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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내가 이 여자 남편이다 (35/79)


35화 내가 이 여자 남편이다
2023.04.01.


이제야 퍼즐이 모두 맞춰졌다.


‘그러니까 아네트는 카시안이 헤르티안 놈이라는 걸 모르고, 그 녀석은 아네트에게 정체를 숨기고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거지?’

그리고 헤르티안 놈이 이딴 편지 쪼가리로 아네트와 내 사이를 이간질한 거고.

어떻게 이간질했으면 그렇게 자신을 기피할까.

그는 기가 차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이간질한 본인은 아네트와 결혼했다. 그것도 황제를 구슬려서 중간에 막지도 못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아네트를 짝사랑한 헤르티안이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벌인 것이다.

세르디스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요! 답답해 죽겠어요!”

“아까 집사가 안내해준 방을 구경하다가 서랍에 있는 걸 봤어.”

그는 어물쩍 대답한 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계획은 빠르게 결정 났다.


‘꽤 애를 먹었으니까 기억에 오래 남도록 아프게 갚아줘야지.’

그게 세르디스의 방식이었다.


“손님 방 서랍이라뇨? 헤르티안이 편지만큼은 꼼꼼하게 보관하는 편인데 이상하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했지?”

“네. 그건 확실해요.”

“연기일 가능성이 커. 아네트가 안살림까지 도맡아 하진 않잖아.”

계약 결혼이니만큼 진짜 대공비의 임무를 다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아뇨? 누구보다 열심히 하던데요?”

안 그래도 리리 또한 의심했던 부분이다.

짜인 결혼임을 뻔히 아는데, 아네트가 열정적으로 일을 벌여대니까.

하녀들에게도 아네트가 철없는 수도 귀족 영애라 일은 뒷전이라고 말해 두었는데, 아네트가 보란 듯이 일 처리를 열심히 하는 탓에 그마저도 헛수고가 될 판이다.


“저는 헤르티안 오라버니가 일부러 집안 살림할 사람을 고용한 줄 알았다니까요. 매일 여기저기 다니느라 얼굴 볼 시간도 없어요.”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아카데미에서도 연구실에 갇혀 있던 아네트가 대뜸 안살림을 하다니.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뭘 하느라 그렇게 바쁜데?”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지난번에 상인들이 마차에 약초를 잔뜩 실어 온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영지를 돌아다니기 바쁘더라고요. 매일같이 밖에 나가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영지를 돌아다닌다라.

수도의 겨울보다 추운 이곳에서 아네트가 밖을 나가는 데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

모두 조사해보면 나올 일이었다.


“아, 그리고 저번에는 쿠르시아인한테 사과하라고 하질 않나. 사사건건 간섭이 심해요.”

리리는 이 틈을 타 자신의 억울함도 호소했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네.”

“그러니까요. 제가 얼마나 속으로 끙끙 앓았게요. 이거 보여요? 피부 거칠어진 거.”

제 고생을 알아주는 세르디스에게 리리는 쉽게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세르디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리리. 앞으로 너랑 내가 힘을 합쳐야겠다.”

“뭘 하려고요?”

세르디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꼬인 족보를 풀어야지.”

 

 

***



“아예 눌러사시려고요?”

금방 떠날 줄 알았던 세르디스 일행이 삼 일째 여기서 묵고 있다.


“아네트. 내가 이런 상태로 수도에 돌아가 봐.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겠어?”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삐끗했단다.

침대에 누워 있던 세르디스는 억지로 일어서려다 통증이 생긴 척 낑낑거렸다.

정말 다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두꺼운 천으로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칭칭 감아뒀으므로.


“일어나지 마세요. 괜히 더 다쳐서 평생 여기 계실라.”

“내 걱정해주는 거야? 역시 상냥해.”

“……아침 식사나 방으로 내오라고 할게요.”

오히려 잘된 일이다.

어차피 금세 떠나지 않을 것 같았고, 다리를 다친 덕에 날 따라 나가겠다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덕분에 세르디스의 방해 없이 비올렛을 오래 보게 되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물론 나는 칸타드와의 약속 때문에 그녀와 오랜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대신 비올렛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리리가 있어서 비올렛도 여기 있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아 보였다.


“앞으로 이틀 남았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틀 후면 거래금 30억을 받는다. 돈 받을 생각을 하니 마치 월급날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얼른 헤르티안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마 깜짝 놀라겠지?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성공적으로 거래한 건 칭찬해 줄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 편히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내일이 오기를 바라며 변방 마을로 가는 마차에 막 올라서려던 때였다.

휘이익.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마차 문이 거칠게 닫혔다. 동시에 겨우 마차 문을 잡은 몸은 종잇장처럼 휘청거렸다.


“마님! 어서 마차에 오르십시오!”

어디선가 나타난 마부가 나를 잡아주었다. 덕분에 간신히 마차에 올라탔다. 그 뒤로 차체가 여러 차례 흔들거렸다.

미처 밖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로 마차 문고리를 꼭 잡고 있자니,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완전히 바람이 멎고 난 뒤엔 마부가 문을 열어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응. 북부는 날씨도 제멋대로구나.”

마부 뒤로 보이는 거리엔 돌풍을 못 이긴 남자 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저 사람들 기절한 것 같은데?”

추운 북부 거리 바닥에 계속 누워 있다가는 입이 돌아갈 것이다.


“의원에 데려다줘야겠어.”

영지의 일이라 차마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리려는 나를 마부가 저지했다.


“이 거리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저런 사람들은 영지 사람들이 알아서 데려다가 치료해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지켜보는데?”

그들 주변으로 사람은 모여들었으나, 그들을 데려가는 사람은 없었다.


“마님.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언제 바람이 다시 불어올지도 모릅니다. 마차도 그 강풍에 얼마나 버틸지……. 급하신 일 아니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내가 고민하자, 마부가 덧붙였다.


“정 그러시면 제가 가서 의원으로 데려가 달라 부탁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주게.”

“예. 걱정하지 말고 잠시 마차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뭔가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만 신경을 껐다.

마부가 굳이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근데 오늘따라 몸이 으슬으슬하긴 하다.”

나는 털 망토를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세르디스가 북부에 오고 나서 여러모로 신경이 쓰여,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 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니 몸에선 슬슬 열이 오르고 있었다.


“서둘러 다녀와야겠다.”

 

***

칸타드의 상처는 희미한 흉터만 남았다.

깊은 상처라 약을 써도 치료하는 데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큰 문제 없이 치료되었다.

나는 다리를 바닥에 콱콱 차는 칸타드를 보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거의 한 달간 왼쪽 다리를 못 쓰셨으니까 갑자기 뛰어다니시지 말고 천천히 걷는 것부터 연습하세요.”

“바로 훈련에 돌입한다.”

“나중에 고생하셔도 전 몰라요. 내일이 마지막이니까.”

슬슬 헤르티안이 의심을 할 법도 했다.

근 한 달 동안 매일 외출을 자행했으니까.

내일이면 30억을 받는 셈이니 이제 그를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물씬 들었다.

저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렸다.


“그렇게 좋은가?”

“당연하죠. 이제 드디어 자유인데.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오는 것도 일이라고요.”

“내가 괜한 고생을 시켰군.”

“뭐, 정당한 대가를 치렀으니까요.”

나는 한 달 동안 막사 안에 멋대로 펼쳐두었던 약초 더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병사들에게도 한 번 더 치료법을 알려줄 예정이라, 짐은 미리 정리해두어야 했다.


“오늘은 이것만 정리하면 갈 거예요.”

그 말에 칸타드가 급히 되물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는 거지? 돈을 날로 먹을 생각이던가?”

은근히 돈으로 압박 잘한다니까.

매번 칼같이 퇴근하려던 내게 저 말을 덧붙이면서 굴린 그다. 이젠 저 잔소리도 익숙하게 흘려보냈다.


“그건 아니고요.”

마저 약초를 다 정리한 내가 바구니를 들고 일어서려던 때였다.

휘청.

몸이 크게 흔들리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또다.’

기어코 몸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간 것이다.

하필이면 여기서.

오늘은 보니사도 함께 오지 않았다.

대뜸 찾아온 손님 때문에 성에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여기서 기절할 순 없었다.

기절하면 하루는 꼬박 잠이 드는데, 외박하면 헤르티안이 나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어기고 멋대로 쿠르시아인과 거래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혼을 하자고 할지도 몰라.’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쓰러지지 않게 버텼다.


“오늘은……. 감기 기운이…… 좀 있거든요.”

다행히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막사 입구까지 걸어가는 데 성공했다.

마을까지만 버티면 마부에게 대공성으로 가자고 하면 된다. 마차에서 기절하는 건 상관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쓰러지는 건 위험하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그때,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칸타드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나는 겨우 움직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 급한 게 아니면…… 내일 하실래요? 지금은 머리가 좀 아파서…….”

“급한 건 아니다만…… 그렇게 하지. 조심히 가라.”

다행히 그는 나를 막지 않았다. 무사히 막사를 나왔다.

이제 마을까지만, 마을까지만 걸어가면 된다.

몸이 미친 듯이 달달 떨렸다.

망토를 꽉 쥐어 몸에 둘렀다. 얇은 망토를 덧대어도 바람을 막아주진 못했다.


‘여우 털…… 토끼 털…….’

너무 춥다.

평민 옷이라고 얇은 걸로 갈아입은 게 잘못이었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내일은 기필코 털 망토를 입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때.


“저기. 괜찮나?”

막사에서 나온 칸타드가 내 어깨를 돌려세웠다. 그 바람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정신력이 그만 끊어졌다.


“아, 안 돼…….”

마지막으로 보인 건 칸타드의 따뜻해 보이는 털 망토였다.

***

칸타드는 돌연 눈앞에서 쓰러진 아네트를 보고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죽으면 안 된다!”

아네트는 눈이 뒤집힌 채로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

칸타드는 당황스러움에 그대로 얼어붙어 아네트가 깨어나도록 소리만 내질렀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목소리 낮추지?”

 

 
누군가에 의해서 아네트를 빼앗겼다. 흑발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아네트를 가볍게 안아 든 남자는 그녀 위로 따뜻한 숄을 덧대 주었다. 꽤 익숙한 손길이었다.

그 사내는 무감한 눈으로 칸타드를 보더니 이내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칸타드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국경을 넘어 마을로 걸어갔다.

불법행위라는 것도 잊은 채로.

그를 따라가자, 익숙한 레퀴에스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남자를 보고 알아서 머리를 조아리며, 한 집안으로 안내했다.

그 남자는 침대에 아네트를 눕힌 뒤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혈색이 돌아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러자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죄다 나와 허리를 납죽 숙였다.


“저희가 면목이 없습니다. 몸이 성치 않은 걸 알고서도 굳이 막사에 가신다는 걸 말리지 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그간의 은혜를 모르고…… 대공 전하께서 그렇게 당부하셨었는데.”

칸타드가 잠시 숨을 멈춘 건, 그들이 그를 대공이라고 부른 대목에서였다.

밝은 곳에서 살펴보니 옷차림새가 일반 사람들과는 달랐다. 아니다. 옷이 아니라 그가 풍기는 오라가 남달랐다.

많은 레퀴에스인들을 만나봤지만, 이 정도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남자가 말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뜻 인형처럼 보이기도 하는 남자가 시선을 제 쪽으로 돌렸다.

칸타드는 알면서도 물었다.


“당신이 새로운 이곳의 영주인가?”

“그렇다.”

북부의 주인답게 차가운 말투였다.


“이곳 주인은 생각보다 신하에 대한 정이 깊은가 보군.”

헤르티안은 그 말을 듣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러자 칸타드는 설명을 덧붙였다.


“저 여자. 대공비의 사람이라고 들었다. 아내의 사람을 직접 챙기는 건 주군이라서가 아닌가?”

칭찬이라기보단 과하다는 지적이었다. 성에 있어야 할 영주가 변방까지 나와 신하를 안아 드는 건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제 부인이나 챙길 것이지.’

칸타드는 여자를 지키기라도 하듯 서 있는 그가 은근히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를 지나쳐 자신이 그녀 곁에 있으려고 다가가던 때였다. 헤르티안이 거칠게 그를 막아섰다.


“내 거래 상대이기도 하니 깨어날 때까지 내가 돌보…….”

“주군이 아니라 남편이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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