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후회물인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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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후회물인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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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후회물인 줄 몰랐습니다
2022.12.03.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다.
남편을 보면 문득 이 말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계약 결혼의 끝.
남편은 대공으로서 입지를 다졌고, 나는 안전해졌다. 서로의 쓰임새가 다하여 더는 같이 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제 이혼해요.”
“오늘 점심은 부인이 좋아하는 기름진 스테이크로 할까요?”
“이혼하자는 말 안 들려요?”
“아니다. 요새 조금 부으신 듯하니 닭가슴살을 곁들인 샐러드가 좋겠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거절했다.
정확히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늘 하던 대로 한없이 다정하게 대해 줄 뿐.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와 더 살다간 빠져버릴 것 같은 위험 신호에, 강제로라도 이혼하기로 작정했다.
‘이혼 합의서에 인장을 찍으면 그만이지.’
깊은 새벽. 그의 인장을 몰래 훔치려고 집무실을 뒤적거리던 때였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위로 튀어나온 종이가 눈에 띄었다.
이렇게 잘 정돈된 방에서 유독 낡아 보이는 책.
나는 이끌리듯 그 책을 집어 들었다.
“마르카바 아카데미…… 졸업 앨범이잖아.”
그건 내가 다녔던 아카데미의 졸업 앨범이었다. 내가 졸업했던 해의 두 해 전 앨범.
남편도 마르카바 출신이었나?
의구심도 잠시, 졸업장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사진 더미에 손이 미끄러졌다. 봄날의 벚꽃처럼 흩뿌려진 사진 속엔.
“이건…… 내 사진이잖아.”
아카데미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순간 손끝에서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훅 끼쳤다.
‘내 사진이 왜 남편 집무실에 있는 거야?’
하지만, 어떠한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집무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니 조용한 집무실 안에 차분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
책장을 바라본 채로 히끅, 터져 나오는 딸꾹질을 억지로 삼킬 때였다.
“부인.”
귓가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지금 뭘 보고 계신 겁니까?”
아무래도 나, 호랑이 굴에 갇힌 게 맞는 것 같다.
***
내가 왜 호랑이 굴에 들어가게 됐는지 설명하려면, 시간을 꽤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 나는 외톨이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난치병으로 병실 구석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처지. 하나 있는 엄마는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아주 어릴 적 나를 버렸고, 어린 나는 나라의 지원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갓 성인이 됐을 무렵 병세가 악화되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슬플 것도 없었다. 나는 무조건 천국행일 테니까.
그런데, 눈을 떠보니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소독약 냄새도, 가습기 소리도 나지 않는 낯선 방. 가벼운 몸뚱어리.
“아네트 르앙베리아……?”
이름 한번 어려운 이 몸은 중세를 떠올리게 하는 고급 저택 안에 사는 11살 꼬마 숙녀였다. 손은 작고 귀여웠으며 뽀얀 피부에 에메랄드 눈동자가 인상 깊은 아이. 거울 속 새로운 나를 보자마자 이곳이 다른 세계임을 단번에 눈치챘다. 듣도 보도 못한 제국 이름과 이상한 지도. 거기에 길거리엔 마법을 사고파는 가게가 있었으니까.
“여긴 소설 속인가 보다.”
그렇다고 내가 주인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얼굴은 여자 주인공이라고 봐도 무색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배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통 소설 속 주인공과 달리 르앙베리아 백작가는 어느 귀족 집안보다 평화롭고 화목했으니까.
‘주인공은 불행한 법이니까.’
전생에 나처럼 말이다. 이번 생은 확신의 엑스트라 혹은 조연이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부유한 영지, 온화한 성품을 가진 백작 내외 아래 나는 누리지 못할 호사를 누리며 살았으니. 오히려 엑스트라라 더 좋을지도?
그렇게 외로웠던 시절을 잊고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중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녔던 15살 무렵 일이 터졌다.
“리안 오빠가 쓰러졌다고요?”
“어서 보건실로 가 봐. 부모님께도 연락드렸어.”
두 살 오빠인 리안의 벨라돈나 봉오리가 꽃을 피운 것이다. 르앙베리아 핏줄을 타고난 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몸에 새겨지는 단순한 문양에 불과한 그것이 피어날수록 리안의 열은 심해졌다.
“문양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련님의 병은 그저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가족들과 가문 사람 모두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리안은 오랜 시간 지속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슬픔도 잠시 리안이 죽은 다음 해, 내 날개 죽지의 벨라돈나 봉오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그늘이 나에게도 드리운 것이다. 몸은 삽시간에 약해졌고, 사람들은 이를 저주라고 떠들었다.
‘저주고 뭐고 또 허무하게 죽을 순 없어.’
그러나 노력과 반대로 약해지는 몸을 보며 허탈함이 들었다. 이대로 또 죽는 날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무력한 삶을 살던 그때, 세르디스를 만났다. 레퀴에스 제국 황자인 그가 연회에서 춤으로 시달리는 내게 손을 뻗은 것이다. 화려한 연회장에서 홀로 빛나는 보석 같은 사람. 그를 마주 보고 깨달았다.
‘얘가 내 구세주구나.’
그의 옆에 서자 숨통이 트이고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몇 년 만에 느꼈던 해방감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세르디스 곁에 붙어 있기로 작정했다. 그 방법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니까.
그를 만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황궁을 들락거렸다. 틈틈이 기회를 노린 끝에 세르디스가 아끼던 애완 새를 구했다. 덕분에 그의 눈에 드는 데 성공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고마우면 차라도 한잔 사주세요.”
옆에서 숨통이 트일 만큼의 친분만 원했을 뿐인데, 그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물었다.
“……나랑 데이트할래?”
예상보다 깊은 관심을 끌게 된 것 같았다.
“저야 좋죠.”
물론 나야 땡큐지만.
***
“에취!”
카페테라스에 앉아 차를 즐기던 나는 터져 나온 재채기에 입을 황급히 가렸다.
“춥지?”
곧이어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는 재킷에 몸이 흠칫 떨렸다. 시선 끝에 재킷에 달린 금색 휘장이 닿았다.
“괜찮은데…….”
“괜찮기는. 몸도 약하면서 얇게 입고 왔잖아.”
내 구세주, 세르디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남들이 보면 오해할 텐데…….”
“오해하라지. 나는 남들보다 네가 더 중요하니까.”
활짝 펼쳐진 제국의 날개 문양이 내 등에 달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침이 멈출 생각은 없었다.
“콜록! 콜록!”
“안 되겠다.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따뜻한 차를 내오라고 할게.”
그가 걱정하며 다가올수록 고통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으니까.
세르디스는 내 가방까지 챙겨 들고 손을 내밀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눈웃음이 지어졌다.
햇빛보다 따사로운 금빛 머리카락과 옹골찬 석류를 닮은 눈동자. 긴 목선을 따라 웨이브 진 머리가 퍽 잘 어울렸다. 그를 만날 때면 종종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지나가는 곳엔 꽃이 피는 것 같고, 그가 걷는 길엔 먹구름 한 점 들어서지 않는 느낌이랄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성인이 된 세르디스는 뭇 영애들의 마음을 몽땅 훔쳤다.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네.’
더불어 살기 위해 그에게 접근한 나까지도 눈 호강 중이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세르디스가 물었다.
묻긴 했지. 잘생김이.
“아니요. 그냥…….”
나는 수줍은 소녀처럼 종업원이 건네준 담요를 목 끝까지 올려 덮었다. 세르디스는 눈을 접어 웃으며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집요한 시선에 나는 담요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맞네.”
“네? 뭐가요?”
“너 예쁜 거.”
켁.
아침에 먹은 토스트가 올라올 뻔했다.
‘지금 나보고 예쁘다고 한 거야?’
주인공답게 솔직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무리하게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나온 보람이 있었다. 확실히 세르디스 눈에 띈 것 같으니까.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환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가방 속에서 약을 한 알 꺼내 삼켰다. 약효는 없지만 걱정이 큰 세르디스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 나를 보며 잔잔히 웃던 세르디스가 물었다.
“근데 약을 매번 먹는 거야?”
“날이 추워지면 하루에 한 번은 챙겨 먹는 편이에요. 겨울에 크게 앓았던 적이 많아서 부모님이 유난이신지라.”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많이 아프다고 생각할수록 더 걱정해 줄 테니까.
“어렸을 때부터 아팠다고 했지. 약은 주치의가 처방해 준 거고?”
“원래 주치의 선생님이 챙겨 주시는데, 이번엔 아버지가 새로 발견한 약초로 만든 약이래요. 저도 오늘 처음 먹어보는데 약이 많이 쓰네요.”
“고생이 많구나, 아네트.”
“아니에요. 약만 꾸준히 챙겨 먹으면 아픈 것도 없는걸요. 아마 마카롱 먹으면 싹 나을 거예요.”
씁쓸한 표정을 짓다 씩씩한 척 웃어 보였다. 내가 봐도 가여운 모습에 세르디스의 낯빛에 동정이 서렸다. 풋, 순진하기도 하지.
‘근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아까부터 몸이 둥둥 뜨는 기분이 들었다.
약효가 도는 건가? 그럴 리는 없는데.
아버지가 새로 가져온 약이라곤 하나 평상시와 다를 리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아파왔다.
‘이번에도 아프다고 하면 집에 보내려고 할 텐데.’
기를 쓰고 참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대신해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고 있자, 곧이어 마카롱이 나왔다.
세르디스가 구해준 보답이라고 주문해준 특별 마카롱이.
제철 과일이 콕콕 박힌 마카롱은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아네트, 맛있게 먹어.”
하지만, 나는 그토록 기다려왔던 마카롱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이명이 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큰한 두통을 끝으로 수상한 기억이 파도처럼 머릿속을 뒤덮었다.
‘왜 또 이게 떠오르는 건데.’
언젠가 꾸었던 악몽과 비슷한 종류의 기억이었다. 누군가 나를 잔혹하게 내치는 아픈 기억. 전생에 나를 버렸던 우리 엄마일까.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 잊고 싶었던 기억까지 떠올라 가슴이 조금 시큰거렸다.
“아네트 괜찮아?”
세르디스는 두통에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주며 다정히 물었다. 따뜻한 품이었는데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역한 통증이 계속되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상태가 심각했다. 아무래도 이 몸 상태로 계속 있다가는 증세가 심해질 것 같았다.
“전하.”
“응. 말해. 아네트.”
세르디스는 여전히 진심을 다해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집에…….”
겨우 그를 잡고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돌연 시야가 이지러지더니 눈앞에 있던 세르디스가 변하기 시작했다.
“전하……?”
온기가 가득 담긴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북방의 차디찬 공기처럼 서늘한 적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선에 손에 땀이 어리고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
“……아네트 르앙베리아를 변방으로 추방한다.”
응?
방금 뭐라고…….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물음이 괴로이 맴돌았다. 더는 내가 아는 세르디스가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르앙베리아 일가 또한 그 죄를 물어 모든 직위를 박탈한다.”
꿈에 나타나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었다. 왜 나를 괴롭혔는지는 뒤이어 쏟아지는 오랜 기억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이런 기억이라면 차라리 떠오르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내 속도 모르고 계속 밀려드는 두통과 기억을 끝으로 시야가 점멸했다.
***
악몽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다. 잔인한 이 현실이 악몽 그 자체였다.
이 세계로 빙의한 지 어언 십 년.
드디어 이곳이 어떤 소설 속인지 기억났다.
<당신의 처절한 후회를 바라며>
황자인 세르디스를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여주가 헌신하며 상처만 입다가 돌아서자 남주가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후회하며 구르는 전형적인 후회물이었다. 문제는 조용히 후회하고 사랑하면 될 것을 후회남이 된 세르디스가 거대한 굴렁쇠가 되어 여기저기 민폐를 끼친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8톤 굴렁쇠에 가장 먼저 치이는 건 바로 아네트 르앙베리아.
세르디스의 병약한 첫사랑이자 바로 빙의한 내 몸이었다.
세르디스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아네트를 짝사랑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상앗빛의 머리칼에 에메랄드를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소년의 마음을 움직였다. 눈동자 위를 덮은 긴 속눈썹은 눈을 감았다 뜰 때면 귀부인의 부채처럼 우아하게 펄럭거렸다. 더불어 병약한 몸은 어딘가 처연한 분위기까지 풍겨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세르디스에겐 특유의 마취 능력이 있어, 아픈 아네트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은 서로에게 이끌려 짧게 사랑하다 이별한다. 거기서 깔끔하게 끝을 맺었으면 좋으련만, 그녀를 잊지 못한 남주는 곁에서 자신만을 사랑한 여주에게 실수를 저지른다.
'넌 아네트처럼 발꿈치가 분홍색이 아니잖아.'
'아네트는 웃을 때 볼에 보조개가 파이는데……. 넌 웃는 게 안 예뻐.'
마음 약한 여주에게 내 이름을 팔아가면서 가스라이팅을 시전해 버리는 것이다
그 덕에 착한 여주인 비올렛은 나에 대한 극한 트라우마가 생겼고, 훗날 파티장에서 마주친 아네트를 보고 기절하는 지경에 이른다.
훗날 후회하며 구르는 세르디스는 아네트의 존재가 비올렛을 괴롭혔다고 착각해 그녀를 늙고 욕심 많은 변경백에게 시집을 보내버린다.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 아네트는 방치된 채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나 완전히 망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