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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이번엔 진짜로 결혼해요 (17/79)


17화 이번엔 진짜로 결혼해요
2023.01.28.


이튿날.

성격 급한 아버지의 결단이 내려졌다.


“결혼을 허락하마.”

꼬박 하루 동안 멜슨의 뒤를 캐던 아버지는 그의 구린내를 맡았다.

처음엔 나와 리안에게 처방해 준 약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다음으로는 대공의 것이라는 진료 기록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진짜일 리가 없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아버지는 오랜 세월 자신의 무지함을 탓했다.


“내가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고 그놈을 믿은 잘못인 게야. 다 내 잘못이다.”

나는 하루아침에 수척해진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곁으로 다가갔다. 오늘따라 무거운 짐을 진 듯 어깨가 축 처져계셨다.


“속인 사람이 잘못이지 속은 사람이 잘못은 아니잖아요.”

깊은 신뢰에 배신 당한 아버지가 최고의 피해자였다.

아버지의 잘못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컸다는 것.

자식을 살리고 싶기에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라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그건 잘못이라기보다 실수에 가까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

아버지도 이번 생은 아버지가 처음일 테니까.

그러니 아버지의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해주는 건 내 몫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공과 결혼하거라. 아니, 누구와 해도 상관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이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존중할 게야.”

“고마워요. 아빠.”

 

***

올 것이 왔다.


“황자 전하를 여기서 뵐 줄은 몰랐어요.”

루안나 의상실에서 세르디스를 보았다. 헤르티안이 내 웨딩드레스를 예약해 놨다고 해서 찾아왔더니 그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말이다.


“전하께선 황후 폐하께 선물하려고 오신 거예요?”

영애 몇몇에게 둘러싸인 세르디스 옆으로 시종이 선물 상자를 가득 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그는 맑은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 아니야.”

“어머. 그러면 어떤 여인이요? 여기 남성복은 팔지 않는데.”

세르디스의 짝이라면 장차 황자 비가 될 여인. 영애들이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따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누군가를 떠올리듯 미소를 그리자, 영애들은 신이 나서 저마다 꺅꺅거렸다.


“황자 전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이가 누굴까요? 부러워요.”

“곧 알게 될 거야.”

“설마 최근에 티에르에 가신 것도 그분께 청혼하려고?”

“응.”

혼자만의 연애에 아주 푹 빠진 채였다.

의상실 입구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니 코웃음이 나왔다. 베티도 함께 그걸 지켜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다음에 다시 올까요?”

나는 짧게 고민하다 고개를 홰홰 저었다.


“아니. 언젠가는 마주쳐야 하니까.”

부모님의 결혼 허락도 받았고 계약을 파기하지 않겠다는 헤르티안의 약속도 받았겠다,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가보자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당당하게 의상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상실의 주인인 루안나가 나를 먼저 발견하곤 반갑게 맞이했다.


“르앙베리아 영애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가워요, 마담.”

내 이름이 들리자 세르디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예의를 갖췄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네트. 이게 얼마 만이야.”

친근한 인사말이었다.

나는 잊은 척했지만, 세르디스는 정말 잊은 모양이다.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어땠는지.


“얼굴 보기가 어려워서 혼이 났어.”

게다가 나를 쫓아다녀 놓고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넨다. 순간 얼굴이 구겨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두 분이 친한 사이셨군요.”

“응.”

그의 달뜬 반응에 영애들이 무어라 속닥거렸다. 세르디스는 싫지만, 이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떠들기 좋아하는 영애들과 소문의 근거지인 의상실. 게다가 세르디스.


‘이것도 좋은 기회지.’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전하께서 절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최근에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요.”

다정해진 내 목소리에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우리끼리 무슨 사과야. 이렇게 만났으면 된 거지. 안 그래도 아네트 네게 줄 게 있었는데.”

그는 하얀 제복 안을 뒤적거렸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청혼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근데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고작 마카롱 한 번 먹은 사이가 청혼할 만큼 깊은 사이었던가? 지나가던 에드워드가 웃겠다.

나는 고백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찌질이에게 기회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전하, 그 전에 저도 전하께 드리고 싶었던 게 있어요.”

“내게?”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뒤적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의상실 안에 있는 다른 이들 또한 숨을 죽여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다. 타이밍 한 번 최고였다.


“잠시만요.”

나는 가방 안을 열어 준비했던 봉투를 하나 꺼냈다. 새하얀 편지 봉투를 받은 세르디스의 얼굴에 의문이 들었다.


“나한테 편지라도 쓴 거야?”

잉크 아깝게 편지를 왜 써. 군말 말고.


“열어보세요.”

“여기서 열어봐도 돼? 부끄러운데.”

봉투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그는 러브레터라도 받은 사람처럼 어깨가 봉긋 솟았다. 그가 실링 왁스를 뜯어내고 안에 있는 카드를 꺼냈다. 꽤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 차례 숨을 고르더니 카드를 열었다.


“황자 전하 좋으시겠어요.”

“곧 황궁에 좋은 소식이 있겠다. 그렇죠?”

영애들의 웃음소리와 반대로 세르디스는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까막눈이라도 된 척하려나 싶었는데, 내용은 확실히 이해했나 보다. 그는 얼음덩이처럼 몇 분을 멀거니 서 있었다. 나는 말을 잃은 그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네. 황궁에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어머나. 르앙베리아 영애. 근데 어떻게 황자 전하랑 연인 사이가 되신 거예요? 아카데미 때도 공부만 했잖아요. 두 사람이 만나고 있다는 건 못 들었는데.”

“그러니까요. 궁금해요.”

그녀들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영애들께서는 저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자 두 분께도 드리겠습니다.”

이번엔 모두가 보도록 가방을 활짝 열었다. 그 속엔 하얀 봉투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그걸 한 뭉치 꺼내다가 영애들은 물론이고 루안나에게까지 챙겨 주었다.

그걸 받은 그들은 영문 모를 표정이 되어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누구 하나 먼저 봉투를 열어보지 못했다.


“저 결혼해요.”

설명이 더 필요하나?


“블란디체 대공님과요.”

뒤늦게 봉투를 열어보던 그녀들도 안에 쓰인 내용을 보고 벌어진 입을 뒤늦게 가렸다. 그건 청첩장이었다. 헤르티안과 내가 결혼한다는 내용과 함께 결혼식에 초대한다는 내용을 담은.


“세상에…….”

그녀들은 살금살금 세르디스 눈치를 보았다. 나도 세르디스를 보며 쐐기를 박아 넣었다.


“전하와 제가 가족이 되는 거네요.”

잔인하다고 욕해도 상관없었다.

나와 세르디스는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결혼을 부추긴 건 세르디스였으니까.

그날, 내가 정보 길드에서 만나기로 한 영식들만 가만히 내버려 뒀어도 우리가 가족으로 엮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세르디스의 빨개진 목 위로 핏대가 돋았다. 그는 툭 하고 건드리면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평온한 얼굴로 마담을 돌아보았다.


“루안나. 대공님께서 주문했다던 내 드레스를 보여 주실래요?”

그녀는 직원 둘을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그럼 결혼식 때 뵈어요. 황자 전하.”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고 돌아섰다. 루안나는 의상실 내부로 들어가더니 드레스에 씌워진 천을 걷었다. 하얀 조명 아래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실크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가 드러났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을 하얀 원단 곳곳에 작은 보석들을 박아 넣어 고급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멋이 있는 웨딩드레스였다. 거기다 각도에 따라 보석에 반사된 빛이 반짝거리는 이 드레스는 마치 마법 같았다.


“세상에나! 이렇게 예쁘고 반짝거리는 드레스는 처음 봐요!”

베티의 옥구슬 같은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그녀는 콧김을 잔뜩 뿜어내며 마담이 보여 준 드레스를 요리조리 구경했다. 누가 보아도 예술적인 드레스였다.


“이걸 대공께서 직접 고르셨다고요?”

루안나는 살포시 웃었다.


“대공 전하께 드레스 여러 벌을 보여드렸죠. 처음엔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돌아가셨다가 일을 처리하고 다시 돌아오셔서 한참을 보신 끝에 결정하셨습니다.”

마음속 깊이 감탄했다. 그가 직접 웨딩드레스를 고른 것도 모자라 그중에서도 내 스타일을 완벽하게 골라냈다.


“아가씨, 이거 엄청 비싸 보여요!”

동감이다. 내가 여태 입은 것과 비교도 못 할 만큼 비싸 보였다. 헤르티안이 직접 고른다기에 저렴할 것을 골랐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계약 결혼이라 굳이 비싼 걸 고를 필요는 없었을 텐데.’

급하게 치러지는 결혼식이니 괜한 의심을 피하려는 모양이었다.


“대공 전하의 짝이 누굴까 저희끼리 얼마나 궁금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그녀와 직원들이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행복한 신부가 된 척 환하게 웃었다. 그들이 내 결혼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한 번 입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영애의 사이즈에 맞춰 수선해 보내드릴 예정이랍니다.”

하지만 그것도 뒤따라온 세르디스에 의해 저지당했다. 웨딩드레스를 바라본 그의 시선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그걸 보니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결혼이라니. 농담하지 마, 아네트.”

“갑작스럽게 결혼한다고 해서 많이 놀라셨구나. 이해해요. 그래도 원래 결혼할 사람은 단번에 알아본다잖아요.”

“거짓말이잖아.”

그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세요?”

“그야…… 그때까지 넌 다른 결혼 상대를 찾고 있었으니까.”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 알고 있는지 목소리를 줄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에서 돌아온 놈이랑 결혼한다는 게 말이나 돼?”

“역시 기억하고 계셨군요.”

뻔뻔한 그의 태도에 코웃음이 나왔다.


“연회 때 제 앞에서 기절하셨으니 혹시 머리라도 다치신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 그런데 그날 일을 모두 기억하고 계시네요?”

“지금 그게 중요해?”

그게 중요하냐고?

세르디스는 자기 감정만 밀어붙이고 있었다.


“기억하고 계신다면 제게 먼저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

미안하다. 사과가 먼저였다. 대화는 내가 용서를 구한 다음에 할 수 있는 거고. 아무리 황자라고 해도 이 정도 선은 지켜야 하는 거였다.


“그때는 네가 일부러 튕기는 줄 알았어. 그렇다고 강제로 널 어떻게 하려고 했던 생각은 아니었어. 정말이야.”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장난이었다는 말이죠?”

“그래. 장난이었어, 장난. 네가 갑자기 나를 피하니까 나도…….”

“전하께서 장난이라고 하셔도 저는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요?”

그날 나는 무서워서 이대로 죽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뭐? 장난?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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