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비결이 뭡니까?
(19/79)
19화 비결이 뭡니까?
(19/79)
19화 비결이 뭡니까?
2023.02.04.
결혼식은 순탄하게 준비되어가는 중이었다.
“주인님께서 예산을 잡아 보내 주신 서류입니다. 전하께서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결혼식을 준비해도 좋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읽어 볼게요.”
나는 응접실에 헤르티안이 보낸 대공 영지의 행정관 잭슨과 마주 앉았다. 5 대 5 가르마 위로 발라 놓은 기름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영애께서 따로 원하는 결혼식 스타일이 있으십니까?”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헤르티안이 그간 밀린 영지 일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결혼식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음, 따로 원하는 스타일은 없긴 합니다만.”
“그러면 제가 임으로 지정해도 되겠습니까?”
잭슨이 빠른 손길로 서류를 헤집었다. 손길이 꽤나 능숙했다.
그는 대공이 자리를 비운 동안, 대공을 대신하여 대공령을 돌본 이라고 했으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잠시만요. 제가 카탈로그 몇 개를 가져왔어요.”
나는 그가 오기 전, 미리 점찍어 두었던 카탈로그를 꺼냈다. 그는 잽싼 손길로 카탈로그를 집더니 휙휙 넘기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신기했다.
“이번에 고르신 드레스 콘셉트와 잘 어울리긴 합니다. 게다가, 무자비하게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기억에 남을 듯 안 남을 듯한 분위기. 예산을 넘을 듯 안 넘을 듯 아슬아슬한 커트라인.”
탁. 카탈로그가 테이블 위에 완벽히 착지했다. 그가 벌써 다 훑어본 것이다.
“어떤가요?”
쭉 찢어진 눈빛이 매섭게 나를 향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마음에 안 드나요?”
“아니요.”
그가 검지를 좌우로 한 번 저었다. 이윽고 얇은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완벽 그 자체입니다.”
밤새 알아본 보람이 있었다.
그는 나머지 서류들을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본격적인 준비는 이제 시작이었다.
“인원은 대략 몇 명 정도 생각하십니까?”
“어머니께서 후원하고 있는 화가들도 초대할 예정이라 대략 저희 하객만 백 명은 될 거예요.”
“화장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제 전담 하녀에게 맡기려구요. 괜히 다른 데에서 맡겼다가 제 피부색이랑 안 맞게 되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아요.”
사각사각.
“그날 식사는?”
“아침 굶는다고 배가 들어갈까요? 평소대로 먹으려고요.”
잭슨은 나를 앉힌 채로 주변을 맴돌며 하나하나 체크했다. 사소한 것까지 적는 그를 보니 꼭 취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잭슨……. 이제 끝났나요?”
벌써 3시간째였다. 슬슬 배도 고프고 몸도 찌뿌둥했다.
하지만 나와 달리 잭슨의 눈에서는 활기가 넘쳤다.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이 정도로 지치시다니요.”
“쓰러질지도 몰라요.”
나는 혓바닥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꺾었다. 그제야 잭슨이 글씨가 빼곡한 종이를 내려놓았다.
“아쉽지만 예비 대공비 전하를 쓰러지게 만들수는 없지요.”
“그럼 여기서 그만할까요?”
“아뇨. 마지막으로 여쭤볼 게 있습니다.”
잭슨의 말에 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른 하고 끝내시죠.”
“손 관리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새초롬해졌다.
“손 관리요?”
“매일 서류나 보다 보니 손이 엉망이 되어버렸지 뭡니까. 좋다는 약을 발라도 효과가 잠시뿐이고…….”
그리고 서글픈 눈이 되어서 자신의 울긋불긋한 손을 요리조리 살펴보는 게 아닌가.
“큼큼. 영애께서는 손이 매끄럽고 깔끔하시니 비결이 있으실 것 아닙니까? 절대 부러워서는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게 물어본 것이다.
나는 곁눈질로 내 손톱을 보는 그를 보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난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비결을 알려드리면 잭슨은 제게 뭘 해주실래요?”
***
잭슨은 예산 계획서를 들고 빠르게 말 위에 올랐다. 들어가기 전과 달리 그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부하 기사가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했다.
“행정관님, 재미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잭슨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는 주변을 쓱쓱 살피더니 열이 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말도 마, 나 참 어이가 없어 가지고.”
“영애께서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셨습니까?”
“아니. 결혼식 준비는 완벽했어.”
부하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결혼식이 아니라면 달리 화날 일이 있나?
“그럼 왜 그렇게 화가 나신 겁니까?”
“내가 말이야. 하도 손이 매끈하길래 비결이 있냐고 물었더니.”
“물었더니……?”
“고작 이 나뭇가지 끓인 물로 손을 씻으라는 거 있지.”
붉은 자줏빛이 도는 나뭇가지 묶음이었다. 아네트가 비결이라고 그에게 준 것이었다.
시어버터나 달팽이 진액으로 만든 크림 같은 걸 생각했던 잭슨은 나뭇가지를 보며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흥. 귀족 영애들 무서운 건 알았지만 진지하게 묻는 사람한테 이런 장난을 칠 줄은 몰랐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달여 보시지.”
“너는, 너는 애가 순수한 거니 멍청한 거니? 너나 많이 끓여 먹어.”
잭슨은 나뭇가지로 부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결혼식 준비를 하게 된 이후부터 시간이 물 흐르듯 흘렀다.
창밖은 어느새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찌뿌둥해진 몸을 펴고 몇 시간 만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베티를 따라 로비로 내려갔다. 그 아래에는 마담 루안나와 허름한 옷차림을 한 여자 아이 한 명이 서 있었다.
“루안나.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반가운 손님인 루안나의 손을 맞잡았다.
“안으로 들어와요.”
하지만 그녀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여유 있던 그때와 다르게 그녀의 얼굴엔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나요?”
걱정 어린 그 말에 루안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데려온 여자아이의 손을 끌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
그녀가 허리를 숙여 사과하자, 옆에 있던 아이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저희 가게에 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너도 얼른 사과드리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여자아이는 연신 허리를 접으며 사죄했다.
“드레스가 망가졌군요.”
달리 내게 사과할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화분을 옮겨달라고 했는데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엎어버려서 그만……. 왜 밖에 가져다 놓으라는 걸 드레스가 있는 곳으로 와서는.”
그녀는 옆에 있는 아이를 타박했다.
“아예 못 입을 정도인가요?”
“흙을 털어내려다 되레 얼룩이 생겨서 세탁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아이는 손을 모아 계속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험한 일을 많이 한 건지 손에 흉이 많고 거뭇했다.
“죄, 죄송해요. 드레스가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구경하다가 손이 미끄러졌어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겠어요. 아쉽기는 하지만 일을 돌이킬 순 없는 거니까. 문제 삼지 않을게요.”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기껏 결혼식 준비를 끝냈는데 다시 일이 터지다니.
하지만 곧 결혼식인데, 시끄럽게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드레스는 다른 걸 입으면 되니까.
‘헤르티안이 기껏 예쁜 걸 골라주었는데.’
그게 아쉬울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네트 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다음번에는 이런 사고가 생기지 않게 주의해주세요.”
“네.”
“오늘은 차를 대접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루안나 뒤를 따라가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밀색 머리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소처럼 보였다.
“근데 저렇게 가고 나면 저 아이. 어떻게 되는 거죠?”
드레스는 일반 귀족들은 마음껏 사지 못할 만큼 비싸다. 그런데 의상실에서 심부름을 하는 평민 아이가 그 값을 치를 수 있을까?
“어떻게 드레스 값을 변상하나요?”
루안나는 정도를 아는 사람이니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다만, 드레스의 값이 의상실에 큰 손해를 입힌 거라면 다르게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다른 곳에서 대답이 나왔다.
“목숨 열 개 팔아도 드레스 값을 못 치를 텐데. 쯧쯧.”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하녀들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대로 저 아이는 평생을 일해도 이 드레스 값을 치를 수 없을 것이다.
“궁금해서요. 듣기론 루안나 의상실에서 쓰는 보석과 자재는 모두 최고급이라고 하던데. 저택을 나가고 나면 그 드레스 값을 어떻게 계산하실까 싶어서요.”
“그건…… 아직 생각해 본 바 없습니다.”
나는 허름한 차림의 아이에게 다가갔다. 양쪽으로 땋은 머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루안나가 네게 갚을 기회를 준다면 어떻게 갚으려는 참이니?”
“…….”
“대답을 피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 문제는 아니잖아.”
어디선가 노예 이야기가 나왔다. 그걸 제대로 들었는지 그녀가 물기 어린 눈을 부릅떴다.
“차라리 죽여 주세요……. 노예로 팔려가느니 여기서 죽을게요.”
노예가 된다는 건 그만큼 끔찍한 일이겠지.
그래도 나는 조금 화가 났다.
“몸이 아픈 데가 있니?”
“……없어요. 하, 하지만 노예로 파신다면 저는 스스로 불구가 될 거예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무서운 말을 입에 담았다. 그녀에게는 그 말이 노예로 팔겠다는 뜻인줄 알았나보다. 나는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나와 나이대는 비슷해 보였지만, 나보다 훨씬 건강한 몸이었다.
“드레스 하나에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값을 치를 돈도 없고…….”
“변상할 돈이 없다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배짱이 좋은 건지, 배가 부른 건지.”
그녀는 영문 모를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진짜 배부른 사람이 누구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아까부터 눈에 띄는 그녀의 옷을 보곤 말했다.
“네 옷에 있는 무늬가 독특하네. 이건 어떤 천으로 만든 옷이니?”
난데없는 질문에 그녀는 옷을 여미며 나를 경계했다.
“……겨, 겨울에 쓰던 태피스트리 조각으로 만든 옷이에요.”
태피스트리.
겨울에 방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덮는 천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너 이름은 뭐야?”
“……보니사요. 성은 없어요.”
조사하는 듯한 어조에 보니사는 시선을 피했다.
“보니사, 너도 태피스트리를 만들 줄 알아?”
“고향 마을은 겨울 바람이 무척 차가워서 같이 만들곤 했어요……. 근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찾은 것 같다. 네가 살 수 있는 방법.”
***
보니사는 내일 다시 저택을 찾기로 했다. 직접 만든 태피스트리를 가지고서.
“아가씨. 저 아이를 왜 다시 부르시는 거예요?”
베티는 아까부터 탐탁지 않게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제가 아가씨가 하시는 일은 다 응원하는데, 이번 건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괘씸해서.”
“제 말이요! 노예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다니요. 아예 돈을 갚을 의지가 없는 거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
나는 오리처럼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재잘거리던 입이 조용해졌다.
“노예로 살 바에 죽겠다잖아. 나보다 어리고 건강하면서 고작 돈 때문에 죽겠다고 하는 게 고약했어.”
나도 살기 위해서 이렇게 발버둥 치는데. 젊고 건강한데도 고작 드레스 하나에 목숨을 내놓으려 하다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만, 단지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지 않은 것이 괘씸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다.
***
다음 날이 되었다.
약속한 대로 보니사는 저택에 다시 방문했다. 루안나도 함께였다.
“가져왔니?”
“네. 여기요.”
그 아이는 약속대로 태피스트리를 들고나왔다. 베티가 천을 풀자, 그 안에 꽤 묵직하고 커다란 태피스트리가 나왔다. 나는 태피스트리 앞에 앉아 문양을 확인했다.
“이걸 하루 만에 다 만들었다고?”
“네.”
“거짓말이지?”
“저희 같은 평민이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곧바로 팔지 않고 묵혀두는 일은 없어요.”
하루 만에 만들었다기엔 짜임새가 굉장히 좋았다. 무늬가 흐트러진 부분도 없었고.
“넌 언제부터 이걸 만들었어?”
“아주 어릴 적부터요.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엄마를 따라서 계속 만들었으니까요.”
그녀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태피스트리를 내려놓고 루안나에게 다가갔다.
“루안나. 대공님께서 주문한 드레스는 제가 사도록 할게요. 대신 저 아이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
“아네트 님. 그렇게 마음 안 쓰셔도 됩니다. 저 아이가 뭐라고요.”
“저 아이가 제 드레스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거든요.”
루안나라고 뚜렷한 해결 방법은 없었기에 내 말을 따라 주었다.
나는 백작저에 보내달라고 말한 뒤에 베티에게 태피스트리를 챙기라고 했다.
“보니사. 오래 살아.”
그리고 오늘도 귀여운 양갈래 머리를 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뒤를 돌았을 때였다.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