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헛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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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헛소문
2023.01.07.
어느덧 해가 저물고 푸른빛으로 하늘이 뒤덮였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른 줄도 몰랐다.
헤르티안은 돌아가고, 나는 집사가 전달한 대로 방이 아닌 아버지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두 분도 헤르티안이 마음에 들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 결혼은 허락하지 못하겠구나.”
대뜸 이게 무슨 일?
아버지가 말을 바꿨다. 아예 표정도 바뀌었다.
“갑자기 결혼을 반대하신다뇨?”
방금까지만 해도 둥실둥실 떠올랐던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너무 섣부른 결정인 듯싶구나.”
나는 단번에 아버지가 있는 책상 앞으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구혼장을 서랍 안으로 넣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허락하신다면서요. 아니었으면 대공님이 있을 때 말씀하셨었어야죠!”
부모님 앞에서 예의도 없이 버럭 소리가 나갔다.
“뭐라고 말씀해 주세요.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있으시잖아요.”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데, 내게 숨기고 있는 거다.
“아버지!”
나는 입을 꾹 다문 아버지를 계속해서 추궁했다.
“정말 아무 말씀도 안 해주실 거예요? 아무런 설명 없이 결혼을 무른다고만 하면 제가 어떻게 납득하겠어요.”
심각한 얼굴의 아버지는 이마를 짚었다.
“실은…….”
아버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이 복잡해 보이셨다.
“실은?”
입을 달싹이던 아버지는 도리질 치더니 재차 입을 다물었다. 절대 말해주지 않을 듯한 표정이었다.
“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이번에는 창가에 앉아 있는 엄마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엄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정말 답답하게 왜들 이러세요? 결혼이 장난이에요? 그것도 상대는 대공 전하이신데!”
이유라도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두 분은 말해줄 의지가 없어 보였다.
“저는 못 받아들여요. 엄마 아빠가 뭐라고 하시던 대공 전하와 결혼하겠어요.”
헤르티안이랑은 이미 어떤 날이 좋을지 날짜를 잡자고 말해둔 상태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결혼은 그대로 유지할 거다.
나는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엄마 아빠를 번갈아 보았다.
‘정말 이래도 말 안 해주실 거예요?’
아버지나 엄마나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집무실을 나가려다 돌아서, 헤르티안과 결혼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그래도 두 분은 답이 없었다.
내일 다시 이야기해야 하나.
“대공 전하는 완벽한 남편이 되어주실 거예요. 딱 제가 바라왔던 남편감이에요.”
그렇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돌아가려던 때였다.
“그걸 어떻게 확언하는 게냐.”
드디어 아버지가 말꼬를 텄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예의 바른 데다가 전쟁에선 연신 승기만 들고 오시잖아요. 어떤 상황이 와도 절 지켜주실걸요.”
“기사들을 앞세워 지휘만 한 건지 어찌 알고.”
부정적인 말에 고개를 한차례 저었다.
“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한 거죠. 게다가 전하는 제국에서 제일 멋지신걸요.”
“얼굴로만 판단하면 안 돼. 남자는 자고로 몸이 크흠…….”
아버지가 말을 하다 말고 헛기침했다. 부끄러운 말을 하려다 만 모양이다.
“허리도 튼튼하실 거예요. 전쟁터를 누비면서 말을 얼마나 많이 타고 다니셨는데요.”
“큼큼.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뿐만 아니라 전하는 코도 매끈하고 우뚝한걸요.”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코가 무슨 상관인 게야.”
“자고로 남자는 콧대가 높고 우뚝해야 밤일도 잘한댔어요.”
이건 내가 책 빙의를 하기 전, 병실 티브이에서 나온 관상학자가 말해 알고 있던 얘기였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게냐. 카시안 그놈이구나.”
“아뇨. 영애들이 저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떠들던걸요.”
그리고 아카데미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 코 얘기는 종종 나오곤 했다.
그 얘기에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터졌다.
“아버지. 저도 다 컸어요. 모르는 척했지만 아카데미 다닐 때부터 알 거 다 알았다구요. 저도 볼 건 다 본다구요.”
뻔뻔한 말투였다.
“대공 전하랑은 궁합도 잘 맞을 테니까…….”
“안 된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점잖은 아버지의 의외의 목청에 놀라기를 잠시.
“대공 전하는 아니야. 아니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길길이 날뛰셨다. 목덜미까지 빨간 사과처럼 익은 아버지를 보고 나는 의아함을 표했다.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세요?”
“그야…… 대공 전하. 아니 그놈이!”
정수리에서 뜨끈한 김이 올라올 듯한 아버지가 드디어 이유를 말하려고 하자, 엄마가 뛰어와 나를 가로막았다.
“아네트. 일단 방으로 돌아가 있으렴.”
“이유라도 듣고 가야겠어요. 대공 전하가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버지.”
하지만, 엄마는 미간에 힘을 주어 엄중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숨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엄마 말 안 들을 거니? 얼른 돌아가 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
아네트가 나간 집무실엔 후끈한 공기가 뒤덮였다.
커다란 카우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 창문을 열어두고 나서야 막혔던 공기가 환기되었다.
“후.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소.”
루카스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남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네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말이오. 뭐라 말해야 그 아이가 납득할지.”
남자는 닫힌 문을 흘끔 쳐다보다 백작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아네트 아가씨께는 잘 둘러대 주십시오. 제가 해드린 얘기는 새어 나가면 저와 제 친우 둘 다 죽습니다.”
백작은 주름이 깊게 파인 미간을 짓눌렀다.
“그건 걱정 마시오.”
“감사합니다. 아네트 님도 머지않아 백작님이 반대한 이유를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구려. 멜슨 남작.”
멜슨 남작은 턱에 수북이 난 수염이 들썩거릴 만큼 크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그래. 남작이랑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고맙네. 오늘 찾아와줘서.”
백작은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르앙베리아 백작가의 오랜 주치의인 멜슨에게 감사를 표했다.
“지나가는 길에 아네트 양의 약을 전해주러 오길 천만다행입니다.”
멜슨은 리안이 열병에 시달렸을 때부터 병을 고치기 위해 힘 써준 의원이었다.
그가 아네트의 병도 고치기 위해 얼마나 애써주었는지 눈으로 보아왔기에,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란디체 대공에겐 실망일세. 참전 중이라 당연히 여자관계만큼은 깔끔할 거라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어.”
르앙베리아 백작이 이를 으득 가는 소리가 조용히 퍼졌다.
“하마터면 귀한 내 딸을 망나니에게 보낼 뻔했구려.”
그는 부인과 오붓하게 실내 정원에 있던 중, 다급히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이야기하던 멜슨을 떠올렸다.
불과 몇 시간 전.
“블란디체 대공 전하와 아네트 양이 결혼한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집사가 벌써 말했나 보구먼. 그렇소.”
“구혼장에 인장을 찍으신 겁니까?”
“아직이지만 왜 그렇게 땀을 흘리는 게요?”
“그것이!”
평소답지 않은 불안한 모습으로 멜슨이 한 말은 평화롭던 백작 부부를 충격으로 물들게 했다.
“대공 전하가…… 그리 문란하단 말이오?”
“제 친우인 녀석이 이번 원정에 의사로 파견 나갔다가 돌아와 해준 말입니다.”
무려 블란디체 대공이 전시상황 속에서 정복한 마을의 여인을 무분별하게 탐한 것도 모자라, 왕녀들까지 손을 댔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대공님의 XX가 썩어 XXXX를 친우 녀석이 직접 XXX 했다지 않습니까.”
뜨헉.
두 사람 다 처음 들어보는 외설적인 의학용어에 경악의 신음성을 내질렀다.
“그래서 현재는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 반 토막이 되었다는 겐가?”
“부인도 계시니 자세한 내용은 이걸 확인해주십시오.”
멜슨이 건넨 건 진료 기록서였다. 그 안엔 기상천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상상도 가지 않는 종류의 병세가.
“그런데 이름이 대공의 이름이 아닌데 다른 이의 것 아니오?”
“대공 전하처럼 황족이나 고위 귀족의 경우엔 일부러 다른 이름으로 표기합니다. 정보가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멜슨이 이유 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을 사람은 더욱 아니었고.
“아…….”
루카스는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큰일 난 사람처럼 눈을 화등잔만 하게 키우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당장. 당장 결혼을 물러야겠네.”
***
멜슨 남작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이마에 맺힌 식은땀부터 닦아냈다.
“하여간 나는 운도 좋아요. 이번 건수로 제법 뜯어낼 수 있겠어.”
식은땀이 흐르는 것과 달리 그의 얼굴은 승리의 미소로 만연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마부가 물었다. 멜슨은 먼저 이 소식을 알리러 갈까 고민했다.
“뒷골목으로 가주시오.”
하지만 결국 오늘은 늦었으니 피로를 푸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며 술집으로 동향을 결정했다.
그러곤 딱딱한 마차 등받이에 기대앉아,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 뼛속까지 곱게 자란 귀족 놈들은 속여먹기 좋다니까.”
그는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수한 르앙베리아 백작 내외를 떠올렸다.
평생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보고 자란 귀족이라 그런지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이 잡힐 일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안이 병세를 앓기 시작할 때부터 진한 호구 냄새를 맡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리안 다음으로 아네트의 주치의가 되자, 운 좋게 돈줄이 알아서 접근했다.
그의 정체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며 양쪽으로 돈을 챙겼다.
그리고 그쪽에서 준 귀한 약재를 아네트에게 건네줄 뿐이었다. 한 번은 동방에서만 자라는 희귀 약초를 직접 공수해 온 척했더니, 그 뒤로 백작 내외는 멜슨에게 깊은 신뢰를 내비쳤다.
“그놈은 왜 저 집 딸한테 집착하는 거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백작 딸한테 숨겨둔 보물이라도 있는 건가?’
상상만 하며 대충 추측할 뿐.
자신은 그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일이다. 오늘처럼 갑작스럽게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건 싫지만 말이다.
“대공이 청혼서를 들고 간다는 건 어떻게 알았대.”
일을 하면 할수록 정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공이 전쟁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정보까지 아는 건지.
"황족은 아니겠지?“
멜슨은 팔에 오른 소름을 벅벅 문지르며 머리 아픈 가정은 지웠다. 어차피 그는 돈만 챙겨 받으면 그만이었으니. 대신 방금 전 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반토막 났다는 건 좀 심했나?”
일부러 백작이 확인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소문이 그리로 튀었다.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얘기였다.
‘안 믿는 거 아니야?’
그러나 불안도 잠시였다.
본인을 향한 신뢰는 생각보다 두터웠고, 다른 이의 진료 기록지가 한 몫을 더 했다. 그렇다고 아무 확인도 없이 결혼을 취소해 버리다니.
“믿는 쪽이 등신이지 뭐.”
만일 잘못되어도 지체 높은 돈줄께서 알아서 해결해 줄 터다. 멜슨은 걱정거리를 털어버리곤, 괜스레 간지러워진 귓구멍을 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