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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똥차 남주는 사양입니다 (2/79)


2화 똥차 남주는 사양입니다
2022.12.07.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똥차 남주에게 휘말려 변방으로 쫓겨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내가 미쳤지. 내 무덤을 내가 직접 판 셈이잖아.

‘세르디스 곁에 있으면 살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 머리를 뚝배기로 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겠다. 앞으로는 어쩌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이 상황을 몇 번이고 되새겨 보자니, 기억이 돌아왔을 때보다 머리가 더 아팠다.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쓰레기는쓰레기통으로 : 세르디스한테 쓰레기 냄새 나요.]

[쓰레기는쓰레기통으로 : 재활용 오바예요. 찐 남주 따로 있는 거죠?]

[쓰레기는쓰레기통으로 : 저기요. 작가님? 작가님???]

결국 비올렛이랑 세르디스의 러브 라인으로 흐르자.

[쓰레기는쓰레기통으로 : 우리 비올렛 언니한테 쓰레기 냄새 배게 하지 말라고!]

신랄한 악플을 남겼던 기억까지 생생하게 돌아와, 부정할 수 없었다.


“일어났어?”

새가 지저귀는 듯한 남자 목소리에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네트. 몸은 좀 어때?”

“헉!”

본능적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

밤새 끙끙 앓으며 피하려고 다짐했던 남자가 눈앞에 떡하니 있던 탓이었다.

게다가 피톤치드 숲에 들어온 것처럼 숨통이 확 트이는 게……. 아, 이게 아니지.


“화, 황자님이 왜 제 방에 계세요?”

“놀랐어? 어제 카페에서 쓰러져서 급하게 백작가로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돼서.”

저 목소리가 처음으로 듣기 거북했다. 이젠 내 구원자가 아니라 날 나락으로 보내버릴 똥차 남주니까.


“그렇다고 남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요?”

“도저히 걱정돼서 잠이 안 왔어.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세르디스는 방금 일어나 침대에 앉은 내게 찻잔을 건넸다.


“자. 따뜻한 물이야. 마셔.”

나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물었다.


“근데 왜 집에 안 가시구요.”

퉁명스러운 내 말에 그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걱정된다고 했더니 백작이 먼저 하룻밤 묵고 가라고 묻더라고.”

“아버지가요?”

“응. 방에 들어가 보라고 한 것도 백작이고.”

도움 안 되는 아빠 같으니라고!

아마 아버지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모태 솔로’인 딸이 남자를 데려왔으니까.

나는 아직도 미세하게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얼굴 봤으니 이만 가주세요.”

“아직도 아파? 일단 여기 기대 봐, 아네트.”

너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 굴렁쇠야.

세르디스는 살뜰하게 침대 머리에 쿠션을 덧대주며 나를 천천히 기대게 했다.


“감사한데, 이만 가주세요. 저 좀 더 자야겠어요.”

“알겠어. 근데 자기 전에 수프랑 약은 먹고 자.”

원작을 알고 그를 보니 그의 눈빛은 사랑에 푹 빠진 남자의 것이었다. 콩깍지가 씌어도 제대로 씐 건지 눈에서 희미하게 하트가 보이는 듯도 했다.


‘미치겠다.’

나한테 얼마나 빠진 거야.

원작에서도 아네트한테 차인 신세니 보통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눈빛을 보아하니 고작 얼굴 안 보는 걸로 내가 남주를 떨칠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내가 직접 끓인 수프야.”

뭐요?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맛없으면 안 먹어도 돼.”

그는 요망하게 볼까지 붉혔다. 어제였다면 착한 주인공답다며 웃어넘겼겠지만, 원작을 알고나니 그의 행동에 소름이 돋았다.

원래 세르디스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선 패악을 일삼는 못된 놈이었다. 고로 순진한 저 모습은 내게 잘 보이기 위한 가식일 뿐이었다.

나를 나락으로 제대로 보내려고 작정했구나.

저러고 내가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면 나중에 비올렛에게 가서 말하겠지.


‘아네트는 내가 만든 수프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는데…… 너는 항상 내게 바라기만 해. 지친다. 비올렛.’

스스로 추억 버프를 씌운 과장된 기억을 가지고 말이다.

더는 엮여선 안 돼.

나는 심장 대신 떨리는 손끝을 부여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수고스럽게 그걸 왜 끓이셨어요.”

“당연히 아네트 네가 아프다니까.”

“근데 죄송하게 됐네요. 저 원래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 안 하고 바로 디저트부터 먹거든요.”

나는 문 앞에 서서 우리를 흘긋거리는 베티에게 말했다.


“베티. 오늘 아침은 뭐야? 어제 크루아상에 생크림 듬뿍 찍어 먹었으니까 오늘은 색다른 걸 먹고 싶은데.”

베티는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에게 살짝 윙크했다. 어렸을 적부터 나와 자매처럼 지낸 베티라면 내 의중을 알 거라 생각했다.


“네?”

‘네’말고 맞장구를 쳐주란 말야, 베티!


“얼른 가져와야지? 나 아침에 수프 같은 거 먹으면 종일 화장실 들락거리는 거 알잖아?”

나는 은근슬쩍 수프 접시를 밀어냈다. 그러곤 슬쩍 그를 쳐다봤다. 어제처럼 풀 죽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웬걸?


‘웃어?’

세르디스는 도리어 잘 됐다는 얼굴로 살인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잘 됐다.”

건치가 훤히 드러나는 미소에 등줄기에 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잘 되었다뇨?”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슨 꿍꿍이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남주인 세르디스였다.

그는 웃으며 수프 그릇을 치우곤 침대 옆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 눈은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갔다.


“안 그래도 어제 우리가 주문해놓고 못 먹었던 스페셜 마카롱 포장해왔었는데. 그거 먹으면 되잖아.”

“스페셜 마카롱이요?”

기억났다. 어제 황자가 예약 주문해놨다던 마카롱. 이웃 나라인 알베르카 왕국에서만 나온다는 특별한 과일이 듬뿍 들어갔다던 마카롱 말이다.


“어제 몸이 안 좋지만 않았더라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괜찮아. 내가 포장해서 보관해놨으니까.”

“아…….”

싫은 티를 내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이미 아침으로 디저트를 먹는다고 큰소리쳤으니 단호하게 거절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와중에 베티는 쫄래쫄래 이쪽으로 다가와서 방방 뛰었다.


“아가씨 마카롱 좋아하시잖아요! 그거 드시면 되겠다. 제가 가져올게요.”

그거 아니야 베티.

티 안 나게 고개를 저었지만, 찡긋 미소를 건네는 베티는 아가씨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미소를 보내고 나갔다.

나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베티를 허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기어코 문이 빈틈없이 맞물리고 폐쇄된 공간엔 나와 세르디스만 남았다.


“큼큼.”

그 사실이 자극적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저리 티 나게 목을 가다듬는 걸 보니.


‘정신 줄 제대로 잡자.’

근데 어떻게 하면 세르디스를 떨어트리지.

싫다고 밀어내도, 오뚝이처럼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컸다.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고전적인 방법부터 써 보자.


“황자님. 저 있잖아요. 잠시 귀 좀 빌려주실래요?”

“어? 응.”

 

 
나는 세르디스의 귀에 바짝 얼굴을 붙였다. 금세 붉어진 귓불을 보며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곤 입으로 숨을 내뱉었다.


“그 있잖아요……. 후우.”

어떠냐. 내 입 냄새가!

12시간은 꼬박 잠들어 있었으니 맡아보나 마나 고약할 것이다.


“그 제가…….”

세르디스가 움찔했다. 더욱 숨에 박차를 가했다. 어제 양치질도 못 하고 잤는데 얼마나 고약할지.

이건 콩깍지도 단번에 벗겨질 냄새일 터였다.

그런데,


“푸흡.”

또 웃어?

지금쯤 냄새를 못 참고 멀리 떨어져 나가야 할 세르디스가 쿡쿡 웃었다. 불쾌하단 기색은 전혀 없이.

분명 냄새를 맡았을 텐데…….


“아네트.”

“네, 네?!”

나는 깜짝 놀라 크게 대답했다.


“계속 나 간지럼 태울 작정이야? 나도 놀려주고 싶잖아.”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나는 아네트 네 눈곱도 직접 떼어주고 싶은걸.”

오히려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매일 아침 말이야.”

“사양할게요. 황자 전하께 감히 그럴 수는 없죠.”

눈곱까지 껴 있는데도 저렇게 좋아하다니. 보통 콩깍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코를 판다든가 하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세르디스를 떨쳐내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소매로 쓱쓱 문지르며 머리를 굴렸다.

미처 방법이 떠오르기도 전에, 세르디스가 볼을 붉히며 작게 읊조렸다.


“우리가 결혼하면 황자라도 상관없는데…….”

엄청난 개소리를.

때마침 들어온 베티가 그 말을 들었는지, 놀란 눈으로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트레이에 올라가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내 상념도 단번에 와장창 깨졌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거 맞지?


“조심해야지.”

“화, 황자님……죄송합니다.”

“마카롱은 멀쩡하니까 괜찮아.”

베티에게서 내게로 시선을 돌린 남자의 수줍은 미소를 보니 내가 똑똑히 들은 게 맞았다.


‘결혼? 나랑?’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반대로 내 마음은 서늘하게 식었다.

이대로 가다간 안 되겠다.

세르디스가 내게 정식으로 약혼을 요청하는 날엔, 감히 백작 영애에 주제에 그를 거절할 수도 없다. 결국 꼼짝없이 묶이게 되겠지.


‘그럼……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강력한 퇴치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결단코 원작에서 하차하고 말리라 다짐하며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베티, 조심해야지.”

나는 걱정하는 척 베티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러곤 베티만 들을 수 있도록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앞으론 내가 하는 말에 맞다고만 해.”

“아가씨?”

베티 얼굴이 불안으로 물들었다.‘무슨 사고를 치려고 저러시나’라는 얼굴이었다.


“믿을게.”

하지만 옆에서 나만 바라보는 세르디스가 신경 쓰여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이 정도는 맞춰줄 거다. 우리는 십 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와아. 마카롱 정말 멋지네요. 황자님.”

나는 손뼉을 치며 마카롱으로 주제를 바꿨다.

하트 무늬 꼬끄에 하얀 필링, 이름 모를 빨간 과육에 화이트 초콜릿. 내가 전부 좋아하는 거였다. 이제 보니 벌써 내 취향까지 간파하고 있는 건가 싶어 살짝 소름이 돋았다.


“스페셜 마카롱이라더니 제가 본 마카롱 중에는 제일 멋져요.”

뒷짐을 지고 빙그르르 돌아 웃자, 세르디스의 불안했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네가 좋아해서 다행이야. 배고플 텐데 얼른 먹어봐.”

"그런데 이렇게 도란도란 마카롱 먹을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슬퍼지네요."

“마지막?"

그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남주를 정신 차리게 할 찬물을 뿌렸다.


“저 결혼해요.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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