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부인께서 속상해 하실 걸요
(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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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부인께서 속상해 하실 걸요
2023.03.22.
하녀들은 기가 찼다.
“10벌도 아니고 50벌?”
“드레스를 만들려면 이 정도 양으로는 어림도 없는 거 몰라? 마님께서 우리 같은 유니폼을 입으시는 것도 아니고.”
하녀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아 유니폼. 유니폼 50벌을 만들라고 하셨어.”
“정말 마님께서 유니폼을 입으신다고? 말장난하니?”
“아니, 마님께선 하녀들 옷이 얇아서 걱정된다고 옷을 만들라고 하신 거야.”
“우리 옷을…… 만들라고 하셨다고?”
“두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니?”
보니사가 한 발짝 크게 다가가자, 하녀들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다시 말해줄게. 너희가 욕하는 마님이 너희 옷을 먼저 지어 달라고 하셨다고.”
“우리가 언제 욕을 했다고…….”
꽤 당황하는 걸 보니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마님께서 왜 우리 옷을 만들어 주신다는 거지?’
‘이 두껍고 좋은 면으로 하녀들 옷을?’
보니사는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땅에 떨어진 면직물을 들었다.
하녀들은 그녀가 나가는 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다.
사실 염치가 없었다.
마님이 이기적이라고 대놓고 떠들어 놓고, 옷을 받아 챙길 염치가.
그녀들의 시선이 켜켜이 쌓여 있는 면직물로 향했다. 도톰하고 촘촘한 면으로 만든 옷이라면 이 추운 대공성 생활도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갈 수는…….
그때 문밖에서 보니사의 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안 오면 너희 건 빼고 만든다.”
그제야 하녀들은 못 이기는 척 천 뭉치를 들었다.
“그 많은 걸 혼자 어떻게 만들려고!”
“같이 가!”
***
약속한 날짜가 되었다. 나는 태피스트리를 가득 담은 수레와 함께 국경 마을로 향했다.
수레 소리가 들리자마자, 마당에서 장작을 가져가던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아이고. 이게 다 뭐예요?”
이곳에 온 첫날, 병사와 친근하게 대화했던 아주머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뒤이어 마을 사람들 한두 명씩 나와 수레를 구경했다.
“집마다 하나씩 가져가세요.”
“세상에나. 이렇게 두꺼운 태피스트리는 처음 봐요.”
아주머니는 태피스트리를 만지작거리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장장이 아저씨 딸이라고 해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거래도 무사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맙기는요! 대공비 전하이신데 당연히 해드려야지.”
이들에겐 정체를 밝혔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이런 마을엔 낯선 사람이 오는 자체로 거부감이 들 테니까. 걱정도 잠시, 이들은 한 줌 관심 없는 마을에 대공비가 올라온 것만으로도 쌍수를 켜고 환영했다.
“게다가 우리 가족을 구해준다고 이 고생을 하시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는 답니까?”
“맞아요. 우리 딸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저는 제집도 내어 드릴 수 있어요.”
여기 마을 사람 대부분은 쿠르시아에 끌려간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국경을 넘어오는 가족을 기다리기 위해서 여기 정착한 것이다. 처음엔 쿠르시아인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도, 이젠 공생 관계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나도 그 덕을 톡톡히 보았고.
“집은 됐고, 얼른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쉿. 병사들이 듣겠어요.”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
다음으로는 울타리 너머 막사였다.
“잘 알아보고 오셨나요? 지휘관님.”
내가 들어가자 지휘관은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눈짓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온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저 담담한 얼굴.
그가 제대로 정보를 알아 왔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굳게 다물린 입이 열렸다.
“거래하겠다.”
나이스.
나는 기껍게 미소 지으며 서류를 반대편으로 밀었다.
“20억에 약초 100파운드를 거래한다는 내용이에요. 하단에 인장을 찍어 주시면 됩니다.”
큰돈이 오가는 거래인 만큼 그는 신중하게 계약서를 읽었다.
그러더니 주저 없이 인장을 꺼내 들었다. 인장이 찍히기만 하면 내 손에 20억이 들어온다. 곧 성을 보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 소리가 들렸나?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계약에 대해서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그러자 그는 나를 가늠하듯 뜯어보며 물었다.
“넌 누구지?”
예상한 질문이었다.
쿠르시아인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갖고 왔으니까.
단순히 산골 마을에 사는 대장장이 딸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을 거라 생각했다.
“인장 먼저 찍으신다면 알려드리죠. 제가 왜 그 정보를 알고 있는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에 앞서, 나도 원하는 걸 얻는 게 먼저였다.
몇 초간 눈싸움이 이어졌다. 그리고 진 쪽은 내가 아니었다. 그는 계약서에 인장을 쿵 찍어 건넸다. 이제 내가 답해줄 차례였다.
“저는 블란디체의 안주인께서 보낸 사람이에요.”
그에게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었다.
쿠르시아인을 대공비가 직접 상대했다는 건, 곧 약점이 될 테니까.
“대공비 전하께서 이 일을 미리 아시고 거래를 청했어요.”
나는 대공비의 대리인 척 내막을 설명했다. 처음 여기 온 것부터 거래를 제안한 이유까지. 모든 얘기를 들은 그는 헛바람을 터트렸다.
“영지의 주인이 귀환하자마자 살림을 차렸다더니. 빨리 결혼한 이유가 있었군.”
“워낙 현명하신 분이거든요.”
“근데 고작 일 년 치 약초를 20억에 사는 건 덤터기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제 와 흥정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다른 제국에서 사면 반값을 주고 살 수도 있을 거다.”
“그럼 그렇게 해보세요. 대신 평생 약초를 무시해왔던 쿠르시아인들이 약초를 대량 수입해오는 데 의심을 품을 테죠. 당연히 쿠르시아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보겠죠. 그다음엔 약초를 이 가격에 살 수 있을까요?”
내 막힘없는 대답에 그의 입이 다물렸다.
“됐죠?”
“아니. 고작 변방 막사에 있는 내게 이만한 돈이 있다고 생각하나?”
어디서 불쌍한 척을.
감성팔이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쿠르시아 때문에 블란디체에서 빠져나간 돈이 얼마인데!
“고작 막사나 지키는 기사님이라면 당연히 없었겠죠. 하지만 쿠르시아의 막내 황자님이라면 그 돈을 지불하지 못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요.”
평온한 두 눈이 한 차례 흔들렸다. 정곡을 찔린 얼굴이었다.
“어떻게 안 거지? 그것도 대공비가 알려 주었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대공비 전하께 여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죠. 당신 검집의 문양. 저건 쿠르시아 황가 문양이 아니던가요?”
막사 벽면에 걸려 있는 검 한 자루. 손잡이에 그려진 화려한 문양.
처음 이 막사에 들어오자 그게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대놓고 황가 문양이 그려진 검을 전시해 놓고, 여기서 일개 기사인 척을 한다고 모를 리가.
“만약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검이라 하더라도 그런 기사님을 허허벌판인 변방에 모셔 둘 리가 없잖아요. 쿠르시아는 통일한 직후 황좌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니 혈육 간의 싸움을 피하고자 변방으로 나온 황자님이시면 모를까.”
그리고 그게 막내 황자라는 건 때려 맞춘 내용이었다. 보통 막내는 치정 싸움에 끼지 않으니까.
“허. 전부 알고 있었군.”
“거래 상대를 미리 알아야 적당한 금액을 책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주인에 그 신하군.”
그는 대공비 대리인 나까지도 칭찬했다. 인정받은 건 오랜만이라 조금 뿌듯했다.
그런데, 이 남자. 계약서를 넘겨주지 않는다. 원하는 게 명백히 있는 눈빛이었다.
“또 궁금한 거라도 있으세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나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추가 조건은 추가 거래가 필요합니다.”
그는 냉큼 새 종이를 펼쳤다.
“한 달간 네가 이곳에 와서 치료법을 전수해 주어야 한다.”
“네? 제가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풀떼기만 던져주고 알아서 치료하라고 말할 셈이었나?”
“아뇨? 그러실 줄 알고 제가 치료법을 정리한 책도 가져왔어요.”
내가 주섬주섬 가져온 책을 들이밀자 그가 시큰둥하게 책을 휘리릭 펼쳐 보았다.
“보나 마나 이것도 돈을 주고 팔 생각이겠지.”
눈치는 빠른 인간.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내가 그동안 연구한 시간이 얼마인데.
“이것만 있으면 약초를 여러 방향으로 활용할 수도 있어요. 많이 먹으면 몸에 해로운 약초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래서 얼마를 부를 생각이었나?”
큰 금액이라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
지금 그와 흥정해야겠다.
“5…….”
“10억에 사겠다. 대신 한 달간 오는 거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결국 돈 앞에 무너져내렸다.
5억도 일부러 높게 부른 건데, 그것에 두 배를 쳐주겠다니!
“역시 황자님이라 통이 크십니다.”
나는 씩 웃으면서 엄지를 추켜 올렸다.
“여기선 황자라고 부르지 말아라. 다른 병사들이 위화감 느끼니까.”
“그럼…… 칸타드 님이라고 부를게요.”
인장에 있던 이름이었다.
“그러든지. 대신 돈은 한 달 후에 지급한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가 먹고 튈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알겠어요. 대신 더는 조건 추가하기 없기로.”
“알겠다.”
확답을 듣고 난 뒤, 나는 계약서와 치료책을 챙겼다. 그러던 중, 바닥에 떨어진 핏물을 발견했다. 떨어진 핏자국 끝엔 칸타드의 다리가 있었다.
“다쳤어요?”
깜짝 놀라 묻자, 그가 망토로 다리를 가렸다.
“신경 쓸 필요 없다.”
“그게 방금 약초를 20억이나 주고 산 사람이 할 말이에요? 얼른 바지 걷어보세요. 금방 약 발라 드릴 테니까.”
칸타드에게 다가가 망토를 획 젖혔다. 그러자 그가 당황하며 발을 뺐다.
“뭐 하는 짓이지?”
“제대로 상처 치료 안 하면 살이 썩어서 다리를 도려내야 할 수도 있어요. 평생 한쪽 다리로 살고 싶으세요?"
일부러 겁을 주었다. 하여간 쿠르시아인들은 병의 무서움을 모른다면서.
“썩을 일 없다.”
“쓰읍!”
자존심은 센 그와 한참의 실랑이 끝에 내가 이겼다. 바지를 걷자 정강이 쪽에 피가 가득 맺혀 있었다. 상처가 난 지는 며칠 지난 것 같은데,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조금의 움직임에도 상처가 터진 것이다. 나는 피부터 닦아냈다.
“검에 베인 상처네요.”
그리고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선 사람들 간의 싸움이 일어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다치는 이유도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마물 때문이고.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과 싸워서 베였을 리는 없었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이 방법밖엔 없었다.”
그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정보라는 건 내가 알아보라고 했던 정보였다.
“황족인 내가 검에 베였는데도 치료를 안 해주더군. 신전을 정비하는 것과 별개로 황족 치료 거부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네 말을 확신했다.”
그렇다고 자기 몸을 긋다니.
살짝 그은 게 아닌 깊게 파인 상처가 보기만 해도 통증을 일으켰다.
“원래 그렇게 무모하신 편이신가 봐요.”
“확실한 걸 좋아하는 편이지.”
센 척하는 게 참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다시는 그러지는 말라는 의미로 약초를 꾹꾹 상처에 눌러 발랐다. 아프긴 한 모양인지 그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치료라는 게 원래 이렇게 아픈 건가?”
“네. 아프다는 건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참으세요.”
“어쩔 수 없군.”
체념한 채로 눈을 감은 그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몸을 함부로 상처 낸 그를 위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렇게 다치면 집에서 기다리는 부인께서 마음이 아프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