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어딜 다녀오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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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어딜 다녀오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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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어딜 다녀오십니까?
2023.03.15.
헤르티안은 창고를 가득 채울 만큼의 약초 결재 서류를 보고 고민에 휩싸였다.
“아네트가 아무 생각 없이 이 약초를 샀을 리는 없는데.”
그녀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예지 능력을 가진 아네트에게도 따로 생각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헤르티안은 태어나 한 번도 누구에게 의지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그건 아네트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문제를 아네트에게 떠넘길 순 없었다.
만약 아네트가 사업에 실패해 낙담이라도 하는 날엔, 그녀가 자신과의 결혼을 후회할 게 뻔하니까.
그렇게 되느니 자신이 고생하더라도 업무를 하나 더 늘리는 편이 나았다.
“길타, 부인의 사업은 앞으로 내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요. 주인님.”
“카시안 이름으로 온 편지는 없었나?”
“전달받은 건 없었습니다.”
“그래……. 나가 봐.”
길타는 식은땀을 닦으며 헤르티안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문 앞에서 있던 아네트를 보고 꽥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네트는 그를 끌고 기둥 뒤에 숨었다.
“전하께서 뭐라고 하세요?”
“마님, 전하 말씀대로 지금이라도 사업을 접거나 넘기시는 건 어떻습니까요? 제 간이 다 쪼그라들겠습니다.”
아네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길타를 단단히 입단속 시켰다.
“약초값이 무려 5천만 골드예요. 제가 아니면 그 많은 약초 값을 어떻게 배로 불릴 수 있겠어요? 길타한테 방법 있어요?”
그가 도리질 쳤다.
“그럼 대공 전하께서는 달리 방법이 있으시대요?”
재차 도리질 치던 그가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물었다.
“마님께서야 말로 저 약초를 어떻게 파실 작정이십니까요?”
하도 답답해하는 길타를 보며 아네트는 고민에 빠졌다.
이걸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길타를 믿고 일을 진행하려면 신뢰가 우선이었다.
“곧 쿠르시아에 있는 신전이 모두 사라질 거예요.”
“예에?”
“쉿.”
눈이 접시만큼 커진 길타를 붙잡고 아네트는 상세하게 이 사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이야기했다. 길타는 말도 안 되는 얘기에 혼이 반쯤 나가버렸다.
“이건 길타랑 저만 알아야 해요.”
“하, 하지만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마님이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주인님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실 겁니다요.”
“공식적으로 나선다면 상대측은 거부감을 느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약초 거래도 어렵게 될 거고 5천만 골드는 그냥 날리게 되는 거예요.”
아네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한쪽에서는 대공이 다른 쪽에서는 대공비가 버티고 서 있으니 그는 오도 가도 못 하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뱉던 길타는 자기 상사인 잭슨을 떠올렸다.
‘잭슨 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요?’
잭슨이었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한 쪽을 골랐을 것이다.
그리고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확신이 드는 쪽으로 간다.
“……마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요.”
***
나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국경으로 향했다.
그들은 나를 이곳 마을의 대장장이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했다.
“오늘은 얘를 좀 봐줘.”
약의 효과를 톡톡히 본 병사는 직접 환자를 데려와 치료를 부탁했다.
벌써 5명의 상처를 돌봤다.
모두 빠르게 치료되었다. 태어나 한 번도 약을 쓰지 않는 몸이라 그런지 약효도 크게 나타났다.
“어디가 아프세요?”
“어제저녁을 잘 못 먹어서 그런가. 배가 슬슬 아픈데 이런 것도 치료가 가능하나?”
“당연하죠. 약초 달인 물을 하루에 세 번 나눠 드세요.”
나는 익숙한 손길로 약병을 꺼내 병사에게 건넸다.
“자, 다음 분?”
막사가 열리고 어깨에 붉은 휘장을 단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하지만 남자는 빤히 나를 응시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환자가 아닌가?”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약병을 정리했다.
그때였다.
“지, 지휘관님.”
떨리는 병사의 목소리에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 그게 말입니다.”
“제대로 설명해라.”
딱딱한 목소리에 병사의 눈이 땡그르르 굴렀다.
저 사람이 이곳의 우두머리다.
모르는 척했지만 단번에 알아보았다.
‘드디어 내 거래 상대가 나타났구나.’
헤르티안과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데도 그가 주는 위압감은 남달랐다.
그의 매서운 눈빛이 막사 안의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병사는 꿀 먹은 것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겁먹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가져온 약초로 병사들을 치료해줬어요.”
그 소리에 병사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선명한 다홍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여태 느껴본 적 없는 살기가 어렸다.
쿠르시아인에게도 레퀴에스는 적국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곧 저 굵은 목청에서 나를 끌어내라는 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여기 있는 병사 전부를?”
“네.”
“무슨 목적이지?”
예상과 달리 들려온 목소리는 차분했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들었다. 그렇다면 길게 끌 필요는 없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시면 제가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알려드릴게요.”
잠시 당황한 남자가 넌지시 말했다.
“딱 십 분이다.”
조용한 허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큰 막사로 나를 데려갔다. 앉자마자 그는 내게 무슨 목적인지부터 따져 물었다.
“목적은 없습니다. 피를 뚝뚝 흘리는 사람이 있고, 제게 치료 방법이 있는데 모르는 척하고 돌아서는 건 사람이 할 짓은 아니잖아요.”
“고작 그 얘기를 하려고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한 건가?”
그럴 리가.
나는 미리 준비해놨던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당신께 약초를 먼저 사 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처음으로 사내의 눈썹을 씰룩거렸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라도 들은 얼굴이었다.
“쿠르시아인에게 마른 풀떼기가 필요한 걸로 보이나?”
“필요하던데요?”
나는 당돌하게 밀어붙였다.
“이런 국경 지역에서 신전을 일일이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당장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와도 치료할 방법이 없고요.”
“웃기는군. 그렇대도 별다른 약초 없이 천년의 역사를 품은 제국이다. 그게 필요할 거라고 보는가?”
“네, 앞으로 몇 달 뒤엔 돈을 주고 구매하기 어려울 거예요.”
“고작 산 구석에 사는 마을 여자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남자의 눈에 신뢰라고는 한 줌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과 다르게 나를 더 적대하고 있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안목에 달렸죠. 앞으로 쿠르시아에 신전은 없을 겁니다. 파테르가 더는 공급되지 않을 거거든요. 신전을 잃은 수천 명의 백성에게 가장 많이 필요한 게 뭘까요?”
나는 눈으로 가져온 약초 더미를 가리켰다. 내 시선을 따라 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족들은 눈치챘을 거예요. 큰 이슈인 만큼 공식적인 발표가 있으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겠지만. 그때 저를 찾아오신다면 저는 지금 값의 열 배를 얹어 받겠습니다.”
지휘관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에 나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기간은 넉넉하게 일주일 드릴게요.”
이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라면, 거래할 가치가 없었다.
***
마차에서 옷을 갈아입고, 막 저택에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어딜 다녀오십니까?”
헤르티안이 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우중충한 날씨 덕에 노을이 지기 전인데도 성안이 어두웠다.
“영지를 돌아보고 왔어요. 구경할 게 많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지 뭐예요.”
나는 눈을 반달로 접어 웃으면서 헤르티안의 시선을 피했다. 그에게 비밀이 생기니 처음처럼 편하게 대하는 게 어려웠다.
헤르티안은 아무 말 없이 들어오는 나를 지켜보았다.
나는 숨 막히는 정적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 세 시가 다 되어가는데 당연히 드셨겠구나.”
“부인.”
헤르티안의 묵직한 음성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나는 그대로 멈춰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눈을 마주치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밖에 나가는 것도 좋지만 매일 나가시면 분명 탈이 날 겁니다.”
그러고는 차갑게 식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까만 돌멩이였다. 그건 그의 손만큼이나 따뜻했다.
“이게 뭐예요?”
“손이 시리실 것 같아 만들었습니다. 마법이 깃든 손난로입니다. 외출하실 때는 그걸 쓰십시오.”
손난로.
오랜만에 접하는 물건이었다.
현대랑 생김새는 달랐지만, 손안에 따뜻하게 열을 피워 올리는 손난로.
순식간에 얼었던 손이 녹아내렸다.
“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의 미소에 죄책감이 진하게 들었다. 나는 그가 하지 말라는 사업 때문에 겁도 없이 밖을 나돌아다니는데, 그는 바쁜 와중에도 날 걱정해서 손난로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게 그를 위한 길은 아니었다.
헤르티안에게도 영지민 탈환은 아주 중요한 임무이니까.
최대한 빨리 거래를 마치고 그에게 사과해야겠다.
“부인은 식사하셨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저 점심 굶었어요.”
나는 납작한 배를 쓱쓱 비볐다. 보니사가 준비해 준 도시락이 있었지만, 겨울에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들이 있어 모두 나눠준 탓이다. 하지만 식사까지 굶은 사실을 알면 헤르티안이 싫어할 테니 깜빡한 척 연기했다.
“제가 식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헤르티안이 직접이요?”
“검으로 사람만 벤 건 아닙니다.”
오싹한 소리를 태연하게 하니 웃음이 터졌다.
그는 까르륵 웃는 나를 앉히고 사라지더니, 이내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와,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요?”
그가 만들어 준 건 파스타였다.
닭가슴살을 곁들여 만든 크림 베이스 파스타. 양송이버섯이 송송 올라가 있어 먹음직스러웠다. 나는 포크에 면을 말아 크게 한 입 먹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꾸덕꾸덕한 크림에 은은하게 퍼지는 후추 향이 완벽했다.
어릴 적 리안이 해주던 파스타 맛이었다.
추억에 취해서 금세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디저트가 아닌 식사를 이렇게 배불리 먹은 건 오랜만이었다. 배가 빵빵하게 불렀다.
“정말 맛있었어요.”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줄곧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헤르티안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도 일이 많아 힘에 부칠 텐데, 매번 나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계약 상대이니 잘해주는 걸 테지만 나까지 그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가를 정리하곤 조용히 말했다.
“헤르티안. 일일이 절 챙기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차피 저희는 계약 관계잖아요. 이미 하인들 사이에서는 저희 관계도 좋아 보이는 편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