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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당신이 대공이었다고? (9/79)


9화 당신이 대공이었다고?
2022.12.31.


승전식의 독살 사건.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고자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블란디체 대공이 승전을 알리고 기뻐하는 게 꼴 보기 싫었던 황후 측 세력이 벌인 짓이다.

일부러 병사가 아닌 신관 하나를 죽이려 했다. 그래야 대공의 이미지가 나빠질 테니까.

승전으로 인해 들떠 있는 제국민의 시선이 바뀔 테니까.

이 사건으로 비올렛은 세르디스에게도 이런 비극이 벌어질까, 독초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훗날 그 능력으로 세르디스를 구하기도 하고.


“승전식에서 축하주를 나누어 마실 때 사고는 벌어질 겁니다.”

승전식엔 신관들 일부와 추기경 한 명이 나와 이를 축하한다. 신전에서 직접 담금주를 나눠 마시며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그 의식을 빼놓을 순 없다.”

빼면 안 되지.

확실한 증거도 없는 채 독살이 일어나기 전에 의식을 빼버린다면 이미지만 나빠질 테니.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으로 만든 잔이 아닌, 저 진상품 안에 들어 있는 은잔으로 쓰시면 됩니다. 은잔이 검게 변한다면 그 잔 안에 독이 들었다는 증거니까요. 색이 변하지 않는다면 제 소원은 들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종이 진상품을 열어보니 그 안에 은잔이 들어 있었다. 황제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번 건 밖에서 시종들이 진상품 이야기를 한 걸 엿들은 거였다.


“은을 사용해 독을 감별하는 방법은 어떻게 안 것이더냐?”

“동쪽 제국에서는 독을 감별하려고 주로 쓰는 방식이라 알았을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사절로 가시는 동안 다양한 책을 사다 주셔서요.”

그럴듯한 대답이 막힘없이 튀어나왔다. 이미 내 이야기가 틀림없음을 증명했으니, 내가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의심 또한 하지 못할 것이다.


“좋다. 만약 승전식에서 독이 발견된다면 짐이 약속한 대로 네가 원할 때 네 소원 한 가지만큼은 들어주겠다.”

황제는 결국 원하는 것을 내어주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

아네트가 알현실을 빠져나가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헤르티안도 기둥 뒤에서 나왔다.


“당돌하고 영리한 아이다.”

어수룩하게 굴면 혼꾸멍을 내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아네트와 있는 시간이 꽤 즐겁기까지 했다. 제가 사랑했던 그 여인을 닮기도 했고.

역시 아들이 선택한 여자라 그런지 취향도 비슷했다.


“넘보지 마십시오.”

“싫다. 내 며느리니까 자주 불러서 놀아달라고 할 거다.”

황제의 장난스러운 말에 그의 입가에도 얕은 미소가 걸렸다. 굳이 결혼 허락까지는 받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대신 짧게 충고 한마디를 남겼다.


“하나 있는 아들 관리나 잘 해주십시오. 갖지 못하는 걸 파괴하려 드는 습성은 여전하신 듯하니.”

 

***

승전식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렸다.

맑은 하늘 아래엔 제국을 뜻하는 거대한 날개 문양의 깃대가 펄럭거렸다.

나는 승전식을 지켜볼까 하다가 이내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틀째 청혼서가 올까 봐 뜬눈으로 밤을 샜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마음은 홀가분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보험 하나를 들어둔 셈이니까.

이제 승전식이 끝나면 들려올 결과를 기다릴 차례였다.

그렇게 방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아가씨! 아가씨!”

한 시간쯤 흘렀을까. 베티가 급하게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응?”

“대공 전하께서 오셨어요. 얼른 준비하고 내려오시래요!”

대공 전하가?

***



“근데 대공이 우리 집엔 어쩐 일이지.”

나는 방에서 손님맞이용 드레스로 단정히 갈아입고 나왔다.

대충 인사만 하고 빠져나와야지.

유화 냄새가 풍기는 응접실 대신 접대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긴 테이블 끝, 부모님 맞은편에 대공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연락 없이 찾아온 것 같은데. 엄마 아빠는 모르는 것 같고.’

여자주인공이 아닌 아네트의 세세한 가족 사항까진 소설 속에 적혀 있지 않으니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었다.


“아네트. 어서 대공 전하께 인사드리거라.”

나는 대공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고 예를 갖추었다.


“블란디체 대공님께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아네트 르앙베리아입니다.”

머릿속은 온통 승전식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공이 우리 가문에 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일이 잘 풀린 걸까. 아니면 원작과 다른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자리에 앉아 떠오르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혔다.


“연락을 미리 받지 못해 대접이 소홀한 점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엄마 아빠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런 연고 없는 대공이 승전식이 끝나자마자 찾아왔으니 말이다.


“다짜고짜 찾아온 제 불찰입니다.”

낮은 톤이면서도 강단 있는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그제야 걱정 속에 처박아 두었던 고개를 들어 대공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와.’

굉장한 미남이다.

세련되면서도 거친 맹수의 눈동자 같은 흑발에, 요정들이 사는 아오르 호수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

남주인 세르디스에 맞먹을 정도였다.

세르디스가 온실 속의 화초라면.

대공은 날 것 그대로의 야생화 같달까.

개인적으로 외모는 세르디스보다 이쪽이 더 취향이었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지 않나?’

고급스러운 스리피스 연미복을 입은 남자. 대공을 만난 적이 있다면 파티나 연회 정도일 텐데.

뭔가 기억이 날 듯 나지 않았다.

잠시 그를 뜯어보느라 고정된 시선에 대공이 내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공중에서 눈이 마주치자 그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 분명 본 적 있는데.’

“말 편하게 하십시오. 대공 전하.”

“투박한 기사의 말투를 고치려다 보니 입에 밴 말투라 개의치 말아주십시오.”

이내 그가 고개를 돌려 예의 바르고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아버지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저나 오늘 승전식을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왜 타운하우스로 가시지 않고 저희 백작저에 들리셨는지요?”

한 마디로, 초대도 안 했는데 왜 왔니? 라는 물음이었다. 대공은 자세를 고쳐 앉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서신을 미리 보냈는데, 아직 못 받으셨나 봅니다.”

“서신이요? 따로 받은 건 없습니다만. 집사. 각하께서 보낸 서신을 전달하지 않은 건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으며 아버지가 멀찍이 서 있는 집사장을 불렀다.

실내가 더운 것도 아니건만 집사의 외알 안경엔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우물쭈물하던 집사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까 주인님께 전달해드렸습니다만.”

“아까? 나는 받은 기억이 없네만. 자네가 내게 준 거라곤 청혼서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아버지가 되묻자 입을 달싹이던 집사 대신 답을 한 건 대공이었다.


“무사히 도착했나 보군요. 제 청혼서가.”

여기서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상황 파악이 된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청혼서를 대공님이 보내신 거라구요?”

조개처럼 입이 다물린 나를 대신해 엄마가 음 이탈을 내며 외쳤다.


“저, 저희 아네트에게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가 내 쪽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니지?’

어제 카지노에서 만난 경비병이…… 설마.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기억은 더욱 선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붉은 입술 하며, 웃을 때 볼에 살짝 파인 보조개 하며, 턱에서 이어지는 매끈한 목선까지.


“히익.”

맞다. 그 남자!


‘카지노에서 만난 경비대야!’

고작 지방 귀족 아니면 준 남작인 줄 알았던 남자가 대공이라니.

게다가 이제야 청혼서를 들고 나타나? 내가 그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서서히 커지는 눈동자를 본 대공이 내가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눈웃음을 지었다.


 


“아네트. 우리에겐 아무 말 없었잖아.”

엄마가 내 팔을 흔들며 다급히 대답을 종용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렴!”

겨우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열었다.


“깜, 깜짝 놀라셨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처음 뵙는다고 인사했잖아.”

“놀라게 해드리려고 했죠!”

양손을 바짝 펴 놀라게 하는 동작을 해 보였지만, 몸짓 한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얘가……. 답지 않게 왜 이러는지. 대공 전하께선 이제 막 전쟁을 끝나고 돌아오셨는데 청혼을 하신다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그럼.”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대공이면 오히려 좋았다.

황제의 소원권이 나를 완벽히 지켜준다는 보장도 없는 마당에.

세르디스 권력 아래에서 휘둘릴 일도 없고.


‘게다가 진짜 잘생기고 다정하기까지 하잖아.’

그와의 결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온 힘을 다해 연기를 펼칠 수밖에.


“연회 날에 만났어요. 그때 제가 집에 늦게 돌아왔잖아요. 사실은 길거리에서 귀족 영애들을 노리는 패거리들에게 당할 뻔할 때. 대공께서 저를 구해주셨어요.”

나는 테이블에 찻잔이 흔들릴 만큼 크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어요.”

질렀다. 믿건 말건 못 먹어도 고다.


“보자마자 교제도 아니고 청혼이라니. 그 말을 믿으라는 게냐?”

역시 아버지. 그 말씀하실 줄 알았죠.


“아버지를 닮아 제가 ‘얼빠’인 걸 어떡해요. 이것도 유전인데.”

“얼, ‘얼빠’?”

“얼굴 보고 사랑에 빠지는 거요. 예전에 리안에게 다 들었어요. 아빠도 무도회에서 엄마한테 첫눈에 반해서 바로 청혼하셨다면서요.”

엄마도 나를 닮아 미인이셨다.

그리고 대공의 외모 또한 만만치 않지.


“우리 대공 각하를 보세요. 얼마나 멋지고 듬직하고 잘생기셨는지.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지금 대공님을 놓치면 평생 놓치고 후회하면서 살 거라고요!”

아주 열렬한 사랑 고백이었다. 나는 동시에 대공을 가리키면서 눈짓했다.


‘가만히 계시지만 말고 거들어 주세요.’

곱게 살다 조용히 이혼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건 그른 것 같으니, 결혼 허락이라도 제대로 받아 내야 했다.

내 눈짓에 대공은 그저 이 상황이 웃긴지, 고개를 숙여 킥킥거리다 일어났다.

웃음기는 완전히 빼고, 진지한 표정으로.


“영애의 말대로입니다. 저 용기에 반해 저도 받아들였습니다.”

엄마가 그대로 입을 벌리다 급하게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백작 부인을 닮아 한 송이 꽃 같은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어머.”

대공은 정말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오그라드는 말을 입에 담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잘생긴 대공이 그리 부르니 엄마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전하. 저희도 생각할 시간을…….”

이번엔 아버지 차례였다.

그러나, 대공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계획했던 것처럼. 그리고 거대하게 보였던 그의 시선이 훅 가라앉았다. 바닥엔 단단한 두 무릎이 붙어 있었다.


“부디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K.O.

전쟁에서 족족 승전보를 울리던 대공이 우리 집에서도 활약을 펼치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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