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수상한 약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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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수상한 약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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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수상한 약병
2023.02.15.
정교하게 세공된 금색 석조를 따라 호화스러운 예술품이 줄을 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고급원단을 쓴 옷을 입은 시종을 따라간 곳은, 황궁의 어느 만찬장.
가장 상석에 앉은 이의 눈빛이 막 들어선 나를 압도했다.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세르디스와 똑 닮은 황제가 호탕하게 웃자, 목까지 닿는 금발이 한 차례 찰랑거렸다.
“영애를 다시 볼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아들의 짝으로 다시 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특유의 묵직한 음성이 퍼졌다. 확실히 알현실에서 나를 만났을 때보다 누그러진 말투였다. 덕분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황제의 근처에 앉았다.
“절 가족으로 만나니 더 좋으시지요?”
황제의 붉은 눈이 나를 응시하더니, 곧 눈매가 자상하게 휘었다.
“그래, 더 좋구나! 하하하.”
“폐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제를 시아버지를 둔 나와, 빙의자를 며느리로 둔 황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황제의 옆에서 눈웃음만 짓고 있는 여인.
진녹색의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눈매까지 따라 올라가, 조금 무서운 인상을 가진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르앙베리아 백작가의 영애 아네트입니다.”
세르디스의 모친인 황후였다.
연회 때 멀찍이서 본 걸 제외하면 정식으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들었던 것보다 아름답네요. 영애.”
카랑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황후 폐하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예쁜 사람이 말도 예쁘게 하지.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길래 그렇게 곱죠?”
“딱히 하지 않는다고 하면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만 공유해요.”
황후는 너스레 좋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헤르티안이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일이 있어 늦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세르디스가 들어왔다.
“다행이다. 늦진 않았죠?”
이젠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를 만나는 게 익숙해졌다.
게다가 이곳은 세르디스의 본거지인 황궁이니까 한 번은 만날 것 같았지.
한 가지 다른 점은.
“너도 이제 왔냐? 대공이라고 바쁜 척하면서 안 올 줄 알았더니.”
불과 며칠 전과 다르게 그가 평소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화가 난 것도, 애처로운 얼굴도 아닌, 입가에 애교스러운 미소를 건 채로.
황당한 그 모습을 보던 헤르티안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청첩장을 당장 찢을 기세였는데 오늘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싱글거렸다. 무언가 다른 의도로 이곳에 나온 게 분명했다.
나는 헤르티안과 짧게 눈을 마주쳤다.
그도 대충 내 뜻을 눈치챈 듯했다.
“처음으로 다 같이 모여서 식사도 하네요.”
세르디스는 황후 옆, 내 맞은편에 앉아 나를 보고 밝게 웃음 지었다.
저런 순수한 눈빛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팔에 소름까지 돋았다.
“아네트,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내 귀가 막혔나.
뭘 축하해?
불과 엊그제만 해도 남들 앞에서 지지리 궁상을 떨었던 세르디스가 결혼을 축하한단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황자 전하께서 축하해주셔서 더 기쁜 결혼식이 되겠어요.”
일단 웃자.
나는 잇몸이 보이도록 훤히 웃었다.
“당연히 축하해야 할 일이지. 정략결혼도 아니고 둘이 사랑해서 하는 결혼인데.”
설마 이걸 노린 걸까?
“네, 갑자기 불타오른 사랑이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불타오를 수도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야.”
그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오늘 나타난 이유를 대충은 알겠다.
그는 우리가 진짜 연인이라고 믿지 않는다.
내가 계약 결혼할 남자를 찾은 이력이 있으니 말이다.
“근데 왜 내 눈엔 두 사람이 억지로 결혼하는 것 같지?”
그래서 우리가 계약 결혼임을 밝힐 생각인 거다.
“세르디스.”
바로 황제의 앞에서.
“아니, 보기가 그렇다는 거예요. 다른 연인들 같아 보이지 않아서요.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둘 사이에 벽이 있는 것 같달까. 마치 필요에 의해 계약 결혼이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그가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괴자, 황제가 그의 주둥이를 저지했다.
“계약 결혼이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냐.”
“아, 아버지께선 모르겠다. 저도 들은 이야기예요. 가문에서 정해준 정혼자와 결혼하기 싫어하는 젊은 영애나 영식들이 합의 하에 연인인 척 계약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쾅, 하고 황제의 손이 테이블과 맞부딪혔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냥 그런 것도 있다는 말씀이에요. 아네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이른 가문의 영식을 만났다는 소리를 들어서. 혹시 그게 싫어서 급하게 결혼했나 했죠.”
나는 속으로 백 번은 외쳤다.
제발, 그 입 닥쳐!
새신부 앞에서 다른 남자랑 데이트했다는 걸 밝혀야만 속이 시원했냐!
“그렇다고 널 의심하는 건 아니야. 아네트.”
시원했나 보다.
그리고 덕분에 황제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영애. 황족과 결혼해서 이혼의 오점을 남길 생각은 아니겠지?”
단숨에 싸늘해진 목소리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간사하고 단순한 수법에 내가 당할쏘냐.
“황제 폐하. 얼른 손자 보게 해드릴게요.”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담백하게 외쳤다.
“손……자?”
“네, 지금 이 기세면 신혼을 즐길 틈도 없을 것 같아서 고민이라니까요.”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하겠나.
손자를 안겨주겠다는데.
세르디스가 무슨 짓이든 하는 것처럼 나도 못 할 말은 없었다.
“아이를 낳겠다는 말이더냐?”
제대로 먹힌 모양인지 황제의 표정이 단번에 풀렸다.
“그게 부부의 당연한 도리니까요.”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황제와 헤르티안을 번갈아 보았다.
세르디스는 손주 얘기가 나오고 더는 반박할 말을 고르지 못한 모양이다. 고작 말로도 날 이기지 못할 거면 왜 덤빈 거야.
***
짧고도 긴 만찬이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이 되었다.
세르디스에겐 재정비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만찬장을 빠져나와 구석진 곳에서 그의 시종을 만났다.
“황자 전하. 만찬은 잘 치르셨습니까?”
그의 전담인 시종은 연신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니.”
하지만 대답과는 반대로 세르디스는 전혀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고작 몇 마디로 아네트가 당할 거라는 생각은 없었지. 나 때문에 헤르티안 놈이랑 결혼까지 한 앤데.”
“쉬운 분은 아니시지요.”
“됐고, 내가 말한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시종은 품 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번에도 실수하면…… 알지?”
“절대 실수는 없을 겁니다. 나오기 직전, 제가 궁인들에게 시험하고 나왔습니다.”
시종은 목소리를 낮추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이걸 먹고 복통에 시달려 끙끙 앓아누워서 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일어났습니다.”
“몸에 이상은?”
“의원을 불러 진찰하라 했더니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
세르디스는 손에 들린 약병을 흥미로운 눈으로 훑었다.
“몸엔 이상이 없지만, 몸엔 고통을 주는 약이라…….”
그가 딱 찾던 물건이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다시 시종에게 약병을 건넸다.
“딴 사람 말고 딱 아네트가 먹을 찻잔에만 발라두라 전해.”
“네. 황자 전하.”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침을 꼴깍 삼킨 시종은 굳은 열의를 다지며 돌아섰다.
그게 세르디스가 진짜로 오늘 나온 이유였다.
***
황궁에서의 만찬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음식도 수준급이고, 무엇보다 세르디스도 아까 이후론 얌전했기 때문이다.
‘슬슬 시비 걸 때가 됐는데…….’
나는 후식으로 나온 마카롱을 우적거리면서 그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세르디스는 정말 포기라도 한 건지 여유롭게 차를 즐겼다.
“아네트 영애는 마카롱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벌써 네 개나 먹었어요. 귀엽기도 하지.”
황후가 나를 지긋이 보며 나긋하게 웃었다.
틀렸다. 다섯 개째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여태 먹었던 마카롱 중에 최고라 나도 모르게 계속 손이 가버린 탓이다.
황궁 파티시에 나와 보라 해!
“맛이 너무 좋아서 그만…… 자중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잘 먹는 모습이 그저 보기 좋았답니다.”
나는 황후에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너도 좀 먹지 그러니? 아까부터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있기는.”
그런데, 불똥이 내 옆에 있던 헤르티안에게 튀었다.
나와 달리 헤르티안은 이 자리가 퍽 불편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헤르티안을 이 황궁에서 내쫓은 이가 바로 황후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기사인 대공 밑에서 숨죽여 살았고, 대공이라는 방패막이 사라진 후엔 전쟁터로 피신을 다녀야 했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혹시나 나까지 데면데면하게 굴다가 헤르티안에게 화가 미칠까 가만히 있었는데.
“왜? 내가 네 음식에 독이라도 탔을까?”
기어코 황후가 헤르티안을 건드렸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대답도 안 하는 것 봐. 이런 자리에서까지 어머니 대접을 바란 내가 잘못이지.”
무사히 지나치길 바랐는데, 결국 터져버렸다.
“황후. 그만하시오.”
가만히 지켜보던 황제가 나서서 황후를 말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모양인지 헤르티안이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황후께서 독처럼 뻔한 수법을 쓰셨겠습니까?”
서늘한 그의 안광에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17년 전 쓰던 수법이랑 지금이랑 같아서 되겠습니까? 명색에 황후라는 사람이.”
그의 입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가 말하는 이가 헤르티안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후가 헤르티안의 어머니를 독살했다는 말이었다.
“지금 내가 독을 써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거니? 그래?”
“아니면 아니라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물론 믿는 것과는 별개니까.”
“너!”
기분 나쁜 말투에 황후가 소리치자, 그는 포크를 들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대리석과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따갑게 울려 퍼졌다.
“식사는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겁니다. 제가 비위가 약해서.”
거친 그의 말투가 낯설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헤르티안의 과거가 얼마나 깊고 어두웠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감쌌다. 조금의 떨림도 없는 단단한 손이었다.
“저희는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난 이 자리를 뜨기로 했다.
더 있다가는 헤르티안의 살기가 뻗어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제도 차마 가지 말라고 붙잡지 못했다.
“가요, 헤르티안.”
그렇게 막 헤르티안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던 때였다.
“어머니.”
듣고만 있던 세르디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괜한 말로 헤르티안을 자극하지 않기를 빌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잘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화살이 향한 곳은 황후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