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결혼식
(24/79)
24화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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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결혼식
2023.02.22.
‘결혼하기 좋은 날씨네.’
해가 맑았다.
눈을 뜬 지는 한참 지났지만, 느지막이 맞는 아침 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가씨! 혹시라도 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시거나 하면 안 돼요!”
베티는 퀭한 눈으로 내 치장에 온 힘을 보탰다.
그 덕에 나까지도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른 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신부 대기실에 내가 있었다.
“아네트. 이 아비 말 잘 들어라. 자고로 남자는 낮보다 밤에…….”
그리고 내 앞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애한테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제 알아야 할 나이가 아니오.”
“나이는 지났죠. 교육에 관심 있으셨으면 진작 하시지.”
어머니의 구박에 아버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추우면 병이 나빠지니까 꼭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엄마는 줄곧 내 건강을 걱정했다.
“안 그래도 보니사랑 겨울옷 잔뜩 만들어 뒀어요.”
“춥지 않게 난로도 계속 피워달라고 하고.”
“그럴게요.”
엄마 품에 안기니 그간 내게 벌어진 일이 멀게 느껴졌다.
“아, 엄마랑 같이 자고 싶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아비는 빼놓고?”
“당연히 셋이 같이요.”
아버지의 단단한 품에 안기니 내 마음도 조금 단단해졌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타지에서도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두 분마저 떠난 신부 대기실 밖으로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모르는 귀족들.
그리고 주변으로 보이는 화려한 결혼식 장식이 눈에 띄었다.
“가성비 좋은 업체였구나.”
고작 2천만 골드의 예산으로 이 정도 규모의 결혼식을 완성도 있게 꾸며 놓았다.
전혀 부족함 없는 식장이었다.
멀찍이 블란디체 가문의 마차가 보였다.
‘결혼식이 끝나면 북부로 가겠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추운 북부.
센 척했지만, 막상 다가온 현실 앞에선 한없이 작아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가씨.”
신부 대기실에 꼬마 손님이 들어왔다.
“럭키?”
꾸벅.
작은 몸을 구부려 인사하는 저 10살짜리 아이는, 엄마가 3년 전부터 후원하는 어린 미술가인 럭키였다.
“럭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아네트 아가씨. 안녕하세요.”
포동포동한 볼때기와 귀여운 멜빵 차림에 세트로 맞춘 빵모자.
오랜만에 만난 럭키는 그때보다 훨씬 얼굴이 좋아졌다.
“오늘 널 볼 수 있다니. 이건 내 인생의 럭키야.”
“또 유치하게 제 이름으로 놀리시는 거예요?”
“히히. 럭키. 네가 여기 와줘서 나 너무 기뻐.”
난 이 귀염뽀짝한 럭키를 좋아했다.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그림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럭키를.
“네. 부인께서 늘 챙겨주셔서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그림도 많이 그렸어요.”
“그동안 바빠서 얼굴을 못 봤던 거였구나.”
나는 무거운 드레스를 끌고 일어나, 럭키 앞에서 눈높이를 맞춰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가 결혼하신다고 해서 부인께서 저를 초대해 주셨어요. 맛있는 음식이 많으니 배불리 먹으라고도 하셨어요.”
“맞아. 온 김에 맛있는 것 싸가서 동생이랑 같이 먹고 그래.”
럭키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통통한 볼에는 복숭앗빛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럭키가 들고 들어왔던 커다란 액자를 건넸다.
“결혼 선물이에요.”
“정말?”
그림은 빳빳한 종이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공들여 그렸을 텐데. 정말 날 줘도 괜찮은 거야?”
“아가씨께 감사를 담아 그렸어요. 저야 작품 하나쯤은 금방 그리니까요.”
럭키가 좁은 어깨를 펴곤 말했다. 그가 얼마나 그림에 진심이고 공을 들이는 줄 아는 나는 처음 받아보는 그림 선물에 감동이 밀려왔다.
“럭키. 고마워. 내 방에 전시해 놓을게.”
“좋아요.”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나는 이제 가 봐야겠다.”
이제 나갈 시간이었다. 나는 럭키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춰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럭키가 내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잡았다.
“아네트 아가씨.”
“응?”
럭키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드레스의 끝자락에 시선이 닿아 있었다.
“조심하세요.”
“어떤 걸? 아, 드레스? 고마워. 잘 잡고 가야겠다.”
바닥에 닿은 드레스 자락에 걸려 넘어질까 걱정이 된 모양이다.
“드레스 말고, 대공님이요.”
대공님?
“블란디체 대공님을 왜 조심해야 할까. 혹시 대공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러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 실제로는 좋은 분이시거든.”
전쟁광이라 불리는 대공이라 겁이 났나 보다.
나는 그런 귀여운 럭키를 보고 말했다.
“대공님을 좋게 봐줬으면 좋겠어.”
“아가씨랑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래요. 조심하세요.”
럭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어디서 이상한 가십이라도 본 건가.
아니면 헤르티안을 직접 만났나?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면 헤르티안이 거대하게 느껴져서 무서웠을 수도 있었다.
“아가씨 행복하게 사세요.”
“아 참, 럭키.”
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럭키를 불러세웠다.
“마지막으로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
***
잭슨은 부하 앞에서 눈물을 터트릴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완벽한 결혼식이야.”
얼마 전, 잭슨은 큰 변화를 겪었다. 아네트가 준 방법 덕분에 손에 있던 작은 상처가 사라진 것이다. 손톱은 매끈하고 피부는 고와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결혼식 준비에 사활을 걸었다.
결혼식은 더없이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며칠 밤을 꼬박 새 준비한 보람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잭슨은 멀찍이서 결혼식장을 한 바퀴 훑었다.
“폐하께서 준비에 힘을 써주신 모양이에요.”
“음식도 마음에 들어요.”
그러다 가끔 들리는 칭찬 소리에 코를 쓱쓱 문질렀다.
그는 자신을 칭찬하며 칭찬 소리를 찾아 헤맸다. 입이 귀에 걸릴 때까지 돌아다닌 끝에 익숙한 남자를 보았다.
“황자?”
알아보자마자 미간이 팍 구겨졌다.
잭슨도 헤르티안의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저 꼬마는 누구지.”
세르디스는 작은 꼬마 아이와 대화 중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단조로운 옷을 입고 온 아이였다.
아이는 그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고 세르디스는 웃으며 아이 머리를 헝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봉투인데…….”
노란색의 봉투는 떠오를 듯 말 듯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 디저트 별로다.”
하지만 기억은 하객의 싫은 소리 하나에 날아가 버렸다.
“디저트가 어디가 어때서요?”
“쿠키가 딱딱해요.”
“그럼 쿠키가 딱딱하지, 말랑하답니까?”
***
결혼식은 눈 깜빡할 새에 끝이 나 버렸다.
결코 대충 올린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의심 가득한 결혼이겠지만, 누가 보아도 사랑하는 연인의 축복 받은 예식이었다.
웬일인지 세르디스의 방해 또한 없었다.
나는 가족들과 짧은 인사를 끝으로 블란디체 영지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장대한 행렬이 줄을 이어 우리 뒤를 따랐다.
마차 안에 딸린 작은 창문 밖으로 수도가 멀어져 간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가.”
원래 내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떴다. 그날처럼 세상이 바뀌어 새로운 차원으로 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편지는 제대로 전달됐겠지?”
결혼식장에서 편지를 받아, 카시안에게 급히 답장을 보낸 게 마음에 걸렸다. 카시안은 내가 만나자는 물음에 언제 어디가 좋을지 물어보았다. 꽤 긍정적인 답변이어서 급하게 답장을 보낸 게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그때, 마차가 멈춰서고 헤르티안이 들어왔다.
그는 작은 컵에 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미리 챙겨온 차입니다.”
캐모마일 차였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가 이걸 줬었지.
찻물은 식었지만 그윽한 차향은 진하게 남아 있었다.
“고마워요.”
“마시고 한숨 주무십시오. 북부까지 가려면 오래 걸립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에 자주 옵시다.”
“정말요?”
“영애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그가 남아 있었다.
“헤르티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한 결혼이라지만 좋은 파트너였다.
***
차디찬 바람이 살갗을 스치자 몸이 바르르 떨렸다.
“북부는 일 년 내내 춥다더니 진짜네.”
옷을 겹겹이 여며 입었는데도 찬 바람은 예리하게 천을 뚫고 들어왔다.
“근데 실내까지 이렇게 추운 건 심하지 않나?”
방 안에서도 하얀 입김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석재로 이루어진 대공 성 곳곳에 구멍이라도 숭숭 뚫린 모양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께 선물하신 드레스입니다. 이제 이 드레스로 갈아입으시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꼬장꼬장해 보이는 시녀장 코에서도 은은한 콧김이 나왔다. 저 얇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다간 필시 감기에 걸릴 텐데 말이다.
“그런데 드레스라니?”
시녀장은 가져온 드레스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옷가지를 꺼냈다. 노란 금잔화 무늬가 수놓아진 시폰 재질 드레스였다.
“지금 이걸 입고 밖에 나가라고?”
시녀장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대공비 전하께서도 마음에 드시는군요. 대공 전하께서 심사숙고하시고 제가 여러 번 확인 했으니 당연히 마음에 드실…….”
“못 입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예?”
그러자 그녀의 올곧은 자세가 삐뚤어졌다.
“그냥 이거 입고 나갈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내해줘.”
분명 디자인인 내 취향이었다. 평소 내가 입고 다녔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에다가 독특한 금잔화 무늬까지 훌륭했지만. 저걸 입고 나갔다간 이곳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콧물만 훌쩍이다 들어올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토끼털로 만든 망토를 단단히 여며야 했다.
***
결혼식에서도 달리 친지라고 할 사람이 없어 예상은 했다만, 예상보다 저택은 더 황량했다.
르앙베리아 백작저와 비교하면 몇 배는 커다란 성이었다.
‘전대 대공이 그나마 가족이었을 텐데.’
성 곳곳에는 전대 대공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헤르티안은 작위를 받자마자 전쟁을 나갔으니 그가 미처 재정비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집사의 오랜 안내를 따라 대공성을 걸어 다녔다. 달리 난로가 없는 대공성의 내부는 더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편하게 성을 둘러보시고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저를 찾아 주시지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집사가 뒤를 돌자마자 주룩 흘러나오는 콧물을 닦았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안 춥나 봐.”
멀어지는 집사 또한 얇은 셔츠에 가벼운 조끼 차림이었다. 이런 추위에는 단 몇 분도 버티지 못할 옷차림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 곧장 훈기가 흘러나오는 방으로 향했다.
“여기가 누구 방이랬더라.”
집사가 설명해 준 것 같은데, 추워서 팔뚝을 비비느라 미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밀려드는 오한에 일단 노크부터 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문고리를 돌렸다.
“몸만 녹이고 갈게요.”
안은 복도에 비하면 찜질방이었다.
나는 바짝 얼어 있던 피부가 녹는 걸 체감하며 벽난로 앞에 이끌리듯 다가갔다.
“살 것 같네…….”
장작을 감싸는 빨간 불씨를 보니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춥지만 않으면 살 만할 텐데.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그때, 등에서 따가운 감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