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선 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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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선 넘었습니까?
2023.05.06.
의외의 말에 나는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헤르티안을 바라보았다.
헤르티안도 선을 넘어?
무슨 의미로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야 헤르티안의 일을 돕는 거라고 쳐도 그가 나를 더 도울 일은 없을 텐데. 그러나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얼마든지요?”
“약속한 겁니다.”
사실 선을 넘는다고 해도 헤르티안은 평소의 헤르티안일 것 같았다. 지금도 내게 분에 넘치게 잘해주고 있으니까.
그때였다.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상기된 표정의 두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소식을 전해 들은 오센과 험악한 인상의 기사 하나였다.
“전쟁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다시 참전 소식이 들립니까?”
우다다 말을 쏟아낸 건 오센이었다.
그는 나와 있을 때와 다르게 격정적인 상태였다.
“황실은 썩었습니다. 한번 쿠데타라도 일으키든가 해야지.”
그리고 그를 따라온 기사도 굵은 목소리로 쓴소리를 내뱉었다.
“에반. 그런 생각은 네 머릿속으로만 하라고 했잖아. 조심성 없이 뱉었다가 우리까지 반역자로 만들지 말라고.”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그놈의 입!”
에반이라는 사람은 표정 변화도 없이 오센에게 반말로 대답했다. 허물 없이 대화하던 두 사람은 금세 헤르티안의 눈치를 보고 태도를 바꾸었다.
“마님도 계셨군요.”
“네, 대공님과 함께 의논 중이었어요. 저분은?”
“아, 블란디체 기사단의 부단장 에반입니다.”
오센이 대신 그를 소개해주었다.
부단장이면 헤르티안이 전쟁으로 부재했을 시절. 대신 기사단을 관리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지금 만나다니 나도 꽤 무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에반.”
나는 악수의 의미로 에반에게 손을 뻗었다. 엘레노어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기사들은 인사를 악수로 하는 모양이니까. 그러자 헤르티안이 나서서 내 손을 막았다.
“기사들 손은 지저분하니 인사는 했다고 치시죠.”
조금 실례되는 말 아닌가?
하지만 에반은 하나도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참전 명령은 어떻게 된 겁니까? 황궁에서 정식으로 서한이 온 겁니까?”
오센이 참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그럴 계획이었는데 엘레노어가 중간에 가로채서 직접 전달했다.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와. 아무리 생각해도 뒤통수가 얼얼하다고밖에 안 느껴집니다. 어떻게 황제 폐하께서……!”
그가 울분을 토하다가 나를 쓱 쳐다보고 입을 다물었다. 내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오센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기보다 억압에 의해 강제로 승인했다고밖엔 보이지 않아요. 분명 배후는 따로 있겠죠.”
안경 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대공님의 승전식에서 독살 사건이 있을 때 막아준 것도 저인걸요.”
그러니 내가 모를 리가 있나.
오센도 독살 사건의 정황을 알고 있는지 짧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결혼 후에 첫 참전을 못 하게 막는 거예요. 그래야 다음 참전 때도 쉽게 대공님을 이용하지 못할 테니까.”
“뚜렷한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헤르티안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오센도 묵묵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한 번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온 덕분인지 내가 무슨 방법을 말해도 들어줄 모양이었다.
“제게 좋은 패가 하나 있거든요.”
“패라면……?”
오센의 눈이 번뜩 빛났다.
“황제 폐하께 무슨 일이든 부탁할 수 있는 소원권이 있습니다.”
그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미 황제 폐하께서 허락한 일입니다. 마님의 부탁이라고 해도 한번 승인이 떨어진 이상 쉽게 명을 거두지는 못하실 겁니다.”
“누가 대공님의 참전을 막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겠댔나요. 그런 일회성 요구로는 훗날의 참전을 막기는커녕 불씨만 키울 겁니다.”
“다른 수라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하죠.”
왜 헤르티안이 나와 결혼했겠나.
내가 빙의자라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모두 모여보세요.”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계획한 일을 헤르티안과 그들 앞에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
아네트의 계획은 허무맹랑했다.
정보만 확실하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한 일이라고는 하나,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마님 말씀을 다 믿는 건 아니시죠? 그 예지 능력이라는 게 대단한 건 알겠는데 족족 다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아네트의 계획을 들은 오센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치부했다.
제국의 예언가도 맞추지 못한 내용을 어떻게 마님이 안단 말인가. 독살 사건이나 약초 사업처럼 늘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기는 하나 그래도 단 두 번이었다. 확신이 설 리가 없었다.
“만약 잘못 걸렸다가는 좋은 기회만 날리고 대공님의 참전까지 속전속결로 진행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에반도 오센의 말을 거들었다. 황궁도 전쟁터와 마찬가지. 철저한 전략과 계획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아네트의 말은 질서를 모두 무시한 채 진행되는 기적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보물이니 받아두면 쓸 데가 있겠지.”
아네트가 황제에게 요청한다고 했던 물건은 투란에서 바친 보물 중 하나였다. 그것도 황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오래전에 받은 물건인지라 제대로 보관이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보물이 아니라 고물입니다. 황궁 창고 더미에 박혀서 언제 치워질지 모르는 고물이요.”
“오센. 넌 그 고물이라는 게 있는지 알고 있었나?”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황궁에 고작 두 번 와본 부인도 아는데?”
그 말에 오센이 살짝 놀랐다.
“10년을 산 나도 몰랐던 보물을 부인이 알고 있다는 것 자체로 입증이 된 거 아닌가?”
그 말이 맞았다.
아마 황궁에서 보물을 관리하는 시종들 몇을 제외하고는 그런 돈도 안 될 법한 오래전 하사품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부인의 능력을 확실하게 시험해볼 기회가 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도 단단한 힘이 생기는 거고.”
오센은 그제야 그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이랑 계획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 두겠습니다.”
오센과 에반이 집무실에서 나갔다. 헤르티안은 아네트의 계획이 담긴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글씨체는 여전하구나.”
아네트의 글씨가 고스란히 적힌 종이.
오랜만에 편지를 받은 기분에 미소가 저절로 그려졌다. 세르디스가 중간에 가로챘음을 알았지만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네트에게 자신이 아직도 소중한 존재라면 직접 편지의 행방을 찾으러 돌아다닐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근데 나한테 선을 넘겠다는 건 좋은 징조인가?”
결혼 이후.
아네트가 나서서 자신에게 뭔가를 바랐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삭막하게 굴었지. 바로 어젯밤에는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선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참전 이야기를 듣고 나서 눈빛이 바뀌었다. 엘레노어를 막고 직접 해결하겠다고 나서지 않나, 벽난로에 불씨를 옮겨주질 않나. 아무래도 이전과는 달랐다. 엘레노어의 말대로 자신의 유일한 결함인 출신이 먹혀든 것이다.
‘당연히 안전할 거라 생각한 상대가 전쟁에 나가서 죽을 수도 있으니 불안하겠지.’
아네트는 마음씨가 따뜻하니까.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했다.
헤르티안은 비로소 자신도 아네트의 영역 안에 들어왔다고 확신했다.
제대로 한 발 디뎠다고 생각하자 웃음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갑자기 전쟁에 나가고 싶어지는데.”
***
이틀 뒤.
황궁에서 소식이 도착했다.
“제안이 아닌 명령이라며 참전을 거부하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네요.”
예상대로였다.
황실에서는 헤르티안을 훌륭한 전쟁의 용사라고 띄워주면서도 그걸 빌미 삼아 사지로 밀어 넣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는 것도 기대 안 했어요. 바로 출발하죠.”
나와 헤르티안은 이미 황궁으로 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계획은 황실에 도착해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성의 보수도 막바지에 들어가서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었다.
“마님. 제가 같이 갈게요.”
“아니야. 최대한 빨리 다녀올 거라 호위 규모도 최소한으로 꾸려서 가는걸.”
“잘 다녀오세요.”
“그래. 다른 소식 있으면 돌아와서 알려줘.”
그렇게 나와 헤르티안은 대공성을 떠나 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갈 줄은 몰랐던 황궁으로.
그리고 그리웠던 수도로.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마차 안에서 보내고 나니 시야 끝으로 황궁의 첨예한 지붕이 보였다. 입이 메말랐다. 부모님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세르디스를 봐야만 한다는 불쾌함이 겹쳤다.
결혼만 하면 알아서 멀어질 줄 알았다.
나는 안전하게 대공성에서 세르디스와 비올렛이 이어질 날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르디스는 아니었나 보다. 꼭 원작대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법칙이 있기라도 하듯 아직도 내게 미련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이번에야말로 세르디스 전하와 인연을 끊는 상상이요.”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헤르티안은 생각보다 의연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걱정 안 되세요?”
“든든한 부인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들겠습니까.”
그때 헤르티안이 마부가 있는 쪽 창문을 쿵쿵 두드렸다.
“잠시 마차 좀 세우겠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내가 불안함에 일어나 묻자 그가 마차에서 내려 내게 손을 뻗었다.
“결혼하고 나서 첫 수도행인데 백작과 부인께 드릴 선물을 사 가야죠.”
“이런 상황에서 선물이요?”
내가 놀라 묻자 그가 내 허리를 잡아 들어 마차에서 강제로 내리게 했다.
“어차피 저희 승리로 끝날 테니까. 함께 승전식을 맞을 가족들의 선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헤르티안도 참…….”
나는 그를 보다 긴장감이 풀려, 그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는 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듣고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계획이 성공한다는 걸 확신하는 사람처럼.
그러다 그가 돌연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저 선 넘었습니까?”
“네?”
“저번에 저도 선을 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아.
그때 집무실에서 한 이야기였다. 오센이 들어와 미처 끝맺지 못한 대화를 헤르티안이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잠깐 들르는 거예요.”
“이미 선물 리스트를 뽑아 두었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가 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냈다. 그 안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줄 선물 목록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좋아하는 와인 이름도 있었다.
정말이지 섬세한 남자다.
그가 무성욕자가 아니라면 엘레노어를 왜 꼬시지 못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