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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카시안이 영애를 좋아하나 봅니다 (20/79)


20화 카시안이 영애를 좋아하나 봅니다
2023.02.08.


보니사의 힘찬 음성이 나를 돌려세웠다.


“더 볼일이 남았니?”

“저 그냥 가면 되는 거예요?”

우물쭈물 묻는 말에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가.”

“왜…… 왜요?”

그녀는 이 상황이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그냥 집에 가라니. 내가 봐도 너무 많이 봐주긴 했다.


“돈을 한 푼도 치르지 않았는데요……?”

“네가 만든 태피스트리로 치렀다고 말했잖아.”

“말도 안 돼요. 이 태피스트리는 비싸 봐야 20골드 남짓인데 아가씨의 드레스는…….”

보니사는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값을 직접 말하면 내가 이 일을 무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마치 빙의 전, 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병실에 틀어박혀 살던 어느 날 내게 나타나 수술비를 지원하고 싶다고 했던 익명의 후원자를. 나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그 사람을 보고 욕했다. 돈이 남아돈다고. 하지만 수술을 하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간절하게 살고 싶었지.’

수술비를 생각해서라도 버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핑계 삼아서라도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값으로 따져보면 그렇겠지.”

“그런데 왜…….”

보니사에게도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단지 그것뿐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해 봐.”

모르면 어쩔 수 없고.

아마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평생 벌어도 못 갚을 금액을 단번에 갚았으니까.


“덕분에 결혼할 곳이 무척 춥다던데 잘 되었지. 이걸 갖고 가면 되겠다.”

나는 태피스트리를 보며 덧붙였다. 헤르티안에겐 미안하지만 사람 하나 살렸다고 생각해야겠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때 보니사가 외쳤다. 저택 로비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녀는 아까와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아가씨가 가실 곳으로 저도 데려가 주세요!”

무언가 열망하는 눈빛으로.

이제 뭔가 하고 싶은 의지가 생긴 건가?


“노예는 죽어도 싫다며. 나를 쫓아와서 무슨 소리를 늘어놓으려고.”

“아가씨 곁에서 일하게 해주세요. 무슨 일이라도 열심히 할게요. 맡겨만 주세요.”

나는 한달음에 다가온 그녀를 보고 옅은 웃음을 흘렸다.


“에휴. 알아서 해.”

껌딱지가 하나 붙었다.

***

오랜만에 만난 헤르티안에게 나는 사과부터 건넸다.


“미안해요. 당신이 기껏 골라 준 드레스가 망가졌어요.”

미안한 마음에 그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유지한 채 물었다.


“어쩌다 망가졌습니까?”

“너무 예뻐서 집에서 입고 돌아다니다가 그만 미끄러운 줄도 모르고 넘어졌어요. 엉망이 되어서 못 입게 되었어요.”

보니사의 일은 비밀로 부쳤다. 이미 내 선에서 해결했으니까.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그럼 된 겁니다.”

그는 화를 내지도, 따지지도 않고 온화한 미소만 지었다.


“영애가 즐거웠다면 그걸로 제 드레스 값은 다 한 겁니다.”

헤르티안은 천사인 게 틀림없었다. 감동을 한껏 받은 내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울지 마세요. 제가 또 예쁜 드레스를 맞춰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사람이 진국이다. 진국이야.

그 뒤로는 헤르티안과 마주 보고 앉아 결혼식에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리할 건 모두 정리했다. 이제 결혼식만 남아 있었다.

할 일이 다 끝나고, 나는 책상에 앉아 연노랑색 편지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가 내 옆에 서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런데 지금 뭘 적고 계십니까?”

“제 친구에게 보낼 편지요. 제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직접 전하고 싶어서요.”

“보는 게 불편하시면 보지 않겠습니다.”

편지라는 얘기에 그는 매너 있게 한 걸음 물러났다.


“음. 엄마 아빠도 모르는 거긴 한데 헤르티안이랑 저는 한편이니까 특별히 보여드릴게요.”

아직 편지지엔 받는 사람 이름만 적혀 있었다.


“카시안? 영애께서 소중하다고 했던 그 사람 아닙니까?”

“네, 맞아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째서 영애께서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제 유일한 친구거든요. 홀로 힘들어할 때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그중에서 끝까지 곁에 남아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리안이 죽고 모두가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넸으나, 카시안처럼 끝까지 내 곁에 남아 있던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이해한다.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고 슬퍼하는 건 힘든 일이므로.


“그래서 항상 고마우면서 미안했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은데 필요한 건 없다고 하고. 그렇다고 편하게 만나서 차 한잔할 수도 없었거든요.”

“제가 편지를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저번부터 그는 카시안에게 흥미가 많아 보였다.


“대부분 일상 내용이지만 읽어 보세요.”

나는 손에 집히는 편지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그가 카시안이 보낸 편지를 읽어 내린다. 크게 걸리는 내용이 없는데도 왠지 신경이 쓰였다.


“이분도 영애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이상한 말을 건넸다. 카시안이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나는 풋 웃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에이.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영애는 그렇게 생각해도 이 사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편지를 계속 보낼 만큼 한가한 남자는 없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정말 남자들은 그런가?


“하지만 카시안이랑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인걸요.”

그가 낮게 웃었다.


“상대는 영애를 알았으니 편지를 보냈겠죠.”

나는 물끄러미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한가득 쌓인 편지 더미들.


‘카시안이 나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사물함에 놓여 있던 편지를 보았을 때. 다른 남자 애들이 보낸 것처럼 러브레터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이야기해보지 않았는데.


“영애께서 눈치 못 채실 정도로 소심한 남자인가 봅니다. 무척 신중하고.”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나 여태껏 날 좋아하는 사람이랑 편지를 주고받았던 거야?


“만, 만약에 헤르티안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카시안에게 결혼한다고 보내면 상처겠죠?”

말이 버벅거리며 나왔다.


“영애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혼란스러워 하는 내게 헤르티안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만약 이분이 영애께 청혼한다면 저를 버리시겠습니까?”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를 좋아하는 카시안이 내 사정을 알고 기꺼이 결혼해준다고 한다면 나는…….


“버리지 않아요.”

그래도 헤르티안을 선택할 것이다.

그는 내게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까.


“……그렇군요.”

헤르티안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분명 그가 원하는 답을 주었는데도 낯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

웅장한 만큼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이 보였다.

외벽과 건물 벽지의 짙은 보랏빛이 어둠이 내린 비올렛의 머리카락을 연상케 했다.

샤르페넌 공작가.

이곳이 결혼 전, 내가 마지막으로 찾은 장소였다. 날 도와준 비올렛에게는 직접 청첩장을 전해주고 싶었다.


“비올렛 공녀님. 잘 지내셨어요?”

그리고 저택과 퍽 잘 어울리는 여인이 나를 보고 달려왔다. 그녀는 기쁘게 내 손을 맞잡았다.


“아네트 영애, 그간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잘 지냈어요. 저택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늦게 초대해서 내가 미안하죠.”

공작저의 주인이지만 사생아라는 이유로 입지가 좁은 비올렛에게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들어와요.”

비올렛의 웃음은 새벽이슬이 맺힌 꽃처럼 아름다웠다.

내가 남자였다면 비올렛에게 반했을 만큼 어여뻤다.


‘내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구나.’

그리고 이 사실만큼 기쁜 일이 없었다.


“그때 마차를 빌려주시고, 절 도와주셨는데 먼저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나는 황제를 알현하러 갔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세르디스의 방해 공작으로 황제와 제대로 이야기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저는 은혜를 갚은 것뿐인데요, 뭘.”

비올렛은 그저 반갑고 기껍게 웃을 뿐이었다.


“공녀님. 그보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나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 밝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요?”

“잠시만요.”

비올렛에게 전해주기 위해 들고 왔던 하얀 종이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연분홍 실링에 찍혀 있는 벨라돈나 꽃은 르앙베리아 백작가의 문양이었다. 내게서 봉투를 건네받은 비올렛는 성급하게 봉투를 열지 않고 내가 설명해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저 결혼해요. 공녀님.”

어여쁜 눈동자가 커졌다.


“네? 아네트 영애.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는데.”

워낙 사교계에 친한 이가 없는 그녀니 모를 만도 했다.


“청첩장이에요. 열어보세요.”

아마 비올렛는 겉으로는 밝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세르디스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많이 속상했을 거다.

공녀 신분이라 황자비가 될 가능성이 컸지만, 실세인 세르디스의 선택이 절대적이기도 하니까.

거기서 나를 지목한다면 입지도 지지도 없는 비올렛는 어쩔 도리가 없었을 터다.

하지만, 내가 결혼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지지.


“청첩장이라니. 당황스럽습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이 사람이면 안 될 것 같아서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어요.”

갈대처럼 흔들리는 비올렛의 눈빛은 내 얼굴에서 청첩장으로 향했다.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시죠? 열어보세요.”

멀찍이 서 있던 하녀가 가져다 놓은 편지 나이프로 실링을 곱게 걷어낸 그녀가 안에 있는 연분홍색 청첩장을 꺼냈다.

살랑, 청첩장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 햇빛이 들었다.

청첩장을 침착한 얼굴로 읽어 본 그녀는 헤르티안의 이름을 발견했는지 종이를 얼굴 쪽으로 바짝 들이밀어 확인했다.


“블란디체 대공님이요?”

“네. 맞아요.”

“대공님은 2년 동안이나 전쟁터에 나갔다가 얼마 전에 돌아오셨다던데.”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실제로 헤르티안은 대공 작위를 받고 나서 2년 동안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수도에는 발도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첫눈에 반했답니다.”

이제는 능숙하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아.”

비올렛이 옅은 탄식을 흘렸다.

당연히 세르디스가 아닌 상대와 결혼이니 그녀가 축하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공녀님?”

“흐윽…….”

은방울 꽃 같은 그녀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너무 기뻐서 그만…….”

처음 봤을 때의 고상함은 어디 가고 코까지 훌쩍 거리며 눈이 벌게져라 울었다. 나는 품에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머뭇거리더니 이내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비올렛이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저도, 저도 비결을 알려주세요. 첫눈에 반한 상대와 결혼이라니. 솔직히 부러워요, 영애.”

정말 귀여운 공녀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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