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부인은 제가 궁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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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부인은 제가 궁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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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부인은 제가 궁금하십니까?
2023.05.10.
황궁에도 젊은 대공 부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황자궁에 느긋하게 앉아 티를 즐기던 세르디스에게도 시종이 막 그 소식을 전하던 참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에 세르디스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아네트 얼굴을 곧 보겠구나.”
그럴 줄 알고 미리 선물을 사 두었다. 아네트가 좋아하는 세르티아 꽃으로. 이 정보는 아네트와 유일하게 데이트했던 상대인 에드워드 베이른을 털어서 알아냈다.
제대로 대화 한 번 못해본 놈이 얼마나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도 아는지. 조금 섬뜩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깔끔하게 치워두길 잘했다. 아네트를 보며 개처럼 침이나 헥헥대는 꼴은 눈 감고 넘어가기 힘드니까.
“이 꽃이 시들기 전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그는 꽃병에 올려둔 분홍색 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반대편에 꽃과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세르디스는 여전히 꽃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에게 물었다.
“돌아가려고?”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요.”
“아쉽네. 오랜만에 보는 친척 동생한테 선물도 못 사줬는데.”
전혀 아쉬움이 묻어나지 않는 말투에 리리가 “퍽이나.”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제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요.”
그녀는 수도에 도착하고 나서 줄곧 세르디스를 따라 황궁에 머물렀다. 그게 리리가 수도에 온 목적이었다. 이젠 목적을 이뤘으니 헤르티안과 아네트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아스테어 후작가로 가는 거야? 아니면 북부?”
“후작가로요. 생각보다 새언니가 저한테 관심이 많아서 제가 이모님네 가지 않았다는 걸 알면 의심을 할 거거든요.”
“아네트가 세심하긴 하지. 아무튼, 가족끼리 서로 도우니까 좋다. 앞으로도 알찬 소식 기대할게.”
세르디스는 기계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리리는 그동안 수도에 머물면서 아네트가 벌인 일을 모조리 보고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헤르티안 오라버니 편이에요. 세르디스 오라버니를 돕는 게 아니라 헤르티안 오라버니를 위해서 동조한 거고.”
헤르티안 옆에 아네트가 있는 게 극도로 싫어졌기에.
지난번, 세르디스의 제안은 찝찝함이 남아 끝내 거절했었다. 하지만 생일에 아네트와 말다툼을 한 이후, 리리는 줄곧 대공성에서 아네트를 치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딱 아네트가 오기 전으로. 넓은 성에 주인이 되어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하던 시절로.
‘이건 엄연히 헤르티안을 위해서이기도 해.’
그녀는 그렇게 위로하며 짧은 고민을 마치곤 수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곧장 세르디스를 만났다. 세르디스는 친절하게 그녀를 맞이하였고 기꺼이 계획에 대해 알려주었다.
역시나 세르디스는 더러운 수법을 이용하려고 했다.
‘내가 이래서 세르디스 오라버니를 싫어했지.’
겉과 속이 같은 헤르티안과 다르게 세르디스는 속이 새카만 사람이었다. 가족인 리리 앞에서 굳이 속내를 감추지 않았기에 그녀는 일찌감치 세르디스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리리와 세르디스가 원하는 목적지가 같았기에, 그녀는 이번 한 번만 손을 잡기로 했다.
“내가 책임지고 아네트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게.”
“근데 정말 이 방법이 통하는 거 맞아요? 새언니는 뭐랄까. 좀 이상하다고요. 성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대뜸 사업한다더니 몇십억을 벌어들였고요. 쉽게 당할 것 같지 않아요.”
“이번엔 다를 거야. 능력 있는 파트너를 만났거든.”
“그게 누군데요?”
리리가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세르디스가 그녀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시트러스 향수 냄새가 진하게 올라오자 리리가 대놓고 코를 막았다. 그는 그녀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있어. 너도 아주 잘 아는 사람.”
***
수도는 화창했다. 오랜만에 황궁에서 한판 벌이기 좋은 날씨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황실 시종은 우리 마차를 보고 자연스럽게 길을 안내했다. 황제가 사는 본궁에서 한참 지나친 곳. 마침내 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을 지나자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비밀의 탑처럼 이 궁전은 황궁 안에서도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했으나 소홀한 관리로 상아색 외벽에 이끼가 잔뜩 낀 궁전은 저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였다.
‘손님 대접 한 번 신경 많이 썼네.’
극진한 대접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낼 줄은 몰랐다. 나는 작은 궁의 외관을 둘러보다 헤르티안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마차 안에서부터 낯빛이 어둡던 그는 많은 감정을 눌러 담은 눈으로 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버려진 것 같은 이 궁을 배정해 준 데는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헤르티안이 옛날에 살던 궁인가요?”
그의 아픈 과거가 묻어 있는 장소.
‘거기에 헤르티안을 다시 한번 밀어버린 건 아닐까?’
대답은 예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맞습니다. 허접한 가구 몇 개 있는 곳이죠.”
다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헤르티안의 어머니가 살해된 곳이니까.
그걸 알고 이 궁에 그를 초대한 것이다. 그가 오는 걸 반기지 않는다. 이 황궁엔 네 자리는 죽음이 도사리는 이 궁뿐이다, 라는 걸 일깨워 주려고.
‘그래도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관리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 궁은 어릴 적 헤르티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팠다.
“별 볼 일 없기는요. 저희 저택보다 훨씬 크고 넓은 궁인데요. 이런 멋진 성을 관리 못 하는 사람들이 잘못이죠.”
헤르티안의 시선에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리고 농담이 섞인 어조로 덧붙였다.
“저도 이런 말 한 걸 들키면 에반처럼 반역이라고 끌려갈까요?”
“그렇게 놔두지 않죠.”
“됐네요, 그럼.”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정강이까지 자란 잡초도 휙휙 밟고 지나갔다. 마당이 이 정도면 실내는 얼마나 엉망일지 기대가 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여긴 부인이 머물기 불편할 것 같습니다. 수도에 있는 타운 하우스로 모시겠습니다.”
“저 혼자요?”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티안은 여기 남아야 한다. 도망치면 옛날의 악몽처럼 도망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닐 테니까. 하지만 나도 도망자는 싫었다.
“저 이제 헤르티안 없이 못 자요. 갈 거면 같이 가든가 여기서 같이 자든가 해요.”
성에 도착한 부부가 찢어져 밤을 보냈다는 걸 알면 부인에게도 무시당하는 대공이라 손가락질받을 게 뻔했고. 지금은 잠자코 깔아준 판에 얌전히 올라타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성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다 뒤가 허전해 뒤를 돌아보았다. 헤르티안이 자리에 그대로 우뚝 멈춰 선 채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안 들어가요?”
“…….”
요새 헤르티안이 좀 무섭다. 종종 나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 안 하고 저렇게 쳐다보는 일이 늘었다.
‘부정맥 때문에 뇌로 가는 혈액 공급에 이상이 있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가 잘 때 슬쩍 기대 심장 박동 소리를 들어보아도 훈련장 몇 바퀴를 돈 사람처럼 팔딱거렸으니까. 아무래도 황궁에 있는 동안 황실 주치의를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헤르티안?”
나는 손을 머리 위로 붕붕 흔들어 그를 불렀다. 그러자 움찔거리며 눈을 몇 번 깜빡인 헤르티안이 입을 열었다.
“네, 부인.”
‘오늘따라 왜 저렇게 뚝딱거리실까.’
같은 손이랑 같은 발을 흔드는 건 어느 나라 보행법인지 모르겠다. 나는 곧 곁으로 다가온 헤르티안를 잡아끌고 눈을 부릅떴다. 아무래도 헤르티안이 옛날 과거를 떠올리고는 동요하는 모양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여기는 사방이 적이라고요.”
그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황궁엔 그의 어머니를 죽인 황후와 잊고 싶은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니까. 거기다 참전 거부는 정말 반역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늘 우직하던 그가 흔들릴 법도 했다.
“마음 굳건히 드세요.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요.”
나는 그의 단단한 양어깨를 잡고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그가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어린아이처럼 내 소매 끝을 잡고 물었다.
“수도는 춥지 않은데도 저랑 꼭 붙어 주무실 겁니까?”
아닌 척해도 혼자 자기 무서웠구나.
‘이럴 때 보면 애 같다니까.’
나는 오늘따라 인간미 넘치는 계약 남편을 보며 긍정의 의미로 미소를 지었다.
***
궁전 안은 도둑이 다녀간 저택 같았다.
바닥에 고급 도자기가 깨진 조각이 놔뒹굴고 커튼은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뜯겨 있었다.
“아무래도 타운하우스로 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뇨? 오히려 긴장감 있지 않아요? 태어나서 언제 이런 곳에서 잠을 자보겠어요.”
나는 화가 나면서도 조금 즐거웠다. 사람의 밑바닥을 계속 보는 것 같아서.
‘이 정도는 되야 나도 진심으로 부딪히고 싶지 않겠어?’
문을 하나씩 열어 볼 때마다 색다른 쓰레기장이 우리를 반겼다. 그때마다 헤르티안이 주먹을 뿌득 쥐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눈을 빛내며 이곳의 모습을 눈으로 담아두었다.
“여기는…… 응접실이군요.”
“이런 취급은 참을 수 없습니다. 당장 다른 거처를 달라고 하겠습니다.”
“아뇨. 괜히 소란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내일 아침 약속이니까 그때까지만 버텨요.”
여기서 불만의 소리를 낸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계획이 끝날 때까지는 꾹 눌러 참아야 했다.
내게 미안해서인지 헤르티안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방인 침실에 다다랐다. 궁 안에서 가장 큰 방임은 분명하다. 근데 무언가 이상했다.
“침실인 것 같은데…… 침대가 저거 하나인가요?”
성인 둘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작은 침대. 작은 옷장과 뿌연 먼지가 낀 화장대. 카우치는 반 토막이 나 있었고 그나마 앉을 곳이라곤 까만 얼룩이 묻은 테이블 의자였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네요?”
그나마 침대만이 쓸 만해 보였다. 마치 여기서 도망가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도록 최소한의 청소만 해둔 것 같았다.
“여기가 제 방이었습니다.”
헤르티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가 헤르티안의 방이라면 어머니 방은?
지나가면서 본 방 중에 침실로 쓰일 만한 방은 없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헤르티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저와 어머니의 방이었습니다.”
사고가 잠시 멈추었다.
‘이 좁은 침대와 별 볼 일 없는 방에서 두 사람이 함께 지냈다고?’
한낮 백작 영애인 나조차도 이것보다는 큰 침대를 혼자 독차지하며 사치스럽게 살았다. 그런데 황제의 여인과 자식이 이런 방에서 함께 지냈다니.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여기서 지낸 거면 이 성에 사는 사람은 어머님과 헤르티안 둘 뿐이잖아요. 근데 왜…….”
나는 말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이유야 뻔했다.
황후는 헤르티안의 존재 자체를 견제하고 황제는 그와 그의 어머니를 지켜줄 힘이 없으니까. 아무런 힘 없이 일을 벌인 잘못이었다. 그러니 방치된 상황에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겠고. 어쩌면 이 상태는 예전부터 줄곧 지속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결혼하고 나니 부인께 치부만 계속 드러내는 기분입니다.”
그가 방을 한 바퀴 둘러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재빠르게 뒤를 돌았다. 항상 넓어 보였던 그의 어깨가 작게 느껴졌다.
“저한테는 다 보여주셔도 돼요.”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등을 도닥였다.
“저도 못 볼 꼴 다 보였잖아요. 헤르티안 앞에서 코피 흘린 채로 기절하기도 했잖아요. 기억나죠?”
슬쩍 본 그가 옅게 피식거렸다. 드디어 그가 돌아섰다.
“그러니까 저한테는 숨기지 않고 말해도 돼요. 서로 비밀이 없는 게 부부 사이잖아요?”
비록 계약 관계라고 해도 말이지.
“부인은 제 이야기가 궁금하십니까?”
‘당연하죠.’라고 말하려던 입이 다물렸다.
사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헤르티안의 과거사나 앞으로의 일들은 원작을 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질문을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그게 헤르티안이 보기엔 무척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부인은 제 사적인 부분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모두 안다는 듯이 저를 이해해주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