렸고 자신을 선택했다.


“아네트는 이미 나를 선택했지.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위치에 있는 나를.”

헤르티안은 그때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졌다. 그간 아네트의 정체 모를 병을 캐낸다고 현재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금 자신은 어떤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는커녕, 허무하게 편지까지 잃었다. 소극적인 태도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주인님……”

오센의 기대 어린 목소리 끝에 마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티안은 검집에서 검을 뽑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이제 카시안은 없다.”

카시안뿐만 아니라 황족들을 피해 숨어 지내는 자신은 이제 없다. 그는 처음으로 껍데기 하나를 던져 버렸다.

***

치렁치렁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초록 이끼로 뒤덮인 궁전에 다다르자, 하벨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속으로 정체 모를 벌레 한 마리가 날쌔게 날아들어 목을 쑤셨다.


“퉤, 퉤!”

벌레를 뱉으려 목을 움켜쥔 채 기침하는 하벨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여기서 머무르신다는 겁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네. 이 궁전 꼭대기 층에 침대가 하나 있길래 거기서 잠을 청했죠. 수도가 따뜻해서 잠은 잘 오더라고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주었다.


“시, 시종들은요?”

“시녀 하나가 있었는데 아침에 독초 탄 물을 가져오길래 내쫓았어요. 피부가 뒤집히느니 차라리 혼자 단장을 하고 나오는 편이 낫잖아요. 안 그래요?”

어린애 같은 하벨에게 말이 편하게 나왔다.


“독초? 미친 것들 아닙니까! 감히 대공비 전하께 독초를 건네다니! 당장 잡아다가 사지를 찢어 놔야 합니다.”

“시킨 사람은 따로 있는걸요. 시녀 하나 잡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그리고 그런 간계에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도 않고요.”

내 말에 하벨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돌아보자 급히 시선을 거두었지만.


“대공비 전하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인하시군요.”

“한 번 죽어보니까 이 정도 일은 아무렇지 않달까요.”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던 이력도 있고, 살려고 발버둥도 쳐보고 나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독초를 통째로 삼켜도 죽지 않는 걸.

다만, 괘씸할 뿐이었다. 헤르티안에게는 큰 상처가 될 테니까.


“한 번 죽다뇨? 언제 또 이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하벨이 큰 소리를 내다가 웽웽거리는 벌레를 보고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보면 볼수록 반응이 큰 사람이었다. 기사단장의 위엄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지나간 건 그렇다고 쳐도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있지 않겠어요?”

“왜, 대공비 전하께서 계속 고초를 겪으셔야 하는지…… 제가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뇨. 폐하까지 곤경에 빠트릴 순 없죠.”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번엔 하벨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뚜렷한 방법이 없다면 저희 티아모가 나설 겁니다.”

“티아모가 뭐지요?”

“그건…… 저희를 필요로 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가슴팍에 있는 베지를 움켜쥐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하벨 님은 저보다 비올렛 공녀님을 더 신경 써주세요. 그분은 저보다 더 고독하고 외로운 분이니까요.”

지금 나를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세르디스는 굴렁쇠 확정이고.

당신이 조금이라도 덜 구르려면 지금이라도 비올렛에게 잘해야지.


“그 아이는 딱히 저나 형님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괜찮습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나는 무신경한 그를 타박했다.


“진심입니다. 매일 방에 틀어박혀서 뭘 그렇게 하는지. 식사 시간에 맞춰 들어가도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불편해서 못 드시는 걸 수도 있죠. 먼저 함께 먹자고 하면 공녀님은 나오실 거예요.”

“흠, 알겠습니다.”

“약속하세요. 다음에 절 만나기 전까지 공녀님께 함께 식사하자고 말하기.”

“내키지 않지만 해보겠습니다. 자, 약속하시지요.”

하벨이 수줍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손을 걸라는 거야?’

남들이 보면 웃을지도 모르는 모습에 웃음이 비집고 터져 나왔다.


“기사도 약속은 손가락 걸고 하나 보군요.”

“어, 얼른 걸어 주십시오!”

정말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걸려던 참이었다.


“대공비 전하.”

언제 왔는지 모를 황궁 시종이 나를 불렀다. 미처 손가락은 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대공비 전하 앞으로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황금색 실링이 찍힌 초대장.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황후가 직접 나를 불렀구나.’

나는 초대장을 열어 보지 않고 대답했다.


“참여하겠다고 알리세요.”

“예. 대공비 전하.”

얼마나 대단한 파티를 준비해두었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

툭. 툭.

늦은 밤.

궁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곧장 커튼을 걷었다.

그 아래에는 엘레노어가 서 있었다.

침실까지 들어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 그녀는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황급히 읽던 책을 내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엘레노어!”

“대공비 전하. 늦은 밤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고생해주셨는데 죄송하다뇨.”

혹여나 엘레노어가 다쳤을까 몸을 살핀 끝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어두웠다. 불안하리만큼.


“간밤에 거대한 짐마차가 황궁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짐마차요? 설마 헤르티안이 그 안에 타서 어딘가로 보내졌다는 거예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건 헤르티안이 납치되었다는 거잖아.


“그 마차가 어디로 갔는데요?”

“그게…… 사냥터입니다.”

엘레노어가 들고 있던 물건을 건넸다.

하얀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는 동그란 약이었다.


“이거 대공비 전하께서 헤르티안에게 챙겨주셨던 거 맞죠? 일전에 북부에 갔을 때 헤르티안에게 주시던 걸 봤습니다.”

“맞아요. 제가 준 거.”

부정맥 약이다.

헤르티안이 약초 달인 물을 마시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 약초를 다져 만든 환.


“근데 그게 왜 사냥터에…….”

순간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사냥터에 헤르티안을 던져두었다는 건.


“죽였다는 거예요? 살점을 잘라내서 마물의 먹이로 던지는 그런…….”

나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어쩐지 세르디스가 참전 명령을 쉽게 거둔 게 이상했어!’

어차피 죽이려고 했던 거니까.

헤르티안을 갈가리 찢어서 살인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짐승의 먹이로 던진 게 틀림없었다. 오센과 기사들은 헤르티안과 함께 산 채로 묻어버렸을 테고. 잔인한 사람들.

손이 덜덜 떨리고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죽일 수가 있어.


“당장 헤르티안의 해골을 찾아서…….”

“그게, 죽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보던 엘레노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하루가 꼬박 지났어요. 죽은 게 아니라면 왜 오지 않는 건데요?”

헤르티안은 강인한 전사다.

어린 나이에 전장을 누비고도 살아남은 전사.

그런 그가 고작 사냥감 몇 마리에 쩔쩔맬 리가 없지 않은가.


“마차 바퀴 자국은 사냥터 입구에서 끊겨있었습니다. 사냥 시즌이라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떡 하니 사람을 죽여 놨을 리는 없습니다. 다만 사냥터 어딘가에 헤르티안을 숨겨둔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수도는 따스한 봄이 오면 사냥제를 열곤 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헤르티안을 숨겨두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지하 감옥도 서쪽 탑은 헤르티안이 손쉽게 나올 수 있을 테니까.

헤르티안의 발을 잠시 묶어둘 수 있는 곳. 그리고 여차하면 헤르티안이 죽을 수도 있는 곳.


‘그런 곳이 딱 한군데 있긴 해.’

“저 대공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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