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55화 (255/255)

제 255화. 수양 대군을 바라보는 세종의 시선 (1)

아이들 재롱을 보신 후 세종께서는 특유의 그 활력과 무시무시한 일처리 능력을 회복하셨다.

추석 지나고 있을 홍위의 성균관 입학을 계기로, 유교학부(儒敎學部)만 있는 기존 교육과정에 법제를 다루는 율학(律學),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상을 배우고 논하는 서학(書學), 수학과 기초 물리학을 가르치는 산학(算學), 동서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배우는 지리학(地理學) 등 여러 학부를 추가로 설치할 계획으로 집현전 학사들을 매섭게 몰아치셨다.

이 즈음 조선과 요동 일대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선은 이향 즉위 후 곳곳에 보를 파고 수차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가뭄에 꾸준히 대비해 왔고, 봄부터 전국에 경차관을 파견해 벼의 재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지역에는 재빨리 조 등을 심게 하여 대비했기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지역은 사정이 달랐다. 보리와 밀의 수확량이 현저히 줄어 식량이 부족해진 여진의 여러 부족은 두만강 이남의 회령, 여연, 압록강 이남의 의주 등에 와 곡식을 사 갔다.

문제는 조선과의 국경 무역 허가권을 받지 못한 건주 여진 이만주 일족이었다. 이들은 동팔참을 넘어 명나라 일대와, 압록강을 넘어 조선 일대를 노리며 연일 도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병조판서 김종서는 아예 의주에 머물며 이징석, 이징옥, 최숙손 등과 함께 곧 있을 북방 공략안의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북방의 긴장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을 때.

드디어 수양 대군이 신숙주, 유응부 등과 함께 대마도를 지나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추석이 가까워진 8월 초였다.

경복궁 궐 안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역사에서 수양 대군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되신 세종이 처음으로 수양 대군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종은 수양 대군의 귀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 채 이향에게 처분을 맡겨두고 성균관의 학부 개편, 그리고 의학, 과학 대학 설립에만 관심을 쏟으셨다.

이향은 여느 때처럼 만기친람하는 국왕 업무에 분주한지라 수양 대군과 신숙주, 유응부가 입궐하여 보고하길 기다릴 뿐이다.

불안해지신 것은 소헌 대비였다.

이른 봄 상왕 전하는 양녕 대군과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신빈의 아들 계양군까지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그 이후 왕족에도 전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을 공표하였고, 또 살갑게 어여뻐하던 여러 아들과 심지어 정의 공주에게까지 거리를 두었다.

“중전, 아니, 윤서야. 내가 대비가 아니라 여러 아이를 둔 어미 입장에서 물을 것이니, 윤서 너도 중전이 아니라 아이들 어미 입장에서 솔직하게 답을 하거라.”

수양 대군이 충청도 일대를 지나고 있어 다음날 마포 나루에 도착하게 될 것이란 급보가 도착한 날.

홀로 마음을 끓이시던 소헌 대비께서 교태전 서온돌로 윤서를 불러 물으셨다.

“윤서 너는 본시 사람의 심리를 잘 알뿐더러 또 천추전에서 상왕 전하와 거의 매일 여러 현안을 논의하지 않니. 그러니 그 누구보다 전하의 심정을 잘 알 거라 믿고 묻는 것이야.”

세상에.

교태전으로 돌아오신 후 아침 저녁으로 홍위와 금동이, 새벽이와 지내시면서 건강이 좋아지셨던 소헌 대비께서 손까지 떨고 계셨다.

윤서는 소헌 대비의 불안을 이해하였다.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셨던 친정아버님 심온이 국경에서 잡혀와 역모 혐의로 돌아가셨던 그 충격이, 혹여 수양 대군도 귀환하자마자 일을 당할까 두려움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대비마마, 무엇이든 물으시면 성심껏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솔직하게 묻겠다. 우리 유가 저 먼 나라까지 갔다가 해를 넘겨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는데도 전하께서 저리 무심하신 것이, 혹시 무슨 일이 장차 생길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냐?”

“아니에요, 대비마마. 상왕 전하께서는 근자 성균관 일과 새로 전문 기술 대학을 설립하는 일에 집중하시고 계실 뿐입니다.”

“그래? 윤서 네가 그렇다면, 참말로 그러한 것이지.”

어두웠던 소헌 대비의 얼굴이 불을 밝힌 듯 환하게 피어났다.

안도한 대비께서 문득 서글프게 웃으셨다.

“윤서 너만은 내 마음을 알 것이다. 자식을 열 명이나 함께 낳았으면서도 직접 상왕께 묻지 못하는 이 마음을, 중전인 너만은 알 것이야.”

안다.

중전은 많은 왕자를 낳아야 할 의무를 가지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장차 왕이 될 적장자를 제외하고 다른 아들의 처신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의무도 함께 가진다는 것을.

그나마 친정이 없다시피한 윤서는 처지가 나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내내 마음을 졸이시는 소헌 대비의 처지가 너무 딱해서,

윤서는 대비께서 입술만 달싹이시며 차마 말씀하지 못하는 청을 먼저 올렸다.

“대비마마, 내일 저와 함께 마포 나루에 마중 가시겠습니까? 명례궁의 부부인도,”

“그래도 되겠니? 그래 주겠어? 내 아까부터 실은 말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되는 것이야?”

윤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헌 대비가 반색을 하며 물으셨다.

소헌 대비는 벌써부터 마중을 가자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직접 마중을 나가 자신이 얼마나 아들을 아끼는지 상왕과 이향에게 보여죽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그래서 혹시 상왕께서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셔도 자신을 봐서라도 다시 한 번 재고하실 수 있도록.

친정아버지의 비극 같은 일이 아들에게 벌어지지 않도록.

“예 대비마마. 제가 차비 해 놓겠습니다.”

이 정도는 된다.

수양 대군은 새봄이 오기 전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할 터이니.

*

*

*

“잘하시었소, 부인.”

밤늦게 협경당으로 돌아와 다음 날 소헌 대비를 모시고 마포 나루에 마중을 나갈 것이란 말을 들었을 때.

이향은 그저 고맙다고만 말하였다.

머리를 빗겨주던 윤서는 빗을 놓고 이향의 널찍한 등에 얼굴을 묻었다.

자식을 마음껏 사랑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란 무게를 함께 진 자들이 나누는 위로이자,

또 그런 무게를 딛고 필요한 일은 가차 없이 행해야 하는 자들이 나누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그 시각.

천추전에서 돌아온 세종을 맞이한 소헌 대비도 같은 말을 고하고 있었다.

“중전이 아마 명례궁 아가를 위로하고 싶어서 저까지 함께 가자고 한 듯 싶습니다. 중전의 마음 씀씀이가 포근하여서 참으로 기특합니다.”

소헌 대비는 자신이 무척 가고 싶은 마음을 윤서가 먼저 헤아렸다는 말씀을 차마 하지 못하고 며느리 칭찬으로 대신 허락을 구하고자 하였다.

세종은 문득 대비가 몹시 가여워졌다.

이렇게 자식을 몹시 아끼니, 원래 역사에서 광평과 평원을 잃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뜬 것이겠지.

“대비, 날이 많이 선선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해가 뜨거우니, 배가 한강 어귀에 들어섰다는 소식이 도착하면 나가시오. 미리 가서 고생하지 마시고.”

세종은 내관 조창의를 불러 명하였다.

“파루가 울리자마자 발 빠른 말을 보내 수양의 배가 마포 나루에 도착하기 한 시진 즈음 전이 언제일지 중전에게 고하거라. 그리고 대비와 중전이 내일 마포 나루에 가실 것이니 미리 차질 없이 준비하라 이르거라.”

조창의가 나간 뒤, 세종의 명에 감동한 소헌 대비가 조심스럽게 여쭸다.

“상왕께선 바쁘신 게지요? 함께 마중 가시기 어려우신 게지요?”

“···내가 많이 분주하오. 대신, 수양이 오면 따로 주연을 베풀어 위로할 것이오.”

이것이 세종이 아들의 어미인 대비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

*

*

팔월 초엿새 늦은 오후.

밀물 때에 맞춰 거대한 함선 두 척이 마포 나루에 들어왔다.

배가 정박하자 무역을 위해 따라갔던 상인 무리, 호위를 위해 갔던 수군 갑사와 병사가 먼저 내리고 맨 나중으로 항해의 책임자인 수양 대군, 외교 책임자 신숙주, 그리고 호위 책임자 유응부가 내렸다.

“어머! 저기, 우리 자가 내리셨어요!”

마포 나루 어귀 빈터에 높게 차일을 치고 앉아 있던 소헌 대비와 윤서, 그리고 그 옆의 윤씨, 뒤에서 여동생 손을 잡고 서 있는 도원군 중에서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가 제일 먼저 수양 대군을 알아보았다.

낭군을 알아본 윤씨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안고 있던 어린 아들 은동이를 뒤에 서 있는 유모 품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꽃분홍 대란 치마 자락을 두 손으로 잡아 들고는 수양 대군을 향해 힘껏 달려가기 시작했다.

깜빡깜빡 졸고 있다가 갑자기 유모 품에 안기게 된 세 살 은동이가 와앙 울음을 터트리는데도 윤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가! 자가! 소첩 왔습니다, 자가!” 소리치며 달려간다.

“아이구, 은동아, 이리 오너라. 너의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가 무척 그리웠던 모양이다.”

소헌 대비가 우는 은동이를 안으려 하셨다.

“제가 안겠습니다, 대비마마.”

연로하신 대비께서 혹여 토실한 은동이 안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실까, 윤서는 무릎에 앉아 있는 새벽이를 내리게 하고 은동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으앙, 어머이이.”

영문을 모르는 은동이는 윤서에게 안겨서도 윤씨를 향해 팔을 뻗고 발버둥을 치며 울고,

“우디마라, 은동아. 너의 어먼니 곧 오시 꺼야.”

새벽이가 은동이 다리를 토닥거리며 달래는데, 멀리서 수양 대군 품으로 곧장 뛰어드는 윤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 성큼성큼 먼저 걸어 온 신숙주와 유응부가 소헌 대비와 윤서를 향해 절을 올렸다.

“대비마마, 중전마마, 강녕하셨습니까?”

“먼 항해에 고생이 많았네.”

“아주 보람이 많은 항해였습니다, 대비마마. 많은 성과를 내고 상왕 전하와 주상 전하를 뵙게 되어서 무척 기쁘옵니다.”

신숙주는 슬쩍 자신이 거둔 성과를 대비마마께 자랑하고, 유응부는 그저 깊게 허리만 숙일 뿐이다.

“저희는 두 분 전하를 뵙기 위해 먼저 입궐하겠습니다.”

신숙주와 유응부가 물러난 후, 드디어 수양 대군이 차일 아래에 당도하였다.

“어마마마, 중전마마.”

엎드려 절을 올린 수양 대군이 다시 몸을 일으켜 소헌 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마마마, 소자 돌아왔습니다.”

“그래! 잘 왔다. 아이쿠, 얼굴이 세상에, 이렇게 검어졌어?”

“햇살에 타서 그런 것일 뿐 소자 건강하옵니다, 어머니.”

대마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지기에서 그간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상세히 듣고, 특히 아바마마께서 여러 대군에게 냉정해지셨다는 말에 내심 불안에 떨었던 수양 대군은 모친 소헌 대비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어마마마께서 이리 마중을 나오실 만큼 강녕하시니, 소자 기쁘기 한량이 없습니다.”

“네가 온다고 하니 무겁던 몸이 아주 가벼워졌어. 가자, 어서 궐에 가자. 내 수라간에 보양식 많이 준비해 두라 이르고 나왔느니.”

“예, 어마마마.”

수양 대군이 얼굴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도원군이 여동생을 앞세워 수양 대군 앞으로 나왔다.

“아버님, 무사히 다녀오셔서 소자 참으로 기쁘옵니다.”

“아버님, 보고 싶었어요.”

“그래, 많이 컸구나. 우리 현동이도, 우리 현숙이도 참으로 많이 컸어.”

두 아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린 수양 대군이 마침 은동이를 윤씨에게 다시 건네려는 윤서를 향해 돌아섰다.

수양 대군의 시선이 어린 아들을 조심스럽게 내밀고 있는 윤서의 팔로 향하였다.

“중전마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자가.”

인사는 짧았지만, 많은 의미가 함축된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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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다음 날.

세종께서는 수양 대군을 따로 창덕궁 희정당으로 부르셨다.

모두 물리고 어린 세자만 동석하게 한 독대였다.

무릎에 홍위를 앉힌 채 수양 대군의 절을 받은 세종께서 물으셨다.

“무엇을 느꼈느냐?”

하문하시는 음성은 의중을 알 수 없이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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