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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여주의 오빠 (50/79)


50화 여주의 오빠
2023.05.24.


눈을 끔뻑거리며 세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참전을 거둬 달라고 말한 거야?’

황제도 예상 못 했는지 나와 같은 눈빛으로 세르디스를 보았다.


“왜들 그렇게 보시죠? 제가 아우를 돕겠다는 게 이상해 보입니까?”

응. 무척.

그도 그럴 것이. 아우라는 말도 어색했다. 가족애는커녕 남보다 못한 사이인 걸 뻔히 아는데 도움을 준다는 걸 누가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심이세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 나갔다.

당연히 그가 날 도울 리는 없었으니까.

근데 뒷감당까지 하겠다니?


“사내가 한 번 뱉은 말은 지켜야지.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나 그렇게 속 좁은 놈은 아니야.”

“제가 언제 속이 좁다고…….”

쓰레기 남주라고 욕한 적은 있어도, 좁다고는 한 적 없었다. 조금 찔려하는 나를 보며 세르디스는 황제를 향해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어머니만 설득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그건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참전 명령을 거두시죠.”

황제는 그런 아들을 의심하는 듯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황제에게도 고민이었던 일을 하나 덜어준 셈이니까.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거든 네가 대신 참전할 줄 알 거라.”

“약속하겠습니다.”

나는 난데없이 펼쳐진 상황에 눈만 끔뻑거렸다.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잖아.’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이 될 줄은 몰랐는데, 황궁까지 온 목적이 단번에 이뤄졌다. 그것도 세르디스의 말 한마디로.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세르디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옆에 서 있던 미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새로 보좌관을 들였다더니, 둘이 꾸민 일일 수도 있겠어.


‘이걸 빌미 삼아서 뭔가를 요구한다든가. 그런 거.’

간단히 해결해 준 건 고맙다만, 의심은 어쩔 수 없었다.

세르디스에게 당한 게 한두 번인가.


“생각해보니 제가 전하께도 몹쓸 부탁을 한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분명 화를 면치 못하겠죠. 그러니 이 일은 저와 대공님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 그를 막으며 말했다.


“아네트. 기껏 도와주는데 거절하지 마.”

“도움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죠. 전하는 계산이 빠른 분이시잖아요. 이번 일로 저희가 전하께 드릴 수 있는 건 없어요. 보다시피 영지의 재산이 풍족한 편도 아닙니다.”

“내가 뭘 바라고 돕는다고 생각한 거야?”

“그럼 순수한 의도로 도와주시는 건가요?”

내가 은근하게 묻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황제 폐하 앞에서 맹세하실 수 있나요?”

일부러 황제를 들먹였다.

믿음직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받아두는 편이 안전했다.


“물론이지. 황제 폐하 앞에서 맹세할게.”

“그렇게까지 도와주신다면야…….”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만, 이렇게까지 하는 세르디스를 거절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쥐꼬리만큼도 고맙진 않았지만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덕분에 일이 간단히 해결된 건 사실이니까.

세르디스가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정말 단순한 호의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헤르티안이 있었으면 함께 상의라도 해봤을 텐데, 그는 알현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궁전도 여전히 비어 있었다.

다만, 침대 위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익숙한 글씨에 익숙한 실링이 찍힌 편지지.

그건 헤르티안의 편지가 아니었다.


“카시안.”

편지지 한쪽에 적힌 K라는 글자는 분명 카시안의 것이다.

나는 그대로 궁전 복도로 뛰쳐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도 없었다.


“근데 이게 왜 황궁으로 온 거지?”

카시안에게 헤르티안과 결혼했다는 말은 했지만, 지금 황궁에 와 있다는 이야기는 한 적 없었다.

그 전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연락이 끊겼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지금 카시안의 편지가 온 거지?


‘설마 황궁에 있다거나…….’

괜한 상상은 이쯤하고 카시안의 편지를 열었다.

[내일 저녁에 만나자. 너는 그대로 있어. 내가 갈 테니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보낸 편지라고?”

명백히 알고 있는 듯한 내용이었다.

카시안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지금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는 곳에.


“지금은 헤르티안을 찾는 게 급선무인데.”

카시안에게 답장이 온 건 기쁜 일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만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카시안에게 편지를 보내줄 사람이 없었다.

혼자 백작가에 갈 수도 없었다.

편지를 넣어두고 짐 속에 넣어둘 무렵이었다.

끼익하고 문이 열렸다. 아까 보았던 시녀였다.


“비, 비 전하.”

그녀는 아침과 다르게 한쪽 뺨이 부어 있었다.

그새 황후에게 내가 황제를 만났다는 게 보고가 된 모양이었다.


‘일부러 손찌검해서 보내기라도 한 건가.’

나는 미리 으깨두었던 약초를 도톰하게 올린 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뺨에 대고 있어. 하룻밤이면 가라앉을 거야.”

“왜, 왜 이걸.”

시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약초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제 와 잘 지내보자고 준 건 아니었다. 다만 계속 보고 있으면 나 때문에 맞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지니까.


“거절할 거니?”

“아, 아뇨. 그저 궁금해서요. 제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지.”

“그럼 대답 하나 하고 받아. 죄책감 들지 않게.”

내 질문이 두려운지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계속 겁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 시녀에게만큼은 이런 이미지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얻어내야 할 정보가 있었으므로.


“내겐 독초 섞인 세숫물을 주었고, 대공님껜 무얼 드리려고 했니?”

결국 엘레노어를 찾아가지 못했다.

굳이 이 버려진 궁전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세르디스를 막지 못한 탓이다.

그는 궁전의 상태를 보고 내게 다른 궁으로 거처를 옮기겠느냐고 물었다.

의도가 훤히 보이는 말에 나는 마차에 내려 헐레벌떡 궁전으로 들어왔다. 혹시나 헤르티안이 돌아왔을까 했던 기대는 단번에 무너졌다. 어디에도 헤르티안이나 블란디체의 기사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나는 기회를 보고 나가려다가, 시녀를 보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지금 엘레노어에게 가서 일을 알린다고 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라면.


“대공님을 비롯해 기사단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물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녀가 선뜻 입을 열지 못해 내가 다시 한번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녀가 제대로 답하도록.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황후 폐하께서 제게 시키신 일은 그저 대공비 전하의 세숫물에 받은 약초를 우리는 것뿐이었어요. 정말이에요.”

“네게 시킨 일이 그것뿐이란 건 믿어줄게. 그런데 나는 믿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못 믿을 수도 있겠어.”

“네? 그, 그게 무슨 소리세요.”

나는 모든 걸 안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공님께서 독초를 마시고 쓰러지셨어. 내게 독초 물을 건넨 네가 가장 의심받지 않겠어?”

지어낸 말이었다.

어차피 이 궁전에 나와 시녀 둘뿐이다.

황후에게 손찌검을 당할 만큼 그녀의 신뢰는 떨어졌다. 그런 그녀가 헤르티안의 신변에 관한 정보를 들고 왔을 리 없었다.

한 마디로 내가 뱉은 말이 그녀에겐 사실처럼 들리게 된다.

효과가 꽤 있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시녀가 티가 나도록 파들파들 떨었다.


“도, 독초물을 마셨다뇨. 그럴 리 없어요.”

나는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살포시 그녀의 볼에 약초를 대주었다.


“나도 널 의심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몸에 독이 퍼진 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독초물을 마신 게 아니라 독을 바른 검에 맞으신 거예요!”

“검에 맞으셨다고?”

시녀는 자신이 말하고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막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떼어낸 뒤 물었다. 표정 관리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무너지니 속내가 투명하게 비쳤다.


“황후께서 대공님을 죽이려고 하셨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습격을, 습격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자세히 말해봐. 습격이라니.”

“정말 저는 여기까지밖에 몰라요. 며칠 전부터 밤마다 기사들이 자주 황후 폐하 궁을 오갔어요. 언제 어디서인지도 몰라요. 정말이에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황후가 헤르티안을 습격했다니.

헤르티안은 계속 황궁 안에 있었다. 그런데 그와 기사 전부를 습격한 거라면 분명 큰 소란이 있었을 것이다. 근데 황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했고, 소란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거야.”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무섭게 응시했다. 두려움에 아무 말이나 뱉은 것 같진 않았다.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말을 하겠어요! 대공님이 독에 중독되셨다면 정말 그것 때문이지 저는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비 전하.”

“알겠으니까 나가 봐.”

그녀는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도 나도 그녀를 따라 궁전을 빠져나갔다.

***

엘레노어를 만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휑한 궁전을 드나드는 이는 시녀 하나뿐이었고, 감시를 붙일 이유도 없었다.

헤르티안이 사라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으니까.

머지 않아 스스로 헤르티안의 부재를 밝힐 거라고 생각했겠지.


“습격이라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근데 헤르티안이 쉽게 당할 리는 없을 텐데. 전쟁에서도 활 하나 맞은 적 없었습니다. 이렇게 쉽게 당할 리는…….”

엘레노어는 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처럼 ‘왜, 어디서, 어떻게’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드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헤르티안을 찾는 게 우선이에요. 정황은 제가 계속 알아볼게요.”

“비 전하 말씀이 맞습니다. 일단 제가 헤르티안의 행적을 알아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사례는 충분히 할게요.”

“사례는 말아주십시오. 저도 친우가 황궁에서 또 도망쳤다는 꼬리표를 달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왜 헤르티안이 엘레노어를 곁에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황족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황실 기사단이라 곤란할 법도 한데, 헤르티안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주니까. 계산적인 나와는 달랐다.


“단장님이 나가시고 나시면 저도 슬쩍 나와서 알아보겠습니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던 찰나였다. 내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천천히 위쪽으로 움직였다. 얼마 안 가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가 나가면 어딜 다녀오겠다고?”

“단장님, 아 그게 아니라.”

“농땡이라도 부릴 작정이었지? 부단장씩이나 되어서. 엘레노어 크레아, 너 제대로 훈련 안 받아봤지? 동이 틀 때까지 굴러보고 싶어?”

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부탁했다. 엘레노어는 나를 도우려고 그런 거니까.


“한 번만 못 들은 척 넘어가 주세요.”

내가 덧붙이자 보라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서서히 시선을 움직였다.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어디서 봤더라?’

단장이라는 남자와 눈이 제대로 마주치고 나서야 누군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느른하게 가라앉았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네트 르앙베리아 영애?”

“저를 아세요?”

오늘따라 날 아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단장님, 왜 그러십니까?”

그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다가 쓱쓱 비볐다.


“정말 영애가 맞아요?”

“이제 영애가 아니라 대공비 전하십니다.”

엘레노어의 말에 그가 씁쓸한 탄식 소리를 내더니 호칭을 정정했다.


“잠시 실례했습니다, 비 전하.”

“아니에요. 그런데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저를 알고 계셨나 봐요. 샤르페넌 하벨 님.”

익숙한 보랏빛 머리카락과 양손에 낀 검은색 장갑을 보고 알아챘다.


‘비올렛의 오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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