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옷장 속 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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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옷장 속 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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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옷장 속 밀착
2023.05.13.
“계약 부부니까 서로에 대한 속사정은 묻지 않았던 거예요. 헤르티안도 제게 세르디스를 왜 피하는지 묻지 않았듯이요.”
나는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킨 척, 그렇게 변명했다.
그런데, 말하고 나니 뜨끔하면서도 조금 억울했다.
그러는 헤르티안도 내게 질문하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내게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내 음식 취향이라든지. 옷 취향 같은 걸 말이다.
하지만 따질 수는 없었다.
‘보나 마나 어머니나 아버지가 구구절절 말해줬겠지.’
입술을 달싹이다 말고 한숨을 내쉬자, 헤르티안이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 저를 궁금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많이.”
어딘가 애원하는 듯한 말투에 내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물어보면 대답은 해주시려고요?”
그도 나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뱉었다.
“헤르티안이 나온 아카데미가 어디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이래 봬도 나 뒤끝 있는 여자다.
엘레노어와 둘만 아는 비밀을 나도 알고 싶었다.
그가 어떤 아카데미에 다녔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아카데미든 나랑 헤르티안 사이에 접점이 없는 건 확실하니까.
그저 지금 드는 찝찝함을 씻어내고 싶을 뿐이었다.
“어디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묵직한 정적이 흘렀다. 이렇게 나오면 정말 궁금해서 못 참겠는데.
“궁금해달라고 하셨으면서 이렇게 바로 발 빼기예요?”
“정말 그게 궁금하십니까?”
검은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거렸다.
어? 그가 진짜로 곤란해한다. 그럼 더 궁금하잖아.
“네. 알고 싶어요.”
“이제 와 말을 바꿀 수 없으니 말을 해드려야 하는데. 생각보다 긴장되는군요.”
고작 아카데미를 묻는 말에 그가 메마른 입을 축였다.
그 이름을 싫어하는 건지. 그곳에서도 안 좋은 추억이 있는 건지. 직접 입 밖에 꺼내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내가 질문을 무른다면 그것대로 이상한 일.
“제가 맞춰볼까요?”
차라리 내가 직접 말하고 빠르게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저 계약직이지만 대공비라구요.”
사실 마음만 먹으면 못 알아낼 것도 없었다. 대공성 사람들이 어릴 적 헤르티안과 함께 한세월이 얼마인데.
‘뭘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왜 이래?’
그의 검은 동공이 떨렸다. 오랜 시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진득하게 옭아매어서 괜히 말하기가 두려워졌다. 결국, 짧은 정적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자카반 아카데미, 맞죠?”
“…….”
동시에 그가 말을 잃었다. 허무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이게 무슨 숨길 일이라고요. 헤르티안이 어린 나이에 대공 작위를 물려받은 거 알아요. 그래서 제대로 아카데미를 다니지도 못한 거고. 그게 뭐 부끄러워할 일이에요. 아카데미에서보다 더 중요한 인생 경험을 했는데.”
그가 제대로 된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지 못해서 이러는 거다. 그 마음 백번 이해한다. 나도 엉망인 학생이었는 걸?
“저는 아카데미를 8년이나 다녔는데 친구 하나 없어요. 그렇다고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식하게 연구에만 몰두했다니까요. 저보다 헤르티안이 훨씬 낫죠, 안 그래요?”
“누가 부인께 알려주었습니까?”
“……설마 제게 알려줬다고 벌을 주시려는 건 아니죠?”
내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보자 그가 인상을 풀었다.
“아닙니다. 절대.”
“사실 누가 알려준 건 아니고 제가 알아냈죠. 오센이랑 엘레노어랑 두 사람 모두 자카반 아카데미를 다녔던데요? 그럼 당연히 헤르티안도 자카반 아니겠어요?”
정답을 맞힌 나는 유쾌하게 후후 웃었다. 반대로 헤르티안은 실험을 망친 박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르티안? 제가 알게 돼서 달라질 건 없어요. 비밀이면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아. 아닙니다. 뭔가 허무해서.”
“제 추리력이 그렇게 놀라웠나요? 흠. 그럴 만도 하지요.”
살짝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가 되물었다.
“부인의 능력으로는 저와 부인의 미래는 보이지 않는 겁니까?”
“네?”
“그 능력으론 정작 부인의 미래는 보이지 않는 겁니까?”
허를 찌르는 물음이었다.
책 원작에선 변경백과 결혼해 쓸쓸하게 죽어가기만 했다. 헤르티안과 계약 결혼하는 미래 따위는 없었다.
당황스러운 물음에 나는 “그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때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던 이 성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헤르티안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내 어깨를 감싸 쥔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아네트~.”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하고 소름 끼쳤다.
동시에 나와 헤르티안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세르디스예요.”
그가 성에 직접 찾아왔다.
점점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아네트 어디 있어?”
심장이 발걸음 소리에 맞춰 쿵쿵 뛰었다.
“숨을 만한 곳 있어요? 최대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해요.”
그는 방을 휙 둘러보더니 내 손목을 잡았다.
“이쪽으로.”
나는 발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다름 아닌 옷장이었다. 그것도 침대처럼 크기가 일반적이지 않은 크기의 옷장. 숨을 곳은 정말 여기뿐이었다.
“여기 계시면 제가 내쫓고 오겠습니다.”
헤르티안이 옷장 문을 열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미친놈이랑 부딪혀 봤자 좋을 일 없어요. 폐하를 만나기 전까진 누구든 피하는 게 상책이에요.”
가뜩이나 참전 문제로 예민해진 그에게 세르디스라는 기름을 부을 순 없었다. 나는 옷장에 먼저 들어가 그에게 손짓했다.
“둘이 앉기엔 좁습니다.”
“한 번 끼어 앉아 봐야죠.”
그가 곤란한 얼굴을 하다가 가까워지는 세르디스의 발소리를 듣고 옷장 안으로 발을 올렸다.
“아, 이 방밖에 안 남았네?”
세르디스의 목소리가 직전에서 들렸다. 문이 열릴까 봐 그가 시선을 문 쪽으로 돌리던 순간. 나는 그의 팔을 잡아채 잽싸게 옷장 안으로 끌어들였다. 순식간에 그의 거대한 몸이 기울었다.
“어?”
“쉿.”
나는 아직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문 닫아요.”
옷장 문이 닫히자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되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맞은편에 있어야 할 그가 내 앞에 있었다.
더듬더듬 만져보니 그의 판판한 등이 맞았다. 아무래도 방향을 잘 못 잡았나 보다. 마치 말 위에 함께 탄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기도 없다고?”
옷장 밖으로 세르디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그가 들어왔다. 나는 숨소리도 최대한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밖에 남은 방이 없는데?”
또각 또각.
세르디스가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옷장 부근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세르디스를 만나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런 꼴로 발각되는 것도 웃음거리였다.
‘아예 대놓고 도망을 칠 걸 그랬어.’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이미 세르디스와 우리의 숨바꼭질은 시작되었으니까.
“아네트는 여기저기 잘 도망 다니니까 또 어디 숨은 건 아니겠지?”
본능적으로 헤르티안을 잡아 뒤로 눕혔다. 옷장 틈새에 그의 얼굴이 비칠까 봐서였다. 나는 그를 바짝 당긴 채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대로 잠시만.”
그가 움찔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그 입마저 손으로 막아버렸다.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묘하게 숨통을 조여왔다. 그리고 옷장 문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세르디스가 옷장 앞에 서 있었다. 맞닿은 몸에서 서로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나는 어둠 속에 굳어 있는 헤르티안을 슬쩍 보았다. 티는 안 냈지만 그에게도 이 상황이 퍽 긴장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거칠게 열렸다.
“황자 전하.”
방문이 열리고 종종걸음으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아네트는?”
“여기 안 계십니까?”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 목소리였다.
“내가 여기 있었으면 너한테 물어봤겠어?”
“죄, 죄송합니다. 전하.”
“얼른 나가서 알아 봐. 바로 보고해.”
“네!”
시종 덕분에 그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이내 두 사람의 발소리는 함께 멀어졌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참았던 숨을 조금 내쉴 수 있었다.
“부인.”
“잠시만요. 조금만 있다가 나가요.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있어요.”
“그, 그게 아니고 등에…….”
그와 나는 조금의 틈 없이 밀착 상태였다. 아직도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나는 그걸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맥 약을 다시 지어 드릴게요.”
아무리 긴장되어도 그렇지. 심장이 이토록 빠르게 뛰는 건 뭔가 문제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
“약 안 드시겠다고요?”
“아뇨. 그것보다 제 등에 부인…… 아닙니다. 조금 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매일 껴안고 잤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등에 내가 좀 붙은 게 어때서.
그러나 조금 뒤, 나는 헤르티안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뭉개진 드레스 앞부분. 닿아선 안 될 곳이 그와 밀착되어 있었다.
‘내가 미쳤지!’
나는 그를 놓아주고 급하게 옷을 여몄다.
“미, 미안해요.”
그러곤 밖이 조용해졌다며 급하게 옷장 문을 열었다. 창문 밖으로 멀어지는 세르디스의 모습이 보였다.
“다, 다행히 세르디스가 아예 나갔어요.”
민망함에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말이 더듬거리며 나왔다.
“……잘 되었군요.”
“이제 곧 저녁이니 더는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나는 괜히 커튼을 만지작거리다가 휙휙 쳐버렸다. 용기를 내서 뒤를 돌아보니 이번엔 그가 내게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휙 내렸다.
‘느낌도 안 났을 텐데.’
매일 밤을 함께 부둥켜안고 자면서 이건 싫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좋아하는 상대가 아닌 사람이 마구잡이로 몸을 비벼대는데, 불쾌했겠지. 그래도 나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헤르티안은 아직 아닌가 보다.
‘저 작은 침대에 같이 자야 하는데 이렇게 꽁해 있기는 싫은데.’
그와 황궁에 있는 이상 데면데면하게 지낼 순 없었다. 틈을 보여도 세르디스가 달려들어서 우리 둘을 찢으려고 들지 모르니까. 마당에 티 테이블이 있던데 함께 티타임을 가지겠느냐고 물어봐야겠다.
나는 한 발짝 조심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소리에 놀라 움찔거리던 헤르티안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인!”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다시 멈춰 섰다. 그는 나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선 고개만 살짝 돌렸다.
“다가오지 말아 주십시오.”
“헤르티안?”
조금 무서운 목소리였다. 그가 다가오지 말라고 저지시킨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 정말 화났나 봐.’
“혹시 제가 달라붙어서 불쾌했어요?”
“그런 게 아닙니다. 잠시 이대로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부탁합니다.”
최대한 억눌린 목소리로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