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시녀 참교육 (48/79)


48화 시녀 참교육
2023.05.17.


이른 아침.

침대 위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헤르티안은 내가 깨어있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나는 그가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그 일이 아직도 불편한가 보네.’

옷장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대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 무언가 선을 세게 넘어도 너무 넘은 기분. 헤르티안이 이런 데엔 예민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제 헤르티안이랑 함께 자는 게 익숙해졌나?’

문득 혼자 자는 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가 없는 이부자리를 손으로 쓱쓱 쓸었다. 온기가 없는 감촉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기를 잠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헤르티안?


“대공비 전하.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황궁 중년의 시녀 하나가 문을 열고 조심히 들어왔다. 나는 헤르티안을 찾는 소리를 내지 않은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중을 드는 하녀가 밖에서 무슨 이야기를 떠들지 모르니까.


“인사드립니다. 머무는 동안 대공비 전하를 모실 황궁 시녀입니다.”

시녀는 세안 물을 내려놓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있는 동안 잘 부탁해.”

“네. 대공비 전하.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는 어디 가셨나요?”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른 새벽에 훈련하신다고 나가셨어. 언제 돌아오실지는 모르니 아침 식사는 따로 준비해 주렴.”

“네.”

“일단 서둘러 준비를 해야겠다. 오전에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 하니까.”

“세수부터 하시지요.”

엉망인 궁전 안에서도 그녀는 능숙하게 나를 안내했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세숫물이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황궁 시녀라 그런지 표정 관리에 노련한 듯했다. 딱히 의심스러운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세숫물 향이 독특하구나.”

세숫물에서 익숙한 약초 향이 난다는 것 빼고.


‘이걸 어디서 맡아봤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확실한 건 이 향은 사람을 해치는 향이라는 것이다. 내가 주로 다루는 건 사람을 치료하는 약초였기에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황족분들이 쓰시는 피부가 좋아지는 약초를 우린 물입니다.”

“그래? 고마워라.”

세숫물에 쓰이는 약초는 제한적이었다.

잭슨에게 선물했던 피부 질환을 치료하는 약초. 피부병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쓰이는 약초라면 손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걸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가져온 희귀 약초까지 먹어 봤었으니까.

아, 아버지 생각을 하니까 기억이 났다.


‘피부에 울혈을 일으키는 독초다.’

이름도 복잡했던 것 같은데 이 특유의 시큼한 냄새는 기억난다. 사람 피부에 닿으면 일주일 동안 빨갛게 부어올라 꽤 고생한다.

그래서 함부로 만지면 안 되고 약초를 다룰 때에는 꼭 무장하고 방수되는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맨손이었던 아버지가 까만 장갑을 끼고 계셨던 게 기억이 났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곧 있을 황제와의 알현을 막고 싶은 누군가가 벌인 수법이다. 그래서 헤르티안의 꼬투리를 잡아 참전 거부를 막으려는 속셈인 게 뻔했다.


‘내겐 세숫물을 주고 헤르티안에겐 식사에 약이라도 쳐놓을 속셈이었나?’

정말 허술한 수법이었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몇 년을 약초 연구만 했는지도 모르고.

나는 노란 빛이 도는 세숫물을 바라보다 모르는 척 시녀에게 물었다.


“약초 이름이 뭔 줄 아니?”

“저는 모르겠습니다. 궁금하시다면 세안이 끝나신 후에 알아 오겠습니다.”

시녀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짜인 답을 했다. 아직 그녀가 알고서 이 물을 가져온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근데 말이야. 내 피부가 예민한 편이라 이 세숫물은 쓰지 못하겠다.”

“그러시면 다른 물로 바꿔오겠습니다.”

“그래. 근데 귀한 약초인데 그냥 버릴 수 없으니 나 대신 네가 써주면 좋겠어.”

어?

처음으로 그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알고 있었구나. 여기에 무슨 약초가 들어가 있는지.’

그렇다면 더욱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얼굴이 푸석한 것 봐. 나는 괜찮으니까 얼른 얼굴을 닦도록 해.”

“아, 아닙니다. 이 귀한 걸 저 같은 시녀가 쓸 수는 없지요.”

“황궁 시녀도 귀족 출신인데 뭐 어때. 자 거절하지 말고 닦아.”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물에 적신 면포를 빼앗아 그녀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코앞에 면포가 다가오자 시녀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선 뒷걸음질쳤다.


“왜? 이걸 얼굴에 바르면 뭐가 안 좋아지기라도 해?”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니겠지.”

면포를 그만 내려두자, 시녀가 티 나게 안도하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나는 대신 테이블에 놓인 머그잔을 들어 세숫물을 가득 퍼 올렸다.


“여기 들어있는 약초 이름이 이제 기억났다. 투구꽃. 보통은…… 독으로 쓰이지 아마?”

내 말에 시녀가 숨을 멈췄다.


“겁먹지 마. 어차피 너는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니까 이 물로 내가 세수를 해도 별다른 벌을 받지는 않잖아.”

“대…… 대공비 전하.”

그렇겠지. 그러니까 알고도 내게 뻔뻔하게 물을 건넸겠지.

헤르티안이 일찍 나가길 다행이다. 이걸 알았다면 그의 가뜩이나 좋지 않은 그의 기분이 더 상했을 테니까.


“이 약초 물을 피부에 바르면 단순히 며칠 앓다가 돌아와. 그런데 이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될까?”

“네? 그걸 마신다고요?”

“온몸에 피가 쏠려서 입에 피가 터져. 그래서 종종 동방 제국에서는 이걸 사형수에게 주기도 했대.”

“대공비 전하…… 왜 그러세요.”

“물은 몸에서 빠르게 흡수돼서 효과가 금방 나타나서 사형수를 단시간에 죽이는 방법이기도 해. 네가 이 궁전을 빠져나가기 전에 말이야.”

나는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침 저기 대공님이 오시네. 적당히 마시면 죽지 않고 며칠 사경을 헤매는 정도일 거야. 세숫물이 목으로 넘어가서 피가 났다고 둘러댈 수 있는데, 너는 어떻게 할래?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고문을 당해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사실 창밖엔 아무도 오고 있지 않았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소한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앞으로 황제를 만나기까지 어떤 장애물이 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더 턱을 빳빳이 들고 그녀에게 겁을 주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대공비 전하. 부디 그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결국 참다못한 시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너에게 기회를 줄게. 이걸 내게 가져오라고 한 배후가 누구니?”

“…….”

 

 
싹싹 빌던 입이 곧장 다물어졌다.


“내가 마셔야 네가 입을 열겠구나. 알겠어. 그럼 답은 곧 올라오실 대공님께 해드려.”

시녀는 내가 이 잔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컵에 입을 가져다 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두 모금째 들이켜던 순간.


“말할게요!”

드디어 입이 열렸다.


“말할게요……. 비 전하께서도 얼른 해독제를.”

나는 입을 쓱쓱 닦았다.


“얼른 대답이나 하렴.”

나야 이런 독초는 수십 번도 더 먹었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망설이는 시녀 앞에서 비틀거리는 척 연기했다. 안색이야 원래 있던 지병으로 허여니 그녀가 보기엔 내가 아파 보이긴 할 것이다.


“그게…….”

답은 뻔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세르디스…….


“황후 마마십니다.”

예상 밖에 있던 인물이 나왔다.


“황후 마마께서 이걸 보내셨다고? 황자 전하가 아니고?”

“네, 네네. 황후 마마께서 아침 세숫물로 보내고 대공비 전하께서 고통을 호소하시면 보고하라고…….”

아니다.

아예 관계없는 인물도 아니었다. 세르디스를 적극 지지해주는 황후. 그리고 두 사람의 목적이 헤르티안이 참전하는 것이라면 독약도 아닌데 그 정도야 하지 못할까.

황후에겐 헤르티안과 결혼한 순간 나조차도 적이다. 그 무자비한 성정이 내게만 자비롭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황후뿐만 아니지. 황궁 안의 모든 사람이 적이지.’

눈앞에 있는 황궁 시녀조차도 말이다.


“너는 돌아가 봐도 좋아.”

금세 얼굴이 환해진 시녀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 마마께는 내가 세숫물 때문에 피부가 뒤집혔다고 말씀드려. 그게 너의 역할이야. 그리고 오후에 다시 나를 찾아오렴.”

“예?”

“얼른 나가지 않으면 나 쓰러질지도 몰라.”

“아, 알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자 시녀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긴장이 풀렸다.


“허. 센 부인 역할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티는 안 냈지만 시녀가 혹시라도 배 째란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손에 진땀이 배었다. 나는 잠옷 드레스에 땀을 쓱쓱 닦고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는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가는 당하는 모양이니까.

나는 세숫물을 보며 우스운 장난을 친 황후를 떠올리다가, 어질러져 있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하나 들어 먼지를 후후 불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관심이 많으시면 초대해드리는 게 도리지.”

이곳으로 초대해준 사람에게 초대장을 만들었다.


“아니, 근데 헤르티안은 언제 오는 거야?”

 

***

몇 시간 전.

이른 새벽 버려진 궁전을 나온 헤르티안은 정말 훈련 중이었다.

새하얀 보름달 빛 아래 촘촘하게 짜인 근육에 흐른 땀이 반짝거렸다.

추운 북부와 달리 수도는 따뜻해서 열이 많은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창피함에 도저히 아네트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아직도 등 뒤에 느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 생각이 날 때마다 그는 검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날개처럼.”

그리고 작게 제국 국가를 불렀다. 그래야 기억이 조금씩 잊히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그 감각이 선명해서 미칠 것 같았다. 옷장에서 나온 이후로는 아네트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온몸이 빳빳해지는 기분이라. 그게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매일 밤 그녀를 품에 안고 자는 것도 각고의 인내가 필요했다. 아침에 훈련장 스무 바퀴를 돌아야 겨우 진정되었는데. 예기치 않게 찾아온 사건은 헤르티안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아네트 말대로 정신 차려야 한다.”

그는 수백 번 되새겼다.

자신의 신체 이상으로 아네트의 계획을 망칠 수 없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허공 가로지르기 1,993회를 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속상하십니까?”

성의 일 때문에 늦게 출발했던 오센이 궁전에 도착했다. 그의 목소리에 헤르티안이 검을 멈추곤 돌아보았다.

오히려 속상해 보이는 쪽은 오센이었다. 그는 곧 울 것 같은 먹먹한 표정으로 헤르티안을 응시했다.


“황후 폐하도 어지간히 주인님이 황궁에 발 딛는 게 싫은가 봅니다. 아직도 이 성에……!”

오센은 말하다가 울컥하여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오센을 보던 헤르티안은 갑자기 진지해져 버린 분위기에 당황도 잠시, 곧바로 해명을 했다.


“그게 아니다.”

“아닌 척하지 마십시오! 저도 황비 마마의 마지막을 함께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만큼은 조금 솔직하셔도 된단 말입니다.”

어느새 안경에 뿌연 김이 서린 오센이 울컥 토로했다. 어릴 적 외톨이었던 헤르티안에게 황궁을 드나들며 친구가 되어준 이가 그였다. 전대 대공인 칼릭스의 부탁이었다곤 하나 오센은 헤르티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 궁전이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센의 이가 으득 갈렸다.


“이 제국을 통치할 자리에 어울리는 건 주인님뿐입니다.”

종종 그의 분노는 위험한 사상으로 바뀌곤 했다.


“오센. 입조심 해. 여긴 대공성이 아니다. 에반처럼 농담으로 내뱉은 말이 창이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른다.”

헤르티안은 곧장 그를 주의시켰다. 경고가 아니라 걱정이었다. 오래전에도 헤르티안에게 그런 말을 했던 한 여인의 끝이 죽음이었기에.

다행히 오센은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런 오센을 보며 헤르티안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다가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오센도 마지못해 표정을 풀었다.


“오센. 하나 물어보자.”

“……말씀하십시오.”

뜬금없는 질문에 오센이 한 박자 늦게 답했다. 헤르티안은 나뭇가지에 걸린 제 셔츠를 입으며 중요한 질문을 건넸다.


“이 수도에서 가장 맛있는 디저트가 있는 파티세리가 어디지?”

“갑자기 말입니까?”

“갑자기가 아니라 늘 아닌가?”

이미 그의 머릿속엔 옛 과거보다 아네트와의 새 추억이 지배적이었다. 오센도 질문의 의도를 알아채고 허탈하게 웃었다.


“누님께서 매번 말하던 디저트 가게가 있습니다. 그쪽으로 안내해 드리죠.”

그리고 한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오센에게 달려든 헤르티안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켁, 갑자기 무슨……!”

하지만 오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코앞으로 화살촉이 날아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