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타버린 편지
(51/79)
51화 타버린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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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타버린 편지
2023.05.27.
샤르페넌 하벨.
그는 비올렛의 둘째 오빠다.
소설 속에서 비올렛에게 틱틱거리며 툭 하면 발을 걸고 장난을 치며 괴롭히다가, 나중에는 눈물 콧물 쏟으며 후회하는 인물.
소설 속에서도 단연 메인 캐릭터였다.
그런 그가 나를 알고 있다면 그건 분명 좋은 징조가 아니다.
나는 끝까지 남주의 전여친이라는 타이틀로 욕을 먹다 죽는 캐릭터고. 하벨은 끝내 후회하며 갱생하는 역할이니까.
비올렛이 나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주변인은 모를 일이었다.
‘이미 후회하는 중이라면 나를 싫어할 수도 있어.’
가십의 중심인 세르디스. 그가 누구에게 관심 있는지 정도는 지나가던 영애를 붙잡고 물어도 알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라는 건 그가 나와 대화하는 것만 보아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비올렛의 오랜 짝사랑을 곁에서 지켜본 가족이라면 내가 밉게 보일 만도 하지.
그럼 더 조심해야 한다. 그가 내게 적대를 갖지 않도록. 혹여 나 때문에 엘레노어의 앞을 막지 않도록.
“괜찮으시다면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최대한 얼굴에 힘을 푼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랑 둘이 이야기를요?”
그러고는 하벨의 표정을 천천히 살폈다. 나를 적대하는 것 같진 않았다.
“네. 괜찮으시다면요.”
“물론 좋습니다!”
오히려 긴장한 눈치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어디로 갈까요?”
“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돌연 하벨이 뒤를 돌더니 갑자기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엘레노어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면 자주 있는 일은 아닌 듯했다.
“엘레노어. 단장님이 화나신 건 아니겠죠?”
내가 엘레노어에게 은근슬쩍 붙어 물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잘 보이고 싶어서 저러시는 듯합니다.”
“잘 보여요? 누구한테요?”
“그야 당연히…….”
엘레노어가 대답하려던 차에 하벨이 뒤를 돌았다. 그 바람에 미처 대답은 듣지 못했다.
‘설마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는 아니겠지.’
원작에서 하벨이 아네트에게 관심 있다는 설정은 없었다. 싫어했으면 싫어했겠지.
“나에 대해 이상한 소리 한 건 아니지?”
하벨이 그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열심히 단장 중인 단장님을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야, 내가 언제 단장했다고.”
“야라니요. 비 전하도 계시는데 말투가 거치십니다.”
그녀의 말에 하벨이 아차 싶은 얼굴로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한 발짝 다가왔다.
“자리가 누추하지만 모시겠습니다.”
예상 외로 호의가 넘치는 태도였다.
“엘레노어. 그럼 이따가 봐요.”
나는 알겠다고 답한 뒤 엘레노어를 보고 눈짓했다. 곧 알아차린 건지 엘레노어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야기 오래 나누십시오.”
하벨을 오래 잡아 두어야겠다. 엘레노어가 일을 알아보러 다녀올 수 있게.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제2 기사단의 막사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막사 안을 둘러보고 있자니, 하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하. 찻잔이 없는데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네? 하벨 님이 직접 가시겠다고요?”
내가 놀라 묻자, 하벨이 입을 ‘아.’ 벌렸다.
“애들 시킬까요?”
“시녀나 시종에게…….”
“아, 그런 방법이 있었죠.”
하벨이 민망한지 내 눈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돌연 정적이 흘렀다.
‘엘레노어가 갔겠다.’
나는 그가 밖에 나갔다가 엘레노어가 사라진 걸 발견할까 봐 급히 그를 말렸다.
“차는 필요 없어요. 잠시 앉아서 이야기만 나눠요.”
“하지만…… 대공비 전하께서는 다양한 약차를 즐겨 드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특별히 이날을 위해서 준비했던 약차가 있어 아쉬워서.”
이날을 위해 준비했다는 건.
“제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세요?”
“아, 그건 아니고요. 그저 기다리고 있었달까.”
하벨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나를 기다려?’
비올렛의 연적이나 다름없는 날 패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이 뿌득 소리를 내며 쥐어졌다.
히익.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숨이 가빠 보였다. 마치 이날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저기…… 단장님. 저 결혼한 거 알고 계시죠?”
나는 세르디스에겐 관심도 없다.
비올렛의 연적이 아니다!
“당연히 알고 있……죠.”
근데 왜 턱에 근육이 씹히는 걸까.
아까와 달리 얼굴에 불쾌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 비올렛 공녀님과 사이 좋아요. 이를테면 같은 편이랄까?”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무해한 존재라는 걸 알렸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말해달라고도 안 했는데 집사가 알아서 떠들어 대거든요. 비올렛이 뭘 하고 누굴 만났는지.”
“그럼 잘 아시겠네요. 제가 공녀님과 아무런 억하심정도 없다는걸. 그리고 세르디스 전하랑도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요.”
허겁지겁 설명을 덧붙이자, 하벨이 드디어 눈동자의 방황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3초가 지나기도 전에 피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관련해서 영애…… 아니, 대공비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하벨이 질문했다.
“네. 뭐든지요. 말만 하세요. 모두 답해 드릴게요.”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기다렸다. 하벨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부담 갖지 말고 물어보세요. 어떤 오해든 받고 싶지 않거든요.”
“왜…… 황자 전하와 약혼하지 않으셨는지…….”
그의 물음에 내 입이 저절로 열렸다.
“아까 말했다시피 저는 세르디스 전하께 아무런 감정이 없었으니까요!”
감정은커녕 제대로 교제한 적도 없다.
왜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는 안다.
상류층 관심사의 정점에 있는 세르디스이기에,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는 귀족들의 최대 관심사니까.
“저는 한순간도 그분과 미래를 꿈꾼 적 없어요. 그리고 저는 이미 대공님과 결혼했는걸요. 제겐 대공님뿐입니다.”
“그것도 궁금했습니다. 세르디스 전하가 아닌 블란디체 대공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멋있잖아요.”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멋지다는 말이죠?”
“일단 저는 흑발을 좋아해요. 무엇보다 적을 상대로 지지 않는 기사인 데다가 강인한 몸과 달리 인형 같은 얼굴. 더 말이 필요한가요?”
“아, 그런 이유에서군요.”
하벨은 내 말을 진지하게 곱씹더니 슬쩍 검을 꺼내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근데 비 전하.”
“네.”
“그 이유에 저도 들어맞지 않는지.”
그가 씨익 웃었다.
‘뭐가 들어맞는다는 거지?’
내 이상형이 하벨과 부합하는 게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 멋쩍게 웃었다.
“그나저나 엘레노어를 벌하지는 말아주세요. 사실 말씀드리지 못한 사정이 있는데 지금은 직접 해결할 길이 없어서 엘레노어에게 부탁한 거예요.”
“벌하다뇨? 대공비 전하를 돕겠다는데 칭찬을 해도 모자라죠.”
“아까는 벌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비 전하인 줄 모르고 한 말입니다.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돕겠습니다.”
생각보다 흔쾌한 대답에 당황한 건 나였다.
나를 패고 싶던 게 아니었나.
“저에 대한 의문은 풀리신 거죠?”
하벨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허무하긴 해도 어쩔 수 있나요.”
도대체 뭐가 허무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하벨의 이미지와 달라서 허무한 건 나다.
비올렛에게 틱틱거려도 은근히 챙겨주는 오빠 이미지라서 좋아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이건.
‘사춘기 소년 같기도 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 같아 보였다.
도와준다고 하니까 이제 그만 얘기해도 되겠지?
나는 슬그머니 막사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하벨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대공비 전하. 북부로는 언제 떠나십니까?”
헤르티안만 있다면 당장 출발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헤르티안이 없어서 문제지.
“아마 조금 더 머무른 다음에 갈 것 같아요.”
하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럼 북부로 가기 전에 한 번 더 볼 기회가 있나요?”
엘레노어가 아니라면 올 생각은 없는데, 왠지 아니라고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럴게요.”
“그땐 준비한 약차를 대접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약차인지 궁금해지네요. 전 이만 궁전으로 돌아갈게요.”
“네. 즐거웠습니다.”
드디어 막사를 벗어났다. 엘레노어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출발한 모양이었다. 하벨은 내 거절에도 한사코 나를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마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봅니다. 제가 함께 기다려 드려야겠네요.”
“마차는 오지 않을 거예요.”
내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차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가십니까? 아까 궁전은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하셨잖아요.”
“걸어서 가야겠죠?”
“그게 무슨…….”
하벨은 말하면서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모양이다.
헤르티안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황궁 내에서 어떤 입지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의 짝인 나 역시도 같은 취급을 받는 게 당연했다.
‘나야 어떤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지만.’
그때, 하벨이 불쑥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 걷는 것도 꽤 풍류가 있죠. 저도 아까 점심을 배불리 먹어서 속이 안 좋았는데 소화도 시킬 겸 함께 걸으시죠.”
“꽤 먼데 괜찮으시겠어요?”
“멀어봤자 황궁 안인데요, 뭘.”
“그렇다면야…… 궁이 조금 엉망이라도 놀라지 마세요.”
하벨은 신이 나서 나를 뒤쫓아 왔다.
***
헤르티안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하지만 뜬 것인지, 감은 건지 모르게 앞이 캄캄했다.
‘분명 활이 날라왔고 그 끝에 아네트가 보였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으며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상황을 떠올렸다.
오센 앞으로 활이 하나 날아들었고, 누가 습격을 했는지 추격하던 와중에 아네트를 보았다.
상아색 머리카락이 축 늘어진 채로 누군가의 등에 업혀 가는 모습을.
본능적으로 함정임을 알았다. 하지만 진짜 아네트라면? 자신을 옥죄기 위해 아네트를 인질로 삼은 거라면?
그 생각이 들자 몸은 저절로 움직였다. 조금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센과 추격을 하다가 황궁의 숲으로 들어왔고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보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갇혀 있었다.
“오센, 거기 있지?”
헤르티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가까운 곳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보이십니까? 저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앞이 보이지 않아 숨을 죽인 채 상황 파악 중이던 오센이 헤르티안의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너랑 나랑 전투가 몇 번인데 서로 기척도 못 알아봐.”
“저는 보통 사람입니다. 주인님과는 다르게 목숨을 걸고 싸워서 버틴 거라고요!”
“목청이 그대로인 걸 보니까 멀쩡한가 보네.”
헤르티안의 말에 오센이 민망한 듯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한 번 돌아보겠습니다. 밖으로 나갈 만한 문이 있는지.”
오센은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헤르티안이 어디 있는지 파악한 뒤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그러나 세 발자국을 밟기도 전이었다.
동굴 안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쓰러져 있던 나머지 블란디체 기사들의 모습이 훤히 보일 만큼.
“불, 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끝엔 거센 불꽃이 피어올랐다. 무수히 많은 종이 더미들을 장작 삼아 피어오르는 불꽃이.
두 사람이 종이 더미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건…… 주인님의 편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