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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내가 대공비인데? (29/79)


29화 내가 대공비인데?
2023.03.11.


나를 알아본 거라면 계획이 틀어질 수 있다.

이런 변방 국경에 대공비가 와서 수상한 행동을 보인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으니.


“너…… 대장장이 딸 맞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병사는 손을 튕기며 깔깔 웃었다.


“대장장이 아저씨, 죽어도 딸은 안 보여준다더니만 안 보여주는 이유가 있었구나. 상상 이상이다. 딸이 마을에서 제일 예쁘니까 싸고돌았지.”

다행히 내 외모를 보고 놀란 거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병사님은 한쪽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괜찮으세요?”

“마음씨도 곱지. 언제 내 걸음걸이까지 봤대?”

“많이 다치셨나요?”

병사는 투박한 나무 상자 위에 앉아 바지를 걷어 올렸다. 정강이에 길게 벤 상처 사이로 붉은 피가 울컥거리며 흘러내렸다.


“오크 자식 발톱이 날카로워서 긁혔지 뭐야. 나 같은 상남자는 이깟 긁힌 상처로는 침 바르면 금세 나아.”

그러기엔 상처가 꽤 깊었다.


“따로 약은 없나요?”

“그건 너희 같은 약한 종족한테나 쓰는 거고, 쿠르시아인들한테 약은 필요 없지.”

병사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건 모르겠지.

그게 쿠르시아 패망의 원인이라는 거.

쿠르시아 내엔 수많은 신전이 존재한다.

신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쿠르시아의 역사 속에는 늘 신이 함께였다.

그렇기에 신력을 내려받은 성녀와 신관들의 신력에 의존도가 높았다.

아프면 주변 신전으로 가 치료받으면 그만이었다.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의학의 발달은 더뎠다. 그들에겐 의학의 발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신력이 없다면?’

그들을 치료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처럼 신전이 곁에 없다면 아파도 참아야 했다.


“제가 약을 발라 드릴게요.”

나는 이들을 상대로 약초를 팔기로 결심했다. 영지민을 빼 오기 위해서 쿠르시아인들에게 억대의 돈을 줘야 한다면 그 돈은 그들 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


“됐대도.”

“씁. 아프시잖아요. 이 상처면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예요. 게다가 병사님이 오크의 피엔 독성이 있다고 했잖아요. 상처에 독이 들어가면 다리가 썩을지도 몰라요.”

그제야 병사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바구니를 열어 상처 치유와 해독작용이 있는 약초를 꺼냈다.


“그깟 풀떼기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그걸 본 병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풀떼기가 아니라 약초예요.”

“신전에 가면 이깟 상처 하나쯤은 몇 초 만에 낫는다고.”

“그래서 신전에나 갈 수 있고요?”

“큼큼.”

길게 베인 상처 위로 약초를 촘촘히 바른 후, 깨끗한 천으로 상처 부위를 감쌌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통증 물약을 그에게 건넸다.


“쭉 마셔요.”

병사는 갈색 물약이 담긴 병을 해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독이야?”

“상처를 치료해놓고 독으로 죽이겠어요?”

“빛깔이 이상한데…….”

의심 가득한 병사를 위해 약병을 친히 열어 주었다.


“몸에 좋은 거라 생각하고 쭉 들이켜세요.”

그는 결국 약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캑캑거렸다.


“무슨 물이 이렇게 써!”

“물약. 약은 원래 쓴 법입니다.”

“레퀴에스인들은 미친 거 아냐? 이딴 걸 몸이 낫는다고 믿고 먹는다고?”

병사는 어린아이가 처음 약을 접한 순간처럼 막사를 돌아다니며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빙빙 돌아다니며 다른 병사들에게 일러바치는 걸 보니, 물약이 흡수가 다 된 모양이다.


“안 아프신가 봐요. 잘 걸어 다니시네요.”

“안 아프긴…… 어?”

 

 
그제야 제 상태를 알아챈 병사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져 당황스러움이 물씬 느껴졌다.


“여기다가 신력 넣었어?”

“레퀴에스에서는 신력이 아주 귀해서 황족도 받기 어려운걸요.”

“정말 풀떼기랑 흙탕물 같은 걸로 통증이 멎은 거라고?”

병사는 의심을 한가득 품고 물었다.


“제가 한 거라곤 약초를 발라 드린 것 정도인걸요.”

“하지만…… 아직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천으로 감싼 상처 부위엔 핏자국이 배어 나왔다.


“상처가 아물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해요. 약초를 챙겨드릴 테니까 하루에 한 번씩 깨끗한 천을 다시 덧대고 약초를 바르세요.”

“일주일밖에 안 걸린다는 거냐?”

“네. 이 물약을 먹으면 더 빨리 나을 거예요.”

흙탕물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병사는 내가 건넨 물약을 받아다 품속 깊은 곳에 고이 넣었다.

그들에게 약은 신세계나 다름없다.

쿠르시아에 신전은 많지만, 약방은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에 신전은 망한다.

신전 우물 안에서 공급되던 신력, 파테르가 더는 공급되지 않고 끊긴 탓이다.

더는 신력으로 치료가 불가능해지고, 기존의 오필 왕국을 제외한 쿠르시아 제국 전체에 수많은 병이 돌기 시작해 제국민의 1/3이 죽음에 이른다.

눈앞에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한 이들은 주변 국가를 무자비하게 쳐들어와, 약을 쟁취하기 위한 약탈을 시작한다.

그때 세르디스 또한 습격당할 뻔한 걸 비올렛이 구해주어 두 사람이 한층 가까워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저는 내일 또 올게요.”

고작 비올렛과 세르디스의 로맨스를 위해서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야무지게 이용해서 돈이나 왕창 뜯어내면 모를까.

***

집에 막 도착했을 때는 리리를 마주쳤다. 얼굴을 보기 껄끄러웠지만,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추우니까 안에서 얘기하자.”

서둘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치는 동안 눈을 흘기는 것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리리에게 내가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다.

응접실에 들어서고 따뜻한 차를 한 잔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앉아 시큰둥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삐쳤니?”

내가 살며시 물었다.

리리의 버릇을 고쳐주려고 한 건,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리리와 잘 지내고 싶어서였다. 헤르티안과 가족이기도 한 리리에게 나쁘게 굴어서 뭘 할까.


“삐지긴 누가 삐져요?”

그녀는 고개를 획 돌리며 소리쳤다.


“내가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났니?”

“아뇨? 사람을 뭐로 보고.”

은근히 반말을 쓰면서 사람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나는 착한 새언니다. 이 정도는 봐줄 수 있었다.


“들어보니까 그때 그 여자는 대공께서 특별히 쿠르시아에서 돌려받은 영지민이라고 들었어. 같은 블란디체 사람끼리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찻잔을 들던 그녀가 잔이 깨질 정도로 거칠게 잔을 내려두었다.


“같은 영지민이요? 적국 사람인 걸 알면서 살림을 차리고 애까지 낳은 여자예요. 배신자라고요.”

“타국에 노예로 끌려간 거나 다름없어. 거기서 제대로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는 상황에서 거둬준다는 곳이 있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 놈들에게 빌붙어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리리는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새언니. 저한테도 신경 끄세요. 어차피 새언니랑 헤르티안 오빠는 진짜 부부도 아니잖아요.”

“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초야를 무사히 넘겼는데도 그녀의 눈엔 우리가 가짜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헤르티안 오빠에겐 다른 짝이…….”

그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에 집사가 들어왔다.


“마님. 상인들이 전부 도착했습니다.”

리리는 혼잣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인사도 없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리리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듣지 못했다.

나는 아연한 얼굴로 집사에게 하소연했다.


“에휴. 사춘기 소녀는 감당하기 힘드네요.”

 

***

착잡했던 마음도 마차에 쌓여 있는 약초 더미 덕에 싹 가셨다.


“마님!”

보니사의 목소리에 상인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아네트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이젠 보다시피 영애가 아니지만요.”

“제가 가업이 바빠 미처 소식을 몰랐습니다.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상인들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내가 불러 모은 상인은 총 세 가문의 사람. 어릴 적부터 병약했던 남매 때문에 오래전부터 교류가 잦았던 가문들이다.


“늘 처치 곤란이었던 약초를 이렇게나 많이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저렴하게 약초를 팔아 주셔서 감사하죠.”

나는 그들이 가진 약초 대부분을 사들였다. 그렇다고 수도의 모든 약초가 동이 난 건 아니다. 레퀴에스엔 약초 재배지가 많으니까.


“듣기로는 북부에서도 따로 약초를 기르고 있다고 하던데, 필요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건 영지민들을 위한 약초고, 이건 다른 쓸 데가 있거든요.”

“다른 데라 하시면?”

“비밀이에요.”

내가 쿠르시아인에게 약초를 팔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좋을 건 없었다.

비록 장사라고 해도 적국과의 교류 자체를 나쁘게 볼 테니까.


“그나저나 약초를 잘 말리셨네요. 상태가 좋아요.”

나는 세 개의 마차 안에 수북이 쌓여 있는 마른 약초를 매만지며 뿌듯하게 웃었다.


‘이제 이 약초들이 금덩이로 바뀔 거야.’

그때, 헤르티안이 소식을 들었는지 로비로 내려왔다.


“부인. 이게 다 뭡니까?”

몇 년 치 약초 더미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서대로 어성초, 필발, 세이지예요.”

가장 흔하지만 많이 쓰이는 약초였다.

염증을 줄이고 상처를 치료하고, 통증을 줄이는 약초들.

레퀴에서는 흔하디흔한 약초였다.

나는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이걸로 사업을 벌일 예정이에요.”

헤르티안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약초는 애초에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었다. 멜슨 남작처럼 상대를 호구로 잡아 거하게 뜯어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약초는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갑자기 사업을 벌이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헤르티안은 나를 데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과 다르게 집무실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나는 신이 난 얼굴로 헤르티안에게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예산을 보니까 매년 꽤 큰 금액이 매년 쿠르시아로 빠져나갔더라고요. 영지민 모두 구하려면 적어도 70억 이상의 돈이 필요한데, 그 큰 금액을 매번 영지의 예산에서 빼내 쓰는 건 위험 부담이 있어요. 그리고 오랜 시간 타국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영지민도 안타깝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약초로 사업을 벌인다는 말씀입니까?”

“네!”

해맑게 대답했다.

헤르티안도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겠지?


“그 문제는 부인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헤르티안의 표정은 어두웠다.


“부인이 그 짐을 짊어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대공인 저와 저희 영지의 문제입니다.”

“저도 엄연히 대공비인데요?”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이지 않습니까. 괜히 무리하셨다가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안 됩니다. 디저트를 준비하라고 할 테니 방에서 쉬십시오.”

분명 나를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라는 말이 조금 아프게 들렸다.

나는 애써 웃으며 그를 설득했다.


“사업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어요. 특별히 몸을 쓸 일도 없고요. 결재 서류가 있으면 인장을 찍어주는 게 전부예요.”

“영지를 걱정하는 마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영지의 문제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요.”

“이런 걱정은 하지 말고 부인께서는 편히 쉬십시오.”

마냥 잘 맞았던 헤르티안과 처음으로 의견이 충돌했다.

성에서 한 번 쓰러진 이력이 있으니 그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리고 헤르티안에겐 허울뿐인 대공비가 필요한 거지, 안 살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영지의 문제를 내가 해결한다고 나서는 게 이상하게 보일 법도 했다.

차마 전쟁에서 막 돌아와 업무에 치이는 그에게, 대공성에 구멍이 숭숭 뚫려 추워서 그런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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