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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무성욕자에게 바람둥이라니 (12/79)


12화 무성욕자에게 바람둥이라니
2023.01.11.


근 십 분 동안 내게 벌어진 일을 잠시 되새겼다.

결혼 날짜를 받으러 들어갔더니, 난데없이 반대라니.


"갑자기 뭐야……."

그새 마음을 바꾸셨을 리는 없고.

다른 이에게 무슨 말을 들으신 게 틀림없다.


“알아봐야겠어.”

엄마가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집사를 찾아갔다.


“집사. 오늘 대공 전하 외에 저택에 방문한 사람이 있었어?”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듯 많지요. 방명록을 보여드릴까요?”

“응. 부탁해.”

집사는 흔쾌히 내게 방명록을 보여주었다.

-블란디체 헤르티안

-밀리노 상회

-하울 바이오르

-멜슨 보르만

.
.
.

대공을 제외하고도, 상인들부터 후원하는 화가들까지. 족히 이십 명은 되었다.


“멜슨 선생님은 왜 나를 안 보고 그냥 가신 거지?”

그중 멜슨 선생님의 이름은 오랜만이었다.


“남작님께서는 수도에 있는 약초방에 가야 한다며 들른 김에 약을 전해달라고 말하고 나가셨습니다.”

집사는 마침 잘 되었다며 보관해두었던 약병을 건넸다. 나는 새로운 알약들이 가득 찬 병을 받고 나는 재차 물었다.


“그럼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나고 간 사람은?”

“거의 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백작님의 승인이 필요한 일 처리가 대다수라 그렇습니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

그나마 가능성 있어 보이는 건 밀리노 상회.

그들은 여러 왕국을 쏘다녀서 정보력이 뛰어나니 뜬 소문 하나쯤 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헤르티안에 대한 어떤 말을 주워서 했을지도. 아버지가 단시간에 마음을 바꿀 정도면 어마어마한 정보라는 건데.


“일단 알겠어요.”

“네. 아가씨.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걱정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 자요. 집사.”

“아네트 아가씨도 행복한 꿈 꾸십시오.”

집사는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하느라 시달린 건지 얼굴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그를 붙잡고 하소연할 시간도 없었다. 일단, 직접 찾아보는 수밖에.

***

깊은 새벽.

곤히 자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던 엄마가 떠난 늦은 시각이었다.

달칵, 아버지 서재에 있는 맨 밑 서랍을 열었다.


‘다 아버지를 위한 일이에요.’

아버지가 반대한다고 해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그 증거라는 게 뭔지 확인해야겠다.

아버지는 버릇이 하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서는 서랍 맨 아래 보관하는 버릇.


“역시.”

열자마자 구겨진 서류 봉투가 보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처참히 구겨져 있었다.

나는 책상 아래 쪼그려 앉아 서류 봉투를 꺼내 열어보았다. 어떤 내용일지 기대까지 되었다. 그리고 내용을 보았을 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딴 얘기를 믿으셨던 거야?”

보고도 믿기 어려운 질병이 가득 쓰여 있는 의료 기록지였다.

대공이 뭐가 어쩌고 어째?

아버지가 내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런 남사스러운 이야기를 딸에게 해줄 순 없었겠지.

나는 기록지를 마저 살펴보며 짧게 한탄했다.


“아버지 귀가 얇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걸 믿을 만큼 얇았던 거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기록지를 가지고 헤르티안을 오해하다니. 게다가 이름도 맞지 않잖아. 아니다. 아버지라면 믿을 법했다. 무슨 일이 터지곤 하면 앞뒤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시니까.


“그런데 의료 기록지라…….”

만약 이게 진짜여도 문제다. 대공의 건강 상태가 아무렇게나 나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일개 상단이나 귀족이 이 사항을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진료 내용을 알고 있을 법한 사람은.


‘멜슨 선생님.’

선생님의 말과 이 기록지라면 아버지가 믿을 만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이 기록지를 대공의 것이라고 말한 의중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버지 귀가 그렇게 얇으시다면야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돌려드려야지.”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다이닝룸에서 아버지와 내가 침묵의 식사를 마칠 무렵. 내가 먼저 운을 떼었다.


“아버지. 많이 기다렸어요. 이젠 말해주세요.”

서재에서 본 의료 기록지를 보지 않은 척 아버지의 대답을 종용했다.


“성격 급하기는.”

아버지는 입가를 정리하며 나를 나무랐다. 아버지도 밤새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건지 안색이 어두웠다.


“어제 저와 대공 전하가 함께 있는 동안 무슨 얘기라도 들으셨어요?”

“그래. 들었다.”

나와 똑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어떤 이야기요?”

아버지는 시종이 가져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대공 전하가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 하나뿐인 딸을 그런 카사노바에게 줄 순 없잖느냐.”

그렇구나.

의료 기록지에 왜 그런 질병이 쓰여 있나 싶었더니, 여자관계와 묶어서 헛소문을 낸 것이다.


“누가 그런 뜬 소문을 퍼트린 거죠?”

“뜬 소문이 아니야. 내가 직접 증거도 봤다.”

“어떤 증거요?”

“그것까진 네게 말해줄 수 없겠구나. 여자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쪽으로도 큼큼. 문제가 있다. 그러니 이만 단념하거라.”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니 악의적으로 퍼트린 소문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단순히 의료 기록지를 보고 아버지가 후사 걱정을 한 것이라면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여자를 엮는다?

그건 대공을 전혀 모르고 퍼트린 헛소문에 불과하단 증거였다.


“아버지가 무언가 오해하고 계신 것같아요. 전하는 결백해요.”

“너야말로 아비의 말은 못 믿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대공을 두둔하는 게냐?”

그야 제가 원작을 읽었으니까요.

거기서 헤르티안은 성욕이라는 게 씨가 마른 사람이고요!

차마 나오지 못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아버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콩깍지가 씐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머지않아 소문이 퍼질 테지. 그때 후회하느니 결혼하지 않는 게 나아.”

역시 대화로 아버지를 설득하기는 어렵다.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밝힐게요. 대공님이 정말 저 말고 다른 여자가 있는지. 이게 사실인지요.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면 성병이 걸렸을지도 모르니 검사를 받아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좋겠어요.”

“아네트!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래도 대공과 결혼해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어, 무려 대공이다. 정부를 줄줄이 들여도 상관없는 위치라고.”

아버지는 굳은 얼굴을 하곤 나를 바라보았다. 더는 대화의 여지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잖아요. 평민이라고 해도 바람피우지 않는다는 확신은 없죠. 그게 두려워서 포기하면 전 평생 아무랑도 결혼하지 못할걸요?”

“그런 놈들을 버리면 그만이지. 하지만 대공이다. 네가 마음대로 떠날 수 없어. 몸도 약한 네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아비는 벌써 오한이 든다.”

옅은 한숨이 흘렀다.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실 줄 알았지.’

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크기 때문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양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말없이 준비해온 것을 꺼냈다. 오늘 새벽, 아버지 서재에서 나와 밤새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이건 무엇인 게냐?”

“대공 전하와 관련된 기사요.”

“이런 걸 뭐 하러 모아온 게야.”

아버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일개 영식들도 한두 번씩은 터진다는 스캔들도 대공 전하께서는 단 한 번도 나지 않으셨어요.”

“대공이니 막았겠지.”

“황제 폐하도 피할 수 없는 스캔들을 대공 전하라고 막을 수 있을까요?”

차분히 신문을 펼쳐놓았지만 아버지의 관심을 받긴 역부족이었다. 뭐, 상관은 없었다. 내 진짜 목적은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더는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아예 철퇴를 박아 넣고, 테이블 옆에 있던 청혼서 하나를 보여주었다.

헤르티안이 보낸 것이 아닌, 다른 이가 보낸 것이었다.


“오늘 정오에 베이른 가문 영식과 약속을 잡아 두었으니 늦지 말고 가거라. 쉽게 빠진 사랑은 쉽게 잊히기도 하는 법이야.”

“아버지!”

 

 
아버지의 남다른 행동력에 큰 소리가 나갔다.


“이미 대공한테는 결혼을 취소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아마 지금쯤이면 받고 수긍했겠지.”

“네? 전하께 뭘 보내요?”

갑자기 왜 그렇게 적극적이신 건데요?

청혼서가 오고 간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나는 그만 얼빠진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오늘 약속에 나가지 않으면 외출 금지를 내릴 테니. 그리 알아.”

강력한 철퇴가 꽂혔다. 나는 순간 욱하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여기서 아버지와 싸우게 되면 지는 거다. 외출 금지를 당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나는 평정심을 되찾으며 몇 번 심호흡했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힘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시니……방법이 없네요. 알겠어요. 갈게요.”

어차피 피하지 못할 거면 따르자.

그래야 아버지도 내 말을 조금은 들어줄 테니까.

거 봐. 간다는 말 한마디에 곧바로 화색이 도는 거.


“진짜지?”

“대신 만나보기만 하는 거예요.”

“물론이다. 만나만 보거라, 만나만.”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가져온 신문을 챙겼다. 딱 하나만 빼고.


“그럼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오고. 예쁘게 단장하라 일러두마.”

남은 신문 하나는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읽고도 계속 결혼을 반대할지는, 데이트를 다녀와 봐야 알 문제였다.

***

베티의 화려한 솜씨로 한껏 단장한 나는 느지막이 마차에 올랐다.

백작령의 긴 오솔길을 벗어나자, 활기가 가득한 수도가 보였다.

드넓은 광장 중심엔 궁정 조각가 파비앙의 조각상이 부서지는 햇볕을 받아 반짝이며 그 광을 뽐내고 있었다.

마차 창문을 통해 바라본 생기 넘치는 풍경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마차는 얼마 안 가 귀족들의 거리인 올리비아 스트리트에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마차에서 내린 나는 언제쯤 다시 돌아오면 되냐는 마부의 물음에 쥐고 있던 편지를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마부.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편지를 급보로 블란디체 대공께 전해줘요.”

오늘 아버지가 멋대로 정한 데이트에 나온 이유는 헤르티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편지를 받고 마음을 돌렸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나는 미리 챙겼던 금화 두 닢을 마부에게 추가로 건네며 당부했다.


“최대한 빨리 전달해줘요. 부탁해요.”

금화를 보고 눈이 커진 마부는 편지를 품속 깊숙이 숨기고 급히 출발했다. 나는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다 바람에 날아갈 뻔한 모자챙을 잡았다.


“르앙베리아 영애.”

그리고 몸을 돌리자,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애.”

그 뒤로 드러난 얼굴에선 꽃보다 해맑은 미소를 가진 남자가 보였다.


“에드워드 영식?”

“예. 제가 에드워드 베이른입니다.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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