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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30억 (37/79)


37화 30억
2023.04.08.


오히려 털어두니 속이 시원했다.

그동안 어색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이전처럼 지금 이 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는 제 손으로 내 볼을 쓸었다. 따뜻한 감각에 고개가 그의 손으로 기울었다.


“걱정됩니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두 번이나 기절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은데……. 원래 자주 이래요.”

“지금도 거짓말하면 속상합니다. 건강에 있어서는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그는 주치의처럼 잔소리했다.


“알겠어요.”

그가 다가와 가볍게 포옹했다. 따뜻한 온기가 옷 너머로 느껴졌다.


“몸이 아직도 차갑습니다.”

“헤르티안 몸은 언제나 봄처럼 따뜻해요.”

“여긴 부인이 살기엔 악조건입니다.”

“그래도 나름 적응되었는걸요.”

그래도 추위는 견딜 만해졌다. 세르디스가 신경 쓰이게 굴지 않았더라면 쓰러질 일은 없었을 테고.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와 타국인들을 만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쿠르시아에 돈을 내야 한다면 그 돈은 응당 그쪽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빼앗긴 제국민들의 목숨값을 제국에서 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예지능력을 쓰신 겁니까?”

“……네.”

망설임 섞인 대답이었다.

헤르티안이 보기엔 능력을 편의대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진정으로 성의 정비 때문에 사업을 벌인 겁니까? 따로 필요한 보석이나 드레스가 없으시고요?”

“믿기 어렵겠지만 맞아요. 대공성이 무슨 에어컨이라도 켜둔 것처럼 찬 바람이 쌩쌩 들어오니까요.”

“에어……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그의 품이 편해져서 나도 모르게 익숙한 말이 튀어나왔다. 빙의한 지 10년이 지나도 가끔 단어가 툭툭 나올 때가 있었다.

물론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요새는 빈도가 줄긴 했지만.


“그나저나 이제 성으로 돌아갈까요?”

따뜻했던 헤르티안의 품을 빠져나와 짐을 챙겼다.

그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건 미처 보지 못한 채.

***



“대공비 전하!”

성으로 돌아가니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비올렛이 뛰쳐나왔다.


“늦은 시각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추운데 왜 밖에 나와 계세요.”

“걱정되어서 잠이 와야지요.”

나야말로 그녀가 감기라도 걸렸을까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선 그녀의 손을 맞잡고 따뜻하게 비벼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근데 헤르티안, 저 안 내려줄 거예요?”

헤르티안이 줄곧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든 탓이다. 마차에서도 내가 춥겠다면서 몸을 꽉 붙이고 있었는데, 성에 도착하고 나서도 나를 잡고 놔주질 않았다.

그가 따뜻해서 좋았지만, 이젠 내려줘도 되는데.


“이대로 갈 겁니다.”

비올렛이나 사용인들이 보든 말든 그는 꿋꿋하게 나를 안고 방까지 걸었다.

나는 그의 품으로 고개를 푹 박았다.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비올렛도 보는 앞이라 창피했을 뿐이지.

따뜻한 물에 씻고 나오자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렸다.

침대맡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무렵 헤르티안이 침실로 들어왔다.


“내일부터 성을 보수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뜻밖의 소식을 들고서.


“하지만 예산이 없는걸요. 제가 사업으로 번 돈은 영지민을 구출하기도 빠듯하구요.”

그가 내 맞은편에 앉아 시선을 맞췄다.


“결혼할 때 황실에서 나온 제 몫의 예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헤르티안이 필요할 때 써야 할 돈이잖아요.”

“성의 보수만큼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네. 저야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니지만 사용인들은 그게 안 되니까요. 물도 차가워서 손이 다 텄더라고요.”

내가 추워서였던 이유도 있지만, 보니사의 손이 부르튼 걸 보곤 줄곧 신경이 쓰였다.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니사도 그 정도인데 다른 사용인들은 더 심하겠지.


“영주가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했어야 한 일인데. 이제야 여유가 생겼네요.”

미룰 수 있는 문제였지만 헤르티안은 나를 생각해서 무리해서 앞당긴 것이다. 내가 돈을 번다고 해도 영주인 헤르티안에게 결정권이 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컵을 그에게 내밀었다.


“헤르티안. 이거 마셔요.”

“이게 뭡니까?”

“부정맥에 좋은 약초 달인 물이에요.”

고마움의 뜻이었다.


“언제 이런 것도 챙겨 오셨습니까…….”

“방금이요.”

그는 얼굴이 금세 구겨졌다. 약이 많이 썼던 모양이다.


“이따가 먹으면 안 되겠습니까?”

“아까도 심장이 주체를 못 했잖아요. 얼른이요.”

“아…….”

어린애라도 된 양 헤르티안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는 그를 보며 쿡쿡 웃었다.


“농담이에요. 편할 때 드세요.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먹어야 하는 거 잊지 말고요.”

“약속하겠습니다.”

헤르티안은 컵을 내려두고 말을 이었다.


“어제 부인을 미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를 미행했다고요?”

“변방으로 올라가려던 걸 보고 있더군요. 그들을 생포했으나 셋 다 혀가 없는 자들이라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허…….”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예상 가는 사람이 딱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르티안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까만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굳이 이곳에 와서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돌아간 게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사람은 세르디스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결혼을 하면 원작에서 완전히 벗어날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시기로 보면 슬슬 비올렛에 대한 미안함으로 후회해야 할 그가 아직도 내게 미련을 갖고 있다.


‘얼마나 후회하려고 저러는지.’

유부녀까지 건드리는 남자를 비올렛이 용서할 수 있을까?

물론 내가 그 얍삽한 수법에 넘어갈 일은 없었다.

그전에 세르디스가 이미 결혼한 우리를 상대로 벌일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거나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는 거겠지.


“결혼하면 잠잠해질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네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세르디스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헤르티안은 영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주신 거라 제겐 하나밖에 없는 장난감이요. 어느 날, 세르디스가 그걸 탐내더군요. 저도 그까짓 장난감 한 번 놀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황궁 구석에서 눈치 보며 살았던 저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양보해주라는 어머니의 말에도 절대 빌려주지 않았죠.”

허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다음 날이 되자 그 장난감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다신 고쳐 쓰지 못하도록 엉망이 된 겁니다. 누가 그랬는지는 끝끝내 알아내지 못했지만 직감할 순 있었습니다.”

원작을 읽은 나는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던 세르디스가 벌인 짓이라는 걸. 황후의 소생은 하나뿐이었으니 거리낄 게 없었겠지.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멋대로지.


“그 뒤로는 욕심 없는 척 살았습니다. 그래야 세르디스가 탐내지 않을 테니까. 근데 부인까지 탐내는 건 차마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헤르티안.”

“부인이 저 때문에 망가질까 두렵습니다.”

헤르티안이 그간 나를 도와주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손을 살포시 감싸주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내 곧은 시선으로 잡아주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

아네트가 다시 고이 잠들자, 헤르티안은 세르디스를 찾아갔다.

그는 이곳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듯 와인을 가득 채운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언제쯤 꺼질 생각이지?”

세르디스는 헤르티안에게 잔을 넘겨주었다.


“북부는 와인 맛이 독특하네. 한잔해.”

“한가하게 술이나 마실 여유 없다.”

“딱딱하기는.”

세르디스가 픽 웃으며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와인을 머금었다.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는 세르디스의 다리는 멀쩡했다.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지만, 그는 멀쩡하게 서 있었다.

헤르티안은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무감한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언제까지 아네트한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참이지? 황자 자리가 딴 데 눈 돌릴 여유가 있는 자리였던가?”

“왜? 신경 쓰여?”

“정확히는 거슬리는 거지.”

 

 
그는 오물 보는 것처럼 세르디스를 쳐다보았다.


“결혼한 여자에게 미련이 남아서 미행을 붙이는 것도 모자라 더러운 수라도 쓰고 있나 싶어서. 절름발이 행세도 못 봐주겠더군. 더 연습이라도 해오든가.”

세르디스의 매끈한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이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는 무슨 수야. 서로 잘 지내보려고 온 거지. 다리 아픈 척한 것도 미안하다. 더 머물다가 가고 싶은데 너랑 아네트가 나를 돌려보내려고 안달이니까 일부러 다친 척 좀 했어. 근데 아직도 나한테 뭔가 남은 게 있는 모양이네. 내일 일찍 갈 테니 표정 풀어.”

이미 헤르티안이 눈치챈 걸 알면서도, 세르디스는 끝까지 모른 척 일관했다.

그에겐 꺼내지 않은 패가 있었다.

아네트가 카시안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

헤르티안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

편지로 미루어 보아 둘 사이는 친밀함을 넘어섰다. 세르디스가 알고 있던 아네트 주변 사람 중에 카시안만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이라면 굳이 계약 결혼이 아니라도 결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세르디스는 와인을 마시는 척하며 보이지 않게 씨익 웃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

아침이 밝았는데도 대공성은 유난히 조용했다.


“세르디스 전하가 가셨다고?”

“네, 마님. 이른 새벽부터 나가시길래 마님을 깨우려고 했는데 말씀 전하지 말라고 당부하셔서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인사도 없이 성을 떠난 것이다.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다리 다쳤다면서 잘도 나갔네.”

나를 미행하는 데 실패해서 도망간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세르디스가 말없이 떠나서 비올렛이 성에 홀로 남았다.

비올렛한테 빌붙어 올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버리다니.

정말 쓰레기 남주 그 자체였다.


“마님, 그보다 밖으로 나와보세요!”

보니사는 아까부터 흥분 상태였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얼굴로 내 팔을 살포시 잡았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이 마을로 가는 마지막 날이네.”

오늘이 칸타드와 약속한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30억이 해결되었으니 앞으로 45억. 그것만 벌면 된다.


“아뇨, 오늘은 마을에 안 가셔도 되겠어요!”

반사적으로 눈이 뜨였다.

순간 내 30억이 날아간 줄 알고 말이다.

하지만 예상이랑은 전혀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마님 앞으로 30억 골드가 도착했습니다.”

칸타드가 하루 앞당겨 내게 골드를 주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칸타드 앞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헤르티안은 바닥에 쓰러진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데려왔다고 했지만, 내 기억으론 분명 칸타드 앞에서 쓰러졌다.

게다가 그 깐깐한 인간이 하루를 빼먹은 걸 그냥 봐줬을 리가 없는데.


“마님 기쁘지 않으세요?”

“아니. 기뻐.”

내가 다시 웃으니 보니사가 따라 웃었다.

뭐, 일찍 주면 나야 고맙지.


“그동안 마님께서 힘들게 고생하신 보상을 이제 받네요.”

“너도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지. 자, 보니사.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야.”

나는 보니사와 잘 어울리는 호박 보석 목걸이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간 나를 따라서 약초를 만들고 산까지 오르락내리락했던 보니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이었는 걸요…….”

“나도 내가 줘야 하니까 주는 거야.”

한사코 거부하던 손이 목걸이를 받아 들곤 소중하게 움켜쥐었다. 소식을 듣고 내려온 길로타와 잭슨도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님…… 정말 대단하십니다요.”

“저도 길로타에게 전달받았어요. 마님께서 정말 5천만 골드 약초를 30억에 파신 거예요?”

나는 눈을 찡긋거렸다.


“제가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이들도 이 돈이 어디서 들어온 돈인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모두에게 공개할 순 없었다.

리리와 마찬가지로 영지 사람들도 쿠르시아인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변방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야, 상부상조하는 관계라 치지만 일반 마을 사람들에겐 그저 적국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기에 이번 거래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비밀인 걸로.


“전부 쿠르시아에 있는 영지민을 구제하는 데 사용해주세요.”

“모든 돈을 말입니까?”

“네. 시기가 늦을수록 값이 더 오를 거예요.”

거액으로 거래하는 걸 알고 쿠르시아인들이 야금야금 가격을 올리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데려오는 게 급선무였다.

물론 나도 고생해서 번 30억을 바로 사용해버리는 게 아쉽지만. 쩝, 어쩔 수 있나.


“마님. 재고해 보실 생각은……?”

“없어요.”

나보다 잭슨이 더 아쉬운 얼굴이었다. 나는 돈 상자를 꼭 끌어안는 잭슨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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