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헷갈리게 하고 싶지 않아
(43/79)
43화 헷갈리게 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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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헷갈리게 하고 싶지 않아
2023.04.29.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헤르티안이 엘레노어를 바라보는 눈빛이 사뭇 달랐으니까.
날 보는 눈빛은 속을 알 수 없도록 닫혀 있다면 엘레노어를 바라보는 눈빛엔 그리움과 추억을 곁들인 정이 넘쳤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던 오센에게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 없었다.
리리가 있었다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저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 얼굴이지.’
나는 확신에 가득 찼다.
내가 모태 솔로이긴 해도 남의 연애사는 눈에 훤히 잘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왜 헤르티안과 엘레노어가 이뤄지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은 금방 해결되었다.
“엘레노어 기사님은 결혼하셨죠?”
어느새 다이닝룸에서 와인 세 잔을 비운 엘레노어가 놀란 듯이 눈을 키웠다.
“그게 티가 나나요? 어머. 나 늙었나 봐. 안 그래도 얼굴에 주름이 늘긴 했어.”
“흙에서만 굴러다니니까 얼굴이 상하지.”
그녀가 식기에 얼굴을 비춰보는 걸 보고 헤르티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엘레노어를 짝사랑했지만 이미 그녀는 기혼자였던 것이다.
“비 전하처럼 아름다워지는 비법이 있으면 저 좀 알려주십시오. 안 그래도 남편이 피부에 생기가 없다며 얼마나 잔소리하는지 모릅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세숫물에 넣으면 좋은 약초를 드릴게요.”
“그런 약초도 있었습니까?”
“많죠. 따로 상처나 회복에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해주세요. 얼마든지 챙겨드릴게요.”
“비 전하.”
그녀가 나를 부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헤르티안과 이혼하고 저랑 결혼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헤르티안이 사레에 들렸는지 기침을 토했다.
“남의 인생을 망치려고 온 거면 다시 황궁으로 가라.”
“비 전하께서 이렇게 아름다우신데다가 마음까지 고운 걸 알았다면 남편이고 뭐고 뺏었을 거야.”
둘이 주고받는 농담이 웃겨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과연 엘레노어는 사랑받기 충분한 여자였다. 털털한 성격에 전혀 무언가를 감출 생각 없는 솔직함.
나와는 반대되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귀엽고 소심한 비올렛과도 사뭇 다르달까?
헤르티안이 충분히 좋아할 만한 여자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나도 무장 해제되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미 내 건데?”
그 와중에 헤르티안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도 열연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한숨 쉬었다.
딱 보니 알겠네. 엘레노어 앞에서도 좋아하는 티를 못 냈던 거야.
“결혼하면 사람이 바뀐다더니. 내가 아는 사람 맞아?”
그거 아니에요. 엘레노어 기사님.
속 사정을 알고 나니 헤르티안의 사정이 꽤 고달파 보였다.
안쓰러운 사람.
“두 분은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예요?”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두고 내가 끼어들었다.
“음. 안 세어봐서 모르겠는데 십 년은 넘은 것 같아요.”
“12년.”
“그걸 기억해?”
엘레노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헤르티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찍었다.”
속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너에 관한 건 다 기억하고 있다. 라고 했어야지!
연애하는 척은 잘하지만 진짜 연애에 있어서는 숙맥이었다.
이 소설 속 잘생긴 남자들은 왜 연애를 못하는지. 애석할 뿐이었다.
“하여간 농담은.”
“농담 아닌데. 얼마나 만났는지 관심 없다.”
“네가 관심 있는 게 있긴 해? 맨날 영혼 없는 눈으로 검이나 잡던 놈이.”
“있지. 너는 모르는 거.”
심장이 쫄깃해져 디저트를 떠먹던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엘레노어만 모르는 엘레노어 당신!’
이래서 베티가 로맨스 소설을 허구한 날 보는 거구나.
사실 난 이곳의 배경인 <당신의 처절한 후회를 바라며>를 보고 한동안 로맨스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세르디스가 비올렛에게 쌓은 업보에 비해 구르는 강도가 약했기 때문이다. 되레 여러 피해자를 낳을 만큼 요란하게 구른 탓에 연애 한 번 안 해본 나는 로맨스라면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처음으로 남의 연애를 지켜보는 게 이렇게 흥미로울 줄이야.
나도 모르는 사이 관람자 모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아카데미 다닐 때는 생기가 돌긴 했지.”
엘레노어의 말에 나는 다시 헤르티안을 쳐다보았다.
“대공님이 아카데미에 다니셨어요?”
그런데 그는 내 질문을 듣고 굳어버렸다. 유독 헤르티안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의문을 품을 때쯤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마르카…….”
“다니기는요. 잠시 입학했다가 성에 사정이 생겨서 금방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엘레노어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헤르티안이 말 허리를 끊었다. 그녀가 헤르티안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눈짓이 오고 갔다. 곧 엘레노어가 시선을 내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후 숨 막히는 정적이 다이닝룸을 점령했다.
갑자기 삭막해진 분위기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을 때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헤르티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엘레노어를 눈짓했다. 그러더니 내게 다시 가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부인. 손님을 맞느라 힘드셨을 텐데 쉬고 계십시오.”
나는 고개를 꾸벅 흔들 수밖에 없었다.
왜인지 두 사람 사이에 낄 틈이 없어 보였다.
***
블란디체 대공성의 연무장.
헤르티안은 오랜 시간 연무장을 함께 돌았던 기사들에게 인사시켜줄 겸 그 방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연무장에 도착하기 직전,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네가 짝사랑했던 사람. 비 전하 맞지?”
먼저 입을 연 건 엘레노어였다.
처음 성에 도착해 헤르티안을 보자마자 눈치챘다.
남에게 관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 남자가 부인이라는 낯부끄러운 호칭을 써가면서 자신을 소개해주고, 답지 않은 미소를 지어가며 아네트를 바라보았을 때. 그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몸소 깨달았다.
밤이며 낮이며 적의 조그만 기색을 눈치채야 하는 위치였기에 헤르티안의 변화 또한 눈에 훤히 보였다.
그리고 마르카바 아카데미를 다니고서 몇 년 후. 헤르티안의 눈빛에 조금씩 생기가 떠오르던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검술을 연습하기보단 책상에 앉아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는 미처 헤르티안에게 짝사랑 상대가 생긴 줄 모르고 있었는데, 전쟁터에서 밤새 보던 분홍색 편지를 보고 알게 되었다.
“매일 편지를 주고받던 상대가 비전하였어?”
엘레노어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상대와 결혼이라니. 헤르티안답지 않게 로맨틱하잖아.
“비법이 있었지.”
헤르티안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엘레노어는 그에게 한 걸음 붙어 그 비법이 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헤르티안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곤 손을 들었다.
“아! 정답!”
엘레노어가 뭔가를 깨달은 듯 외쳤다.
“바로 알아봤나 보네.”
역시 눈치 빠른 엘레노어.
손톱을 잘라 봉숭아 물은 모두 사라졌지만 대번에 눈치를 챈 모양이다.
“손등에 핏줄. 그거 여자들이 환장하잖아.”
엘레노어도 확신했다.
하지만 정답이 아니었다. 헤르티안은 쯧쯧 혀를 차며 한심하단 눈빛을 보냈다.
“관리라고는 검 닦는 것밖에 모르는 네가 손톱에 꽃물 들이는 법을 알 리가 없지.”
“손톱에 뭘 들여?”
“봉숭아꽃을 들이고 첫눈 오는 날까지 버티면 첫사랑이 이뤄진다고 한다. 나는 그걸 버텨내서 결혼에 성공했고.”
그 순간 햇볕에 탄 엘레노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가 손톱에 뭘 들여? 사람 피를 잘못 말한 거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헤르티안은 이젠 사라진 봉숭아 물이 들었던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레노어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 몸을 마구 비볐다.
어질어질했다. 사내는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한 번. 가문을 물려받았을 때 한 번. 결혼했을 때 또 한 번의 변화가 있다고 하지만. 헤르티안은 앞에 두 번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마지막에 몰아서 변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런 농담…… 아니 방법은 누가 알려준 거야?”
“오센이.”
엘레노어는 짧게 오센을 원망했다.
그러다 이만 생각을 접었다.
‘옛날처럼 시체인 양 사는 것보다 훨씬 좋아 보이네.’
“대단하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은 사이라 정이 들어서 결혼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바로 청혼서를 보낸 거야?”
엘레노어는 헤르티안이 마르카바 아카데미 출신임을 숨겼을 때부터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미신으로 결혼에 성공했다고 하는 헤르티안을 보고 확신했다.
“하여간 능력자라니까.”
“눈치는 빨라선.”
“이 순간을 즐겨. 나는 결혼한 지 두 해 넘어가니까 서로 정으로 살거든.”
부럽다고 건넨 말에 헤르티안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엘레노어. 물어볼 게 있다.”
“뭔데? 말만 해.”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을 모르겠다.”
엘레노어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결혼했으면 끝이지 마음을 사로잡는 건 왜.
“자세하게 말해줄 순 없지만 부인은 내게 전혀 마음이 없다.”
곧 그녀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자 헤르티안이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결혼 전에도, 후에도 이성으로 보이려고 아네트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노력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남자를 찾으러 간다는 둥 자신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와. 다른 이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가 여자니까 알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곤란에 빠진 친우를 앞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주변이 남자 천지인 기사단이었지만, 그들과 이성적인 교류를 하진 않았으니까.
남편과도 정략결혼이었지, 진실한 사랑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잠시 뒤 엘레노어가 결연을 다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옷을 벗자. 나도 그렇고 칼릭스 밑에서 훈련한 사람들이 몸만큼은 기가 막힌다고 소문났잖아? 비 전하께서도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거야.”
그녀 제 복근을 땅땅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선명하게 갈라진 육 쪽 복근. 필살법이라고 확신했다.
“그것도 이미…….”
하지만 헤르티안은 처량한 눈을 아래로 굴렸다.
“그게 안 통하다니 믿을 수 없네.”
“다른 방법은 없나.”
“질투 작전 같은 건?”
헤르티안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마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헷갈리게는 하고 싶지 않다.”
“해본 말이었어. 나도 기사씩이나 돼서 얄팍한 수법을 쓰는 건 싫었으니까. 근데 너 좀 멋있다? 이런 모습을 봐야 부인께서도 반할 텐데.”
“이런 모습이라 하면…… 내가 더 재수 없는 놈이 되면 되는 건가?”
그는 자신이 잘난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외모도, 직위도 어느 하나 다른 사람에게 꿀려본 적 없었으므로.
“근데 문제가 있다. 내가 부족한 게 별로 없어서 채울 것도 없다.”
엘레노어가 검지 손가락을 양손으로 흔들었다.
“미안하게도 네 부족함을 내가 가지고 온 것 같다.”
어느새 달뜬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헤르티안은 그걸 보고 곧장 눈치챘다.
“어쩐지 곱게 돌아가나 싶었지.”
황궁으로 돌아간 세르디스가 벌인 일이 틀림없었다.
“황궁에서 다시 네게 전쟁에 출전하라는 명을 내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