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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카시안이 헤르티안이다 (34/79)


34화 카시안이 헤르티안이다
2023.03.29.



“개소리를 대놓고 하는군.”

헤르티안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뭐, 어머니는 금세 회복하기도 하셨고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었어. 아마 찻잎에 잘못 섞인 잡풀이 독성을 띤 모양이야.”

그렇게 사건을 덮었구나.

아마 내가 쓰러졌대도 그는 이런 식으로 사건을 덮었을 것이다.

우리가 입을 다물자 세르디스는 이 말장난에서 승리한 사람처럼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더는 개소리에 대꾸하기 싫었을 뿐인데.

저녁 식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르디스가 떠드는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무례하다는 지적을 할 법도 한데, 세르디스는 쉴 틈 없이 입을 놀렸다.

되레 지친 쪽은 헤르티안이었다.

손님 같지 않은 손님을 대접하느라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어쩌면 세르디스가 나를 괴롭힐까 봐 자리에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눈치껏 차 한잔을 모두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이 깊었네요. 저는 이만 올라갈 테니 집사가 안내해준 방에서 편하게 주무세요.”

응접실을 나와 계단에 오르자, 뒤따라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곧 다급해진 발소리가 나를 따라잡더니 이내 나를 멈춰 세웠다.


“미안해요, 대공비 전하.”

비올렛이었다.

그녀는 여기 도착하고부터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었는데, 되새겨보면 내 눈치를 보느라 그런 듯했다.

나는 표정을 편안하게 풀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보나 마나 세르디스가 억지로 그녀를 따라왔을 테니.


“전하께서 함께 가자고 하시는데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신 거죠. 맞죠?”

“맞아요, 그런데도 미안해요. 뻔히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알고 있었으면 저도 함께 오지 않아야 했는데. 오랜만에 영애가 보고 싶어서 그만…… 아, 영애가 아니라 대공비 전하.”

훌쩍거리는 와중에도 호칭을 정정하는 건 잊지 않았다.


“편하게 아네트라고 부르세요. 어차피 나이도 제가 어린걸요.”

“그,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죠.”

어두운 복도에서도 발갛게 상기된 볼이 선명하게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비올렛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나저나 대공 전하는 처음 뵙는데 두 분이 정말 잘 어울려요. 식사하는 내내 두 사람만 봤어요.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저희 전하께서 한 미모 하시죠. 얼굴 보고 결혼했다니까요.”

 

 

***

아네트와 비올렛이 나가자, 헤르티안은 더 볼 것 없다는 얼굴로 한마디 인사도 없이 응접실을 나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세르디스와 리리.

리리는 비올렛을 따라 나가려다가 헤르티안이 눈치를 주는 바람에 응접실에 남아야 했다.


“쳇. 나도 비올렛 공녀님이랑 한껏 수다 떨고 싶은데.”

비올렛과 리리는 오며 가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본디 심성이 고운 비올렛은 사교계에서도 성깔이 나쁜 리리를 잘 받아주었고, 두 사람의 친분은 여태 이어졌다.

그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블란디체로 온 이후에는 자주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불만을 툭툭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새언니 말고 나랑 놀아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나가려다가, 혼자 남은 세르디스를 보고 인사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어릴 적부터 가족처럼 지낸 헤르티안과 달리, 세르디스 또한 친족이긴 했지만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르디스 외가 자체가 헤르티안을 죽이려고 안달인 걸 알면서도 친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결국 리리는 꾸벅 목례만 하고 응접실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막 방향을 틀려던 찰나, 세르디스가 먼저 리리에게 말을 걸었다.


“리리. 오랜만에 만난 오라버니랑 회포나 풀지 않을래?”

그 말에 리리가 고개를 돌렸다.

세르디스는 소파에 양팔을 걸치고 다리를 꼰 채 제 집주인처럼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대답은 알아서 튀어 나갔다.


“됐거든요.”

“너까지 딱딱하게 굴면 나 상처받아.”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해 보이는 세르디스를 보며 리리는 대꾸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헤르티안이 왜 저렇게 세르디스를 무시했는지 도리어 이해가 갔다.

그래서 괜히 엮이기 싫은 마음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리리, 너는 둘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말이 리리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세르디스는 알게 모르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이 좋아서 결혼한 걸로는 안 보이거든. 나만 그런가?”

그러면서 능청스럽게 긁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만약 리리가 같은 마음이 아니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둔 셈이다.

하지만 세르디스는 리리가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기 도착하고 나서부터 줄곧 아네트를 바라보는 표정이 한없이 냉랭했던 탓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리리가 관심을 보였다.

사실 아네트를 누구보다 이곳에서 쫓아내고 싶은 사람은 리리였기에.


“전쟁을 막 치르고 돌아온 사내가 여인을 만날 틈이나 있었을까.”

“그래도 두 사람이 좋아서 한 게 맞다는데요?”

터무니없는 소리란 걸 알지만, 두 사람 사이는 의심할 거리가 없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도 줄곧 사이가 좋아,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잉꼬부부라고 소문이 났고.


“그건 그렇더라고. 근데 그거 알아? 내가 이상한 얘기를 들었는데.”

“뭐, 뭔데요?”

“딱딱하게 서서 얘기하지 말고 여기 앉아봐.”

리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세르디스의 옆에 가서 앉았다.


“아네트가 결혼하기 일주일 전에, 정보 길드에서 남편감을 찾았다더라고.”

아네트가 남편감을 찾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네트도 세르디스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일부러 티 나는 연기를 하곤 했으니까.


‘그것도 연기라고.’

세르디스는 단 한 순간도 그 연기를 믿지 않았다.

되레 의심만 키울 뿐이었다.

왜, 아네트가 자신을 피하고자 결혼까지 했을까. 하는 의심.

아네트에 대한 모든 걸 알아보았지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아네트가 눈앞에서 쓰러지고 난 후,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는 것.

마치 딴사람이 된 것처럼 자신을 멀리한다는 것.

그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세르디스는 아네트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갖지 못했기에 더 욕심이 생겼다. 게다가 자신의 것을 빼앗은 게 다른 이도 아닌 헤르티안이라 더욱더.


“자세히 말해봐요. 새언니가 남편을 구하러 다녔다고요?”

어느새 리리의 얼굴은 심각해져선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네트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결혼한다고 떠들길래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알아봤는데. 글쎄 계약 결혼할 상대를 찾고 있더라고.”

그는 자신이 아네트에게 어떤 감정인지는 철저하게 숨겼다.


“허…… 이상하긴 했어요. 헤르티안 오라버니가 그 사람도 아니고 다른 여자랑 결혼이라니.”

리리의 말에 담긴 의미를 세르디스가 캐물었다.


“그 사람이라니?”

리리는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리리. 솔직하게 얘기해. 만약에 아네트랑 헤르티안이 계약 결혼을 한 거면 훗날 대공 직위를 이을 사람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결국 리리는 실토했다. 그게 헤르티안을 위하는 일인 것만 같았다.


“실은 헤르티안은 따로 좋아하는 상대가 있거든요.”

어설프게 알고 뱉은 말이었다.

헤르티안이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여자라는 것도.


‘우와. 헤르티안 오라버니, 누구한테 편지 받은 거야? 편지지가 예쁜데 여자야?’

‘이리 줘. 너는 몰라도 돼.’

늘 다정한 헤르티안도 편지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굴었으니까.

게다가 편지를 열어보는 얼굴은 두말할 것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나.

굳이 그 상대를 캐보지 않은 것도 헤르티안에게 들켰다간, 영영 자신을 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대뜸 헤르티안이 딴 여자랑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니. 믿을 리가.


“다른 상대? 그게 누군데?”

“저도 누군지는 몰라요. 다만 헤르티안이 짝사랑했던 여자가 있는 건 확실해요. 지금도 편지를 주고받는 것 같긴 한데…….”

“편지라니…… 설마 이거?”

세르디스의 품에서 익숙한 편지 봉투가 나왔다.

그걸 본 다홍색 눈동자가 땡그랗게 커졌다.


“그걸 왜 세르디스 오라버니가 갖고 있어요?”

‘역시 그런 거였구나.’

이 편지는 아네트가 결혼식에서 럭키에게 맡긴 편지였다.

그저 신부 대기실로 가서 헤르티안에 대해 안 좋은 말만 몇 마디 하라고 했더니, 이 편지를 건네주지 뭐람?

게다가 럭키 말에 따르면 오랜 시간 편지를 주고받은 이가 있단다.

세르디스는 그 말을 듣고 곧장 럭키에게 궁정 화가 추천장을 써주기로 약속했다. 작은 아이는 그저 신이 나 편지를 전해주고 떠났다.

보내는 이는 아네트.

받는 이는 카시안.

편지 속 내용은 꽤 심오했다.

[카시안, 용기 내 줘서 고마워.

네가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만나자는 말을 해서 미안해.

그래도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황이든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어.]

오랜 시간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해놓고 서로 얼굴도 몰랐던 모양이다.

언뜻 보기엔 단순히 약속을 잡는 내용이었지만, 몇 번이고 뜯어보면 한 마디 한 마디 신경 쓰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는 직감했다.

아네트가 갑자기 변한 이유가 어쩌면, 이 편지와 관련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곧장 상대를 찾아 나섰다.


‘카시안은 누굴까.’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지만 집히는 사람은 없었다.

수도에 있는 카시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모두 조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니었다.

아네트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카시안은 본명이 아니라는 거네.’

그래서 아네트가 결혼하고 가문을 떠난 뒤, 그녀가 결혼식장에서 편지를 흘린 척 백작가로 다시 돌려보냈다.

집사는 아네트가 카시안에게 보낸 편지임을 확인하고 어디론가 그 편지를 맡겼다.

세르디스는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편지의 도착지가 블란디체 성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게 헤르티안 오라버니가 주고받던 편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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