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다 컸다, 내 아들.
(8/79)
8화 다 컸다, 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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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다 컸다, 내 아들.
2022.12.28.
황제의 알현실.
“황제 폐하.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느른하던 황제가 고개를 번쩍 세웠다. 눈을 돌려 찾은 곳에 헤르티안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넓은 공간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게 듣기 좋아 피식 웃던 황제는 곧장 표정을 지웠다.
“예의상 하는 말은 집어치워라.”
그러고는 속과 달리 차가운 말투로 아들을 맞았다.
헤르티안은 여전한 황제의 태도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럼 집어치우겠습니다.”
2년 만의 재회였다. 황제와도. 수도에도.
몇 번을 와도 황궁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갑갑함을 느낀 헤르티안이 목에 꽉 잠가놓은 단추를 풀며 황좌 앞으로 다가갔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니 태도가 더 거만해졌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래. 아비한테 거만한 태도는 그만…….”
“외척을 피해 전쟁터를 떠도는 건 그만하겠다고 했습니다.”
헤르티안은 황제의 말허리를 자르고, 본론부터 말했다. 인사치레를 길게 나누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뭐라?”
갑자기 치고 들어온 아들의 반항에 황제가 삐딱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겹습니다. 내 목숨 하나 부지하겠다고 도망친 곳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터라는 게 끔찍합니다.”
4년이었다. 친구들은 아카데미에서 뛰어노는데, 덜컥 대공 자리를 물려받아 전쟁터를 떠돈 시간이.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걸 포기하며 살고 싶진 않아졌다.
더군다나 아네트가 자신을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제국이 멸망한다 해도 나갈쏘냐.
“아직은 시기상조다. 기다리거라. 네 세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일 황제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그 아들마저 빼앗기긴 싫었으므로. 그렇다고 황제가 직접 나서서 헤르티안을 보호한다면 그것대로 반기를 살 것이다. 그걸 잘 알기에 황제는 아직 시기를 재는 중이었다.
“싫습니다.”
헤르티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내 뜻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분명 전쟁 전에 약속했습니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영지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약속한 시기보다 전쟁을 일찍 끝낸 건 너다.”
적어도 일 년은 더 끌라고 전달받았다. 하지만 헤르티안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아네트의 편지였다. 아네트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는 마당에 전쟁터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때울 순 없었다. 그렇게 사느니 지금 부딪히는 게 나았다.
“끝낼 수 있는데 끝내지 않는 게 무능한 겁니다.”
“감히 황제의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아뇨.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더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지 않겠다는 걸요.”
헤르티안은 통보에 가까운 말을 남기고 차갑게 뒤돌아섰다.
어차피 황제가 화를 낼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막 알현실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푸하하하.
황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헤르티안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시기가 이제야 왔구나.”
묵직한 음성에 그의 고개가 신경질적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얼굴엔 평생 보지 못했던 만족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아들의 첫 반항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진작에 이랬어야지. 이제 황제한테도 대드는 걸 보면 이제 네 목숨, 네 영지민은 지킬 수 있겠지.”
헤르티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태 절 시험해보신 겁니까?”
4년 동안이나?
“본래 진정한 우림의 왕인 사자는 제 자식을 절벽 끝에 던져 넣는 법. 시험이 아니라 네가 스스로 장성하도록 도와준 셈이다.”
“말장난은 폐하께서 하고 계십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황제는 아무렴 좋았다.
저런 배짱이면 어디 가서 바보처럼 당하진 않겠거니 싶었다.
“그래서 영지로 돌아가서 뭘 해 먹고 살 작정이냐. 여태 전쟁밖에 모르던 놈이.”
물론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 춥고 척박한 땅으로 돌아가 사는 게 더 힘들 테니까.
‘따로 생각해 논 바가 있어 저리 당당하게 구나?’
황제는 조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헤르티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든 예상을 빗나갔다.
“결혼을 할 겁니다.”
세르디스도 아니고, 헤르티안의 입에서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네, 네가 결혼을 한다고?”
“간섭할 생각 마십시오.”
저놈……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다.
진짜로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칼릭스 밑에 있더니 대가리만 커져선……. 짝도 없는 주제에.”
황제는 이때까지도 의심했다. 그 독불장군인 제 동생 칼릭스도 장가는커녕 연애도 못 하고 죽은 걸 옆에서 보니 자기도 그럴까 봐 하는 말이라고.
“있습니다. 결혼할 사람.”
“있다고? 전쟁만 돌아다녔던 네가? 어디 전쟁터에서 이웃 나라 공주를 보고 반하기라도 한 거냐?”
“말한다고 해도 폐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저놈이……!”
황제가 팔걸이에 손을 내리쳤다. 헤르티안은 황제의 반응을 무시하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알현실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허락 없이 출입이 불가합니다!”
“아무리 귀족이시라도 황제 폐하의 알현은 미리 신청을 하고……!”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시종 하나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황제 근처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더냐?”
시종은 바깥을 눈짓하며 상황을 전했다.
“그게…… 르앙베리아 백작 영애께서 느닷없이 황제 폐하를 뵙고 싶다고 하여 작은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약속도 없이 찾아오신 거라 급히 설득하여 내보내겠습니다.”
르앙베리아 백작 영애.
헤르티안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아네트……?”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있는 쪽을 쫓았다.
그리고 전쟁밖에 모르는 아들놈 입에서 자연스럽게 여자 이름이 나오는 걸 황제 또한 빠르게 알아차렸다. 바깥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시선까지. 이런 아들의 반응은 처음이었다.
‘설마 저 영애랑 결혼한다는 건가?’
황제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건 제게 반기를 든 아들놈을 놀리기 딱 좋은 패였다.
“들라 하라.”
그걸 놓칠 황제가 아니었다.
“예?”
“르앙베리아 영애. 들라 하라고.”
***
비올렛에겐 세르디스를 맡겼다.
황제를 만나는 동안 세르디스가 찾아올 수도 있는 법.
그를 묶어둘 사람이 필요했다. 비올렛은 내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무작정 황제의 알현실을 찾아와 난동을 부린 끝에 황제의 명으로 입성에 성공했다. 아버지가 아시면 진노하시겠지만, 나 또한 벼랑 끝에 몰린 심정이었다.
“무례인 걸 알면서도 황제 폐하를 꼭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높다란 황좌 아래에서 나는 바짝 몸을 숙였다.
“르앙베리아 영애라고 했더냐.”
“예. 폐하.”
“백작을 통해 만남을 청했으면 되었을 일을 굳이 소란을 벌이면서까지 막무가내로 찾아온 이유는?”
“꼭 지금 당장 이야기를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황제가 짧게 숨을 뱉더니 말했다.
“시간을 내어주지. 다만 짐이 듣기에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면 지하 감옥에 수감하겠다.”
얼음송곳 같은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답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판단되시면 저를 벌하셔도 좋습니다. 대신 저 혼자 막무가내로 벌인 짓이니 저만 벌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돌하게 덧붙였다.
“또한 제 이야기가 맞다면 훗날 제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십시오.”
내 플랜 B는 이거였다.
원작에서 벌어질 사건을 미리 예견하여 황제의 보호를 받는 것.
결혼보다 안전한 방법은 아니었다. 겪은 바와 같이 원작이 원작대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황제가 내 소원을 들어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계속되는 결혼 실패로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니 뭐든 할 자신이 생겼다.
“말 해보라.”
명이 떨어졌다.
나는 준비해온 말을 뱉었다.
“곧 승전식에서 독살이 일어날 겁니다.”
굳이 황제를 오늘 만나야 했던 이유.
오늘이 승전식 날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를 알현하려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신청을 해야 하는데, 당장 시간이 없었으니까.
최대한 빨리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내 황제의 엄격하리만치 무거운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어떻게 알지?”
“저는 어릴 적 사고를 당한 이후부터 종종 이 세상에 벌어지지 않는 것이 보입니다.”
책 빙의 때문에 안다는 걸 설득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런 간사한 말로 예언자 행세를 하려는 건가.”
“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요. 이 일에 관련된 자는 더욱 아닙니다.”
예언자 취급은 내 쪽에서 사양이었다. 귀찮게 시달릴 게 뻔하니까.
황제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내 말을 무시했다.
“내가 올해 들은 얘기 중에 가장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증명도 못 할 이야기로 승전식을 망칠 순 없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라도 다짜고짜 찾아와 미래 일을 안다고 떠들면 미친 사람 취급했을 테니까.
“황제 폐하께서 찾고 계신 물건의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오기 전에 증명할 방법을 미리 생각하고 왔다.
“……짐이 찾고 있는 물건이라?”
“황궁 뒤편의 돌담길 끝 땅을 파보십시오.”
“영애. 만약 이것 또한 장난에 불과하다면 짐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환영입니다.”
황제는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시종을 불러 땅을 파라고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돌아왔다.
“황제 폐하.”
황제는 시종을 거들떠보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그래 자갈이라도 나왔느냐?”
“그것이……. 크게 특별한 건 아니고 낡은 머리 장식 하나가 나왔습니다.”
“갖고 와라.”
시종은 감쌌던 천을 펼쳤다. 그 안엔 잘 익은 귤색의 머리 장식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장식을 보던 황제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이게…… 이게 어떻게 거기에…….”
그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몰래 황궁 담을 넘어간 길거리에서 직접 걸어주었던 물건이었으니까. 여인이 죽고 황궁 안에 그녀의 흔적이 모두 타버려 슬퍼하던 황제에겐 반갑고 그리운 물건이었다.
굳건히 앉아 있던 황제가 몸을 일으켜 머리 장식을 소중하게 집어 들었다. 나는 황제를 보지 않고 허리를 바짝 숙였다.
“저는 이 물건이 뭔지는 모릅니다. 다만 황제 폐하께서 훗날 이 머리 장식을 찾고 우는 걸 스치듯이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황제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네 말을 믿어주겠다. 이제 일어나 이야기해 보거라.”
이윽고 떨리는 음성이 내려앉았다. 나는 보이지 않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손에 묻은 흙을 가렸다.
원작으로 알았긴 했지만, 위치가 가물가물해서 몰래 파 보길 잘했다.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폐하의 은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협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