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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하고 싶으셨습니까? (26/79)


26화 하고 싶으셨습니까?
2023.03.01.


헤르티안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절 안으신다고요?”

촉촉하게 젖은 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살짝 상기된 볼이 차례로 보였다. 그 모습에 그만 나는 다른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정말 뜨거운 초야를 보내겠다는 뜻인가?’

이상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 상상이 현실이 되듯 그가 나를 보는 눈빛에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땡땡 굴리다가 슬그머니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당겼다. 막상 눈앞에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근육을 보고 나니, 이 남자가 무성욕자인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저랑 헤르티안이 같은 침대에서 자기만 해도 초야에 소박맞았다는 소문은 안 돌 거예요. 굳이 진짜로 그, 그걸 할 필요는…….”

하지만 그마저도 이불에 가려진 내 몸을 한차례 훑는 시선 탓에 미처 끝맺지 못했다.

무성욕자라면서!

여자엔 관심도 없으면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혹시 황제 폐하께 말씀드린 손자 계획에 대한 것 때문이라면 다 거짓말…….”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서 말도 멀쩡하게 나오지 않았다.


“몸을 떨고 계시잖습니까.”

“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헤르티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밤새 추위에 떨다가는 병세가 더 심해지실 겁니다. 백작이 그러더군요. 겨울이 되면 크게 앓았던 때가 많아서 밖에 외출도 하지 못했었다고. 북부는 사시사철 추운 곳이라 이대로 잠이 들다가는 병이 악화될 겁니다.”

그가 깔끔하게 설명했다.


“초야를…… 보내자는 게 아니고요?”

내가 얼이 빠진 얼굴로 물었다.


“하고 싶으셨습니까?”

“예? 예에?”

“원하신다면 제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얼굴이 타오를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혼자 착각하고 있던 거였다.

헤르티안은 그게 웃겼는지 피식 웃다가 내 눈치를 보고 입을 가렸다.


“제 체온이 높아서 안아드리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실까 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너무 부끄러웠다.

헤르티안이 그런 말을 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쪽으로 상상해 버린 내가.


 
되레 헤르티안은 자신의 가운을 여미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았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저 밝히는 여자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가 새초롬하게 나를 흘깃거렸다. 꼭 까만 강아지 같았다.


“정말이래도요.”

“…….”

“자. 오늘 꽉 안고 자봅시다. 내일 아침에 무슨 일이 벌어지나!”

나는 이불에서 빠져나와 팔을 활짝 벌렸다.

변태가 아니라는 걸 입증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믿겠습니다.”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저희는 파트너잖아요.”

그제야 그가 거리를 좁혀왔다.


“그런데 헤르티안 체온이 그렇게 높아요?”

“만져 보시겠습니까?”

가운 사이로 탐스러움을 뽐내는 근육이 언뜻 보였다.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면 변태 같아 보일까 봐 입술만 달싹이던 찰나에, 그가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살가죽 감각에 놀라기를 잠시.


“어떻습니까?”

“따뜻해요…….”

입에서 작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온종일 찬 바람에 꽁꽁 언 손이 단번에 녹을 만큼 강한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게 보였다.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체온이었다.


“감기 걸리셨나 봐요. 아까 서재가 그렇게 춥던데, 얇은 차림으로 거기 계속 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감기에 들죠!”

나는 심각해진 얼굴이 되어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가운도 얇은 실크 재질이라 입으나 마나였다.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죠. 장작을 피웠어도 밤공기 때문에 방이 얼마나 추운데……. 내일 아침에 입 돌아가겠어요.”

헤르티안도 오랜 시간 전쟁터에 있어서 북부 생활을 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다니.

나는 그가 춥지 않도록 이불을 단단히 덮어주었다.


“전 태어나서 감기에 걸려본 적 없습니다.”

“몸에 열이 펄펄 끓어요.”

“원래 체온이 높은 편입니다.”

“뜨거울 정도인데?”

“부인의 체온이 낮아서 상대적으로 더 높게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어느새 호칭을 부인으로 바꿔 부른 그가 제 쪽으로 쏠린 이불을 내게 덮어주었다.


“그런 거라면…….”

그의 품 안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 따뜻한 품이라면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를 안으려니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유교 사상이 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계약 결혼한 사이인데 진짜 부부라도 된 듯이 끌어안고 자다니. 하지만 아무 일도 없을 텐데? 그냥 온기만 나눠 갖자는 건데? 그것도 욕심인가?

짧은 순간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헤르티안이 말했다.


“부인의 건강을 위해서일 뿐입니다.”

이미 답은 나왔다.

인간 난로인 그를 거부할 여유는 없었다.

그럼 잘 먹겠, 아니…….


“잘 부탁할게요.”

기다렸다는 듯이 넓은 품 안에 폴짝 뛰어들었다.

그는 가뿐하게 나를 품에 안아 든 채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두툼한 이불까지 덮자 순식간에 체온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 따뜻하다.’

몸이 노곤해진다. 손이 저절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손이 차가워서 그런지 새로운 곳에 닿을 때마다 그가 움찔거렸다.

그게 미안해 손을 빼낸 뒤 그의 가슴에 살짝 기대 누웠다. 내내 찬 공기를 맞았던 얼굴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역시 헤르티안은 어디 아픈 게 분명해요.”

소리는 그의 가슴에서 들려왔다.

쿵쾅쾅쿵쾅.

뚫고 나올 기세인 심박 소리. 체온과 마찬가지로 그 소리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세상에.”

나는 기함을 치며 그의 품에서 멀어져 그를 보았다.


“안 아프기는요. 부정맥이 있잖아요.”

“부……정맥이요?”

“심장이 빠르거나 느리게 불규칙하게 뛰는 병이에요.”

몸에서 열이 오르는데 정상일 리가 없지.

손을 살짝 올려놓아도 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다가 헤르티안이 먼저 죽을 수도 있겠다.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이 정도면 자신도 알았을 것이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한 5년쯤 됐습니다.”

5년 전이면 대공 자리를 막 물려받았을 때잖아.

정신없이 전쟁에 끌려 나가 미처 치료할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가주 자리를 물려받고, 황후의 견제 또한 심했었으니까. 아픈 곳이 있어도 약점이 잡히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


‘불쌍한 남자 같으니라고.’

자세히 보니 단단한 몸엔 자잘한 흉터로 가득했다. 대공이면 무얼 하나. 이렇게 넓은 성에서도 상처를 봐줄 사람 하나 없는데.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이 복받쳐 올랐다.


“제가 내일부터 부정맥에 좋은 약 드릴 테니까 꼭 챙겨 드세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바보같이 빙긋 웃었다.

앞으로는 내가 챙겨줘야겠다.

***

밤이 무르익고 새벽이 지나 어느새 동이 틀 무렵이었다.

고요한 방 안엔 옅은 숨소리만 작게 울려 퍼졌다.

헤르티안은 팔 위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새벽 내내 보았건만 전혀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똑하게 튀어나온 이마 밑으로 보이는 옅은 속눈썹. 꿈에서 맛있는 마카롱을 먹기라도 하는 듯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이 야무졌다.

꿈인가 싶어 톡 건드려 보면 얼굴을 쓱쓱 비비기도 한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자신의 품에 아네트가 누워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벅찬 기분에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여느 때처럼 그녀와 했던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러다 아까 일이 떠올라 제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보았다.


“부정맥이라고 했지?”

아네트의 말대로 평온했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 아네트의 편지를 읽었을 때의 두근거림과는 차원이 다른 박동이었다.

이 정도면 의심할 법도 한데, 아네트는 이걸 병이라고 착각했다.


“언제쯤 눈치채려나.”

물론 그마저도 즐거웠다. 조금씩 다가가다 보면 그녀의 심장이 그와 같은 속도로 뛸 날이 올 테니까.

그때 침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하녀가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다 침대맡에 앉아 있던 헤르티안의 맨살을 보고 화들짝 놀라 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나중에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밤새 아네트가 따뜻하다며 가운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가운이 반쯤 벗겨진 탓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나체였다는 사실을 인식한 그가 가운을 다시 걸쳐 입으며 쿡쿡 웃었다.


“난 먼저 나갈 테니 부인은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마.”

“알겠습니다.”

헤르티안은 딱 달라붙어 칭얼거리는 아네트를 겨우 떼어내곤 방 밖을 나섰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하녀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홧홧해진 얼굴에 손부채질하는데, 이번에는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침대를 차지한 거대한 애벌레 때문이었다.


“마…… 마님?”

추울까 봐 헤르티안이 이불로 둘둘 감아둔 아네트였다.

***

대공성은 오랜만에 하녀들 목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초야를 치른 젊은 대공 부부의 소문이 여기저기 퍼졌다.


“글쎄 동이 틀 때까지 붙어 계셨는지 아침에 문을 열고 들어간 하녀가 맨살을 다 봤다잖아.”

“밤새 우셨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으시더래.”

“두 분 사이가 좋으셔서 다행이야. 마님께서 보통 예쁘셔? 수도에서도 내로라할 만큼 아름다우시지.”

“마님은 어떤 분이셔?”

모두의 관심사는 그쪽이었다. 새로 온 마님에 따라 성 분위기가 휙휙 변하고는 하니까.


“음……. 구김 없으시고 마냥 행복해 보이셔.”

하녀는 아네트를 떠올리며 얘기했다. 얼굴에 수심 하나 없이 해맑은 미소를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리리 아가씨처럼?”

“그래, 리리 아가씨처럼. 그나저나 주인님께서 새로운 드레스 스무 벌을 보내셔서 그거 가져가다가 어깨도 삐끗했다니까.”

“스무 벌이나?”

“뻔하지 뭐. 리리 아가씨처럼 한 번 입은 옷은 다신 안 입으시겠지.”

특별히 나쁜 의도는 담겨 있지 않았다. 으레 귀족이라는 게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도 한 번에 드레스 스무 벌은 심했네. 그게 돈이 다 얼마야.”

“뭐, 주인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물론 조금의 텃세는 있었다.

***



“춥다.”

헤르티안의 품이 사라지니 여전히 이곳은 겨울왕국이었다. 그나마 따뜻한 방을 떠나 성을 돌아다닐 때면 드레스 자락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다리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오늘도 성을 떠돌았다.


“리리가 밖에 나갔다고?”

“집사님 말로는 조금 전에 밖에 나가시는 걸 봤대요.”

리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리리는 블란디체 방계 가문의 딸이다. 전대 대공의 사촌 조카로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대공성에서 살았다고 한다. 원작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는 없기에 나도 아는 것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아니다. 한 가지 더 알고 있다.


“얘는 춥지도 않나?”

리리도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성 밖에 나갈 생각을 하겠나.

육안으로 보기에도 거센 바람이 부는 밖은 사람이 발 디딜 곳이 아니었다.


“리리……. 꼭 밖에 나가야 했니?”

내기에서 진 걸 알고 밖으로 도망친 게 분명했다.


“마님. 기사들을 불러 찾으라고 할까요?”

“아니.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는 허연 김을 내뿜으며 성 외벽을 따라 걸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성 한 바퀴를 꼬박 돌아다닌 셈이었다. 리리가 멀리 나갔나 싶어 걱정이 들려던 때였다.

짝.

살갗이 부딪혀 찢기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멀찍이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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