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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뒷감당은 제가 할 테니 (49/79)


49화 뒷감당은 제가 할 테니
2023.05.20.


헤르티안이 없다.

황제를 알현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쯤 되니 헤르티안이 단순히 나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의 불쾌함으로 중차대한 계획을 망치지는 않을 사람이니까.

홀로 단장을 마친 나는 궁전을 황급히 궁전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도 궁전 앞마당이 휑했다.

같이 온 블란디체의 기사단도 헤르티안도, 이른 새벽에 도착한다던 오센도 보이지 않았다. 숲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기분과 함께 발등을 타고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헤르티안이 당할 리는 없는데.’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그림자 아래 살았던 그다. 고작 황후의 간계 따위로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대공비 전하. 출발하십니까?”

황제의 궁으로 가기 위해 부른 마차가 도착했다. 알현 시간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헤르티안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수의 기사를 데리고 왔다고는 하나, 이렇게 전부 사라질 줄이야.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도 아무나 붙잡고 헤르티안의 행방을 물어볼 순 없었다. 헤르티안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일파만파 알려지면 황제를 만날 기회마저 사라질 수 있으니.

그때 내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황실 제2 기사 부단장 엘레노어 크레아예요. 전우라고 소개하니까 너무 건조한데 헤르티안이 대공이 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예요. 칼릭스 밑에서 같은 훈련을 받았거든요.’

황궁에 엘레노어가 있었다!

물론 황실 행정관인 아버지를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찾아가서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이번 일에 세르디스와 황후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아버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는 일이다.


‘우선 엘레노어에게 가서 헤르티안을 찾는 일을 부탁해야 해.’

“출발하죠.”

“혼자 가십니까?”

“대공님은 따로 오실 거예요.”

황제가 있는 궁과 황실 기사단이 있는 연무장은 그리 멀지 않다.


‘잠깐 들리는 것 정도는 시간이 될 거야.’

시계를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여기저기 쑤시던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편안해진 몸과 다르게 불쾌한 이 기분.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금발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네트!”

잠시 잊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불쑥 나타나 내 기분을 뒤집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세르디스 전하. 다시 뵙네요.”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보나 마나 우리가 알현한다는 걸 알고 온 거겠지.’

엘레노어에게 가는 건 조금 뒤로 미뤄야겠다. 세르디스가 헤르티안이 없는 걸 꼬투리 잡을지도 모르니까.


“황궁에 왔다는 소식은 들었어. 근데 안 보이더라. 난 또 꼭꼭 숨어 있기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구나.”

세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쳤다.


“제가 왜 숨겠어요. 서로 엇갈린 거겠죠.”

“그래? 그럼 서운해하지 않아도 되겠어. 나는 결혼하고 나서도 나를 멀게 대하는 것 같아서 속상했거든.”

그건 당연한 거지. 전 애인까지는 아니어도 나한테 줄 결혼반지까지 사 놓은 사람인데 내가 편하게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마음이 읽히기라도 한 듯 세르디스가 덧붙였다.


“아네트, 네가 저번에 말했잖아. 우리 이제 가족이라고. 가족은 서로 비밀 없이 거리낌 없이 지내는 거잖아.”

가족 같은 소리를 한다.

헤르티안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를 가족으로 본다?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하지.


“네. 그럴게요.”

곧 그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에 흰 피부. 청량한 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내가 그쪽으로 눈짓하자, 세르디스가 곧바로 소개해주었다.


“아, 이쪽은 미카엘. 발로소네 소후작인데 이번에 임시로 내 보좌를 맡기로 했어. 아네트, 너는 처음 보나?”

나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카엘 발로소네.

원작에서 나온 적 없는 인물이었다. 주인공인 세르디스의 보좌라면, 그것도 임시라면 분명 조금이라도 비중이 있었을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것도 내가 원작을 바꿔서 변한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기에 나는 그만 의심을 거뒀다.


“처음 뵙습니다. 아네트 블란디체입니다.”

내 인사에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무척 반갑습니다. 아네트 님.”

“워낙 실력이 출중하다 소문이 자자해서 데려다 놓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그러고 보니 발로소네 후작가는 대대로 천재 집안이라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어 본 적 있었다. 워낙 폐쇄적인 집안이라 정보도 적었지만.


“저는 아네트 님을 아주 잘 알지요.”

“저를 잘 아신다고요?”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어떻게 아네트 님을 잘 아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무언가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로.


“음. 별로 궁금하진 않아요.”

하지만 내 관심을 끌기는 부족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현실이 빡빡한 관계로.


“왜죠? 보통은 궁금해하던데.”

“그런 사람이 주변에 한둘이 아니라서요. 제가 인기가 좀 많았어서.”

 

 
나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보통은 이러면 금세 시무룩해지더라.

아카데미 다닐 때 저런 애들을 많이 만나봤다.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뒤에서 음침하게 나를 알아보고 다니는 애들.

미카엘이 왜 꺼림칙하나 했더니 저 특유의 음침함 때문이었나 보다.


“그럼 저는 이만.”

미카엘은 시무룩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에게서 신경을 끈 채로 뒤를 돌았다. 처음 본 사람이랑 두런두런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으므로. 이젠 정말 황제를 보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가는 거지?”

세르디스가 물었다.


“네.”

“근데 혼자 뵈러 가는 거야? 그 녀석은 어쩌고?”

그가 은근히 캐물었다.


“헤르티안은 영지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연락을 받고 잠시 나갔어요. 아직까지 일이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에요. 저 혼자라도 폐하를 봬야지요.”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때마침 알현실에서 시종이 나와 안내를 해주었다. 그런데, 세르디스가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라왔다.


“나도 함께 들어가자.”

“전하께서도요? 왜요?”

그는 빙긋 웃으며 살포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혼자인 네게 힘이 되어줘야지. 오늘 폐하를 만나서 헤르티안의 참전을 막아달라 부탁할 거지?”

그가 대놓고 물었다. 마치 내 계획을 모두 아는 것만 같았다.


“네. 그런데 이 말을 하시는 건. 전하께서 합세해서 대공님의 참전을 막아주시기라도 하겠다는 뜻인가요?”

“왜 아니겠어. 그 녀석이야 그렇다 쳐도 네가 곤란해 보이는데 함께 도와야지. 실은…… 이 참전은 어머니와 외가에서 부추긴 거야.”

직접 그의 입으로 들으니 막역한 거부감이 들었다.

알면서도 나를 돕는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상하네요. 저는 전하께서 대공님이 참전하길 바란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라는 걸 넘어서서 참전을 부추긴 사람이라 생각했다. 세르디스에게도 헤르티안은 눈엣가시였을 테니까. 내 말에 세르디스는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너무하다. 아네트. 난 항상 네 걱정뿐이었는데. 그 녀석이 전쟁을 치르면 네가 얼마나 마음 아프겠어? 둘이 사이도 좋은 데다가 신혼인데 당연히 힘들겠지. 나는 그저 네가 고통받는 걸 보기 싫어서 널 돕겠다는 거야.”

“황후 마마께서도 전하가 저를 돕겠다는 걸 알고 계세요?”

“그러게. 아마 아시면 속상해하시지 않을까? 근데 나는 어머니보다 네 편이니까. 나중에 한 소리 듣고 말지 뭐.”

그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나를 보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였다.


‘버려진 궁전부터 시녀까지. 정말 황후 독단으로 벌인 일일까?’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단순히 내게 호감을 사자고 하는 행동은 아니다. 분명 따로 계획이 있다. 그걸 알려면 나도 그를 계속해서 밀어낼 순 없었다.


“같이 가죠.”

그리고 정말 세르디스가 헤르티안의 참전을 막아준다면, 나야 잘된 일이지. 그게 단순히 내게 잘 보이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알현실 문이 열렸다.

계단 끝으로 황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황제의 모습이 조금 야속해 보였다.


‘아무리 황후의 말을 거스르기 힘들었다지만 헤르티안도 자식 아닌가요?’

가장 높은 직위를 갖고도 자식 하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무능한 황제에게 최소한의 예만 갖추었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해 죄책감을 갖거나 미안해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때문에 나도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할 수 있었다.


“예. 황제 폐하. 오랜만이기는 하나 이렇게 일찍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올 줄은 몰랐습니다.”

가시가 있는 말을 내뱉자, 황제가 사뭇 딱딱해진 말투로 물었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다. 안부는 거두절미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보거라.”

바라던 바였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황제를 향해 말했다.


“제가 이전에 황제 폐하와 한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한다.”

“그 약속을 지금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황제가 괴고 있던 턱을 들어 나를 보았다. 세르디스 옆에 서 있던 이가 그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세르디스가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작게 주먹을 흔들었다. 힘을 내라고 응원이라도 해주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보거라.”

곧 황제의 허가가 떨어졌다.


“폐하께 과거 투란에게서 받은 보물 중 하나를 선물로 받고 싶습니다.”

“투란의 보물?”

“네. 아주 오래전에 투란에게서 제국으로 보낸 보물 중 하나입니다.”

나는 계획대로 황제에게 보물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것도 네 능력으로 보았을 때 필요가 있는 물건인가 보구나.”

“네.”

“매번 짐을 올곧게 바라보는 것도 그 능력 때문이겠지. 정말 탐나는 능력이야.”

“그저 잔재주에 불과합니다.”

황제는 시종에게 보물을 찾아 내게 전달하라 명령했다. 그리고 다시 턱을 괴고는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의외구나.”

“제가 소원으로 대공님의 참전을 막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요?”

“다 알고 있구나.”

“그걸 부탁으로 드렸다간 황제 폐하가 곤란해지실 테니까요.”

“이곳에 온 목적이 그게 아니었더냐?”

황제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궁금은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왔지. 그래서 보물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패를 공개할 필요는 없었다. 세르디스가 있었으니까.


“그건 세르디스 전하께서 해결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나는 곧장 세르디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직접 언급할 거라곤 생각 못 했지?’

옆에서 은근히 거드는 척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런 무른 인간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은 이용해 먹어야지.


“세르디스, 네가 말이냐?”

황제가 의심을 가득 품은 채로 세르디스를 불렀다.

안 그래도 헤르티안은 온데간데없고, 세르디스와 나타난 나를 보고 무슨 사정인지 궁금해했을 황제다. 그러니 친히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수밖에.


“세르디스 전하. 아까 하신 약속은 잊지 않으셨지요?”

기대는 없었다.

내가 세르디스를 모를까.

세르디스가 자신을 황좌에 앉히려는 황후의 뜻을 거역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황후는 직접 궁전을 세팅하고 시녀를 보내기도 했다.

이곳에 온 목적을 흐리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은 황후의 노력을 무산시킨다? 아무리 세르디스라도 어려운 일이다. 누구보다 자신의 입지를 중요시하는 그에게는 더더욱.


‘내게 했던 말은 그저 입에 발린 말이지.’

그저 헤르티안이 없는 지금, 내게 달라붙으려고 하는 말.

그가 여기서 발을 뺀대도 상관없었다. 나에겐 차선책이 있으니.

나는 고마움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세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가족이라고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제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은근한 종용이었다.


‘자, 발을 뺄 거면 빨리 빼.’

네가 나가고 나면 본격적으로 황제와 거래할 거니까.

마침내 모두의 시선이 세르디스에게 몰렸다. 그러자 세르디스가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입을 열었다.


“참전 명령을 거둬주시죠. 뒷감당은 제가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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