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9화. 홍위의 조선은 (2)
“음······. 아바마마께서 학당보다 상급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준비 중이시니, 함께 의논을 드립시다. 나는 부인이 언젠가 말한 그 ‘사관 학교’ 같은 것을 설립하면 좋을 같아. 전문 군관 계층을 체계적으로 기를 필요가 있소.”
목 뒤와 어깨를 잇는 근육을 풀어주는 윤서의 손길이 기분 좋은 통증을 일으키는 듯 눈썹을 움찔거리며 이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조선과 여진족과의 국경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그 위 몽골의 여러 부족까지 면포와 최근 제조해 유통하기 시작한 기초 의학품을 구하러 오고 있다.
이향은 무역을 하러 왔지만 언제든 약탈자 무리로 변할 수 있는 북방의 말 탄 유목민과 우리 측 상인 모두에게서 거래 금액의 일 할을 관세로 받아내는 일, 또 농한기를 이용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도록 북방 농민에게 모의 전투 훈련을 시키는 일, 신입 군병으로 뽑힌 자들을 빼어난 군인으로 키워내는 일을 담당할 지휘자급 전문 군인 집단을 체계적으로 양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또 이제 장거리 항해를 지휘할 수군 지휘관도 필요하오. 전문 항해 지식뿐 아니라 무역하러 가는 곳의 관습과 풍토 등을 익혀 새로운 개척지를 운영할 군인 계층도 필요하니, 부인이 읽었다는 그 오스만 제국의 인재 교육 체계 도입을 고민할 적정 시기요. 다양한 곳에서 온 인재를 교육하는 상급 교육 기관에서 홍위가 시야를 넓히는 것은 정말 유용할 것이오. 내가 막 뻗어나가는 치세라면, 홍위는 넓어진 영역을 통합하며 다스리는 치세를 펼쳐야 할 것이니. 그런데, 부인.”
이향이 몸을 돌려 눈을 맞춰왔다.
“늘 홍위가 여느 아이들처럼 철없이 밝게 이 시기를 보냈으면 소망하던 부인이 학당이란 호의 속에 유사시를 대비한 볼모라는 계책을 함께 심어낼 정도로 훌쩍 커버린 홍위를 이리 기특해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아!”
부드러운 촛불 아래 실타래처럼 늘어진 이향의 머리카락 속에 희끗희끗한 흰 머리카락 몇 개가 은색 실처럼 빛을 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스물아홉 수려하게 젊음을 피워내고 있던 이향은 이제 서른다섯,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눈가에는 두 가닥 커다란 주름이 지고, 이마에도 서너 개 옅은 주름이 패인 이향의 얼굴에서 윤서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그 세월은 데데한 발음으로 종종 울먹거리던 꼬마 아이를 어엿한 세자로 만들고, 눈길이 부딪칠 때마다 뜨겁게 육체를 탐하던 이 사내를 느긋하고 다정한 지아비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세월은 21세기의 인간 권윤서를 15세기 조선의 중전으로 만들기에도 충분히 길었다.
“제가, 변하였어요, 전하. 홍위가 저만의 어린아이가 아니고 전하의 뒤를 이어 조선을 통치할 세자라는 것을, 그리하여 홍위가 세자답게 스스로 깨쳐가는 행보를 기꺼이 환영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래요. 세자의 자리는 어렵고 고독한 자리요. 위로는 국왕을 모시고 있으면서, 또 장차의 권력을 쥔 자로서 선의로 포장한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바꿀 태세야 되어 있어야 하는, 그런 자리. 여덟 살에 벌써 그런 정치권력의 세계에 눈을 뜬 홍위 곁에 언제나 믿음과 지지를 보내는 부인이 있는 것은 큰 행운이오. 그런데, 좀 서운하네.”
진지하게 말하던 이향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생각하니 정말 서운한데.”
“으응? 뭐가요, 전하?”
“오랜만에 비현각에 갔었다면서 어째서 홍위와 그 북방 청년들 이야기뿐이오?”
“······??”
“우리의 처음이 다 비현각에서 일어났는데.”
우리의 처음!
양 귀인 무리에게 다짜고짜 끌려가 꽃잎 뿌린 물에 목욕당하고 사향 냄새 진한 향낭을 매단 채 비현각에 들게 되었던 그 처음과,
스스로 곱게 단장하고 엄 상전이 든 등롱의 불빛을 따라 어둠이 내린 길을 자박자박 걸어가 미래에서 온 영혼임을 밝히던 그 떨리던 순간과,
믿기 어려운 고백에도 흔쾌히 자신만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하며 마침내 몸을······!
자선당을 지나 비현각에 들어서면서부터 홍위와 여진족 후계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서도 내내 머리 한쪽과 몸 깊숙한 곳을 은은히 들뜨게 하였던 ‘처음’의 순간이 다시 강렬하고도 세세하게 재생되었다.
맹세하건데, 이향보다는 자신이 그 모든 처음의 순간을 더 상세하게, 더 강렬하게, 더 애틋하게 추억할 것이다.
한밤의 깜짝 이벤트를 실은 준비해 두었을 만큼.
“전하, 고단하세요?”
“으응? 아니, 괜찮은데.”
“그럼, 눈을 감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윤서는 이향의 눈꺼풀을 쓸어 눈을 감게 한 후 침전을 나와 뜰 건너의 작은 전각으로 향했다. 윤서의 의복과 장신구 등을 보관하는 전각이었다.
초저녁에 명을 받고 대기하던 꾸밈 담당 나인 둘이 앉아서 꼬박꼬박 졸고 있다가 윤서가 들어서자 서둘러 일어섰다.
“잘 구비해 놓았느냐?”
“예, 중전마마. 향낭에도 너무 과하지 않은 사향을 넣고 찔레꽃 추출 향수도 함께 뿌려두었습니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한다.”
서너 번 눈을 깜빡여 졸음을 쫓아낸 허가 나인과 구가 나인이 능숙한 손길로 윤서의 머리를 빗긴 후 윤이 나도록 동백꽃 기름을 살짝 바르고 두 갈래로 땋아 정수리에 어여쁘게 붙이고 붉은 댕기를 드려 새앙머리로 꾸며주었다.
‘나는 아직 농염해지는 중이니.’
서른다섯으로 중년의 초입에 들어선 이향과 달리 열여덟 권가의 몸에 들어온 윤서는 이제 스물넷의 육체를 가졌다. 아이 둘을 낳았어도 어렵지 않게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젊음의 나이이자,
‘실은 무척 노력하고 있지.’
윤서는 노력하고 있었다.
여러 후궁과 희첩을 거느리는 것이 마땅한 이향의 오롯한 애정에 보답하기 위해 자녀를 열 명이나 낳고도 여전히 여인의 매력이 은근하신 소헌 대비께서 귀띔해 주신 왕실의 비법과,
윤서가 중전이 되면서 상왕의 후궁 중 확고부동한 최고의 지위를 가지게 된 혜빈 양씨가 싹싹 모아준 어심을 사로잡는 비법과, 또 박 상궁이 명나라에 나가 있는 상단을 통해 입수한 명 활실의 비법까지 모두 읽어보며 노력하고 있었다.
그 중의 상당수는 근거 없이 황당한 것이어서 그저 비누 세안으로 깨끗하게 피부를 가꾸고, 늘씬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하고, 스스로 만든 화장품을 발라 영민하게 빛나는 눈빛을 돋보이게 하는 정도일지라도 매일 틈이 나는 대로 미모에 신경을 썼다.
“어머나 중전마마. 정말 예전 그 보모 나인 시절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아니 풋풋하셨던 그때보다 오히려 더 매력이 넘치게 아름다우셔요.”
입술에 연하게 연지를 칠한 구가 나인이 요란하게 칭송하였다.
윤서는 앞에 놓인 청동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은은하게 반사하는 거울 속 모습이 구가 나인의 칭찬이 완전히 빈말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수고했네. 이제 돌아가 쉬게.”
조금은 쑥스러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윤서는 다시 침전을 향했다.
침전의 뜰에는 호위 내관을 세우지 않는 것이 이런 때는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마루에서 번을 서는 나인들조차 다 물린 깊은 밤이라 손수 문을 밀어 침전에 들어섰을 때.
“기대하고 있었지, 권가 나인!”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뜬 이향이 입꼬리를 쑥 올리며 나인 복장의 윤서를 샅샅이 살폈다.
윤서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하얀 버선이 살풋 드러나게 한 채로 우아하게 몸을 팽그르 돌려 보인 후, 눈썹을 깜빡거리며 유혹하듯 속삭였다.
“기대에 부응하였나요, 전하?”
“기대 그 이상이다, 권가야.”
“그럼, 상을 주세요.”
“상이라. 뜨거운 승은을 내려주지.”
“전하, 평소 여색에 무심하시어 종사의 근심이 되셨던 전하를 이리 과감하게 유혹하는데 승은만으로 되겠사옵니까?”
윤서가 짐짓 투정과 야양을 섞어 연지를 칠한 입술을 뾰로통 내밀자, 이향이 ‘세상에, 부인에게 이리 발칙한 면모가 있었소?’ 하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뜨거운 밤의 열락과 더불어, 전하.”
“고하라. 무엇이든 다 내려줄 것이니.”
나인 둘이 공들여 매어준 옷고름을 풀며, 윤서는 이향의 귀에 요염하게 속삭였다.
“전하처럼 어여쁜 공주를 주세요. 경혜 공주 자가의 궁이 완성되어 이제 완전히 출궁하시고 또 선아 옹주도 조만간 혼례를 올리실 것이니, 궐 안에 금아 옹주만 남게 되잖아요.”
“내,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다음날 파루가 울리기도 전에 경복궁 안에는 중전마마가 나인 복장을 하고 전하의 마음을 다시 한번 단단히 차지하였다는 소문이 은밀히 퍼져나갔다.
그 후로 한동안 궐의 여인들은 물론 여염의 여인들에게까지 사향과 찔레꽃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향냥을 달고 다니는 것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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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에 왕실 학당 분원을 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안이나, 당장 상급 군사 학교를 세워 세자가 입학하는 것은 무리이다.”
조선의 교육을 주관하는 세종께서 홍위가 낸 안을 보름 넘게 심사숙고하신 후 내리신 결론이었다.
“홍위가 낸 안처럼 농사가 끝난 늦가을에 경원에 학당 분원 하나를 세우기로 하자꾸나. 한양에서 가르친 것과 같은 과목에, 중전이 말한 것처럼 의원과 의녀를 키워낼 수 있는 과정을 별로로 하나 더 넣기로 하면 될 것이다.”
그래야 여진의 여러 부족장이 학당의 의도를 좀 의심하더라도 절실한 필요에 의해 영민한 인재를 보낼 것이란 계산이셨다.
“광평은 회령에 보낼 선생으로 인품과 학식 모두 빼어난 자들을 가려 엄격히 선발해야 할 것이다. 선생의 월봉은 일단 내수사에서 넉넉히 지급하는 것으로 하고.”
윤서가 광평 대군에게 슬쩍 인재를 천거하였다.
“의원으로서 학당에서 의학 분야를 가르치기에 적당한 이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간 무창과 의주 등지를 오가며 우리 조선 백성은 물론 여진인도 가리지 않고 진료하여 아주 신망이 높은 부부 의원입니다.”
신망이 높은 부부 의원은 바로 전날 이향의 후궁이었던 권 승휘와 그의 남편이었다. 아들 하나를 낳은 권가는 특히 여진족 여인들의 해산과, 어린아이들의 치료에 탁월한 신력을 보여 여진인 사이에서 명성이 아주 높았다.
세종은 군사 사관 학교 설립안으로 의제를 넘겼다.
“상급 군사 학교를 세우기까지 먼저 두 가지가 선결되어야 한다. 첫째 홍위가 먼저 성균관에서 유학 공부를 마쳐야 한다. 조선의 국시는 유학이야.”
국시가 성리학이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세종은 요새 조선의 유학 학풍을 개인의 수양을 중시하는 성리학 일변도에서 공자 시대의 통치이념으로서의 유학으로 되돌리려 하고 계셨다.
심성을 닦아 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성리학의 발전이 역사 속 홍위와 조선의 비극을 막는 데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풍토 속에서 학자의 우월감만 턱없이 높이며 백성의 삶과 유리되었다는 반성에서였다.
그래서 공자의 유학이 정치 분야에서 가장 중시하는 근본적인 가르침,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를 필두로, 주자의 해석이 가미되지 않은 유학 원전과 그 해석을 따로 재구성하라는 명을 성삼문, 이개, 최항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려놓으신 상태였다.
“홍위가 삼 년간 성균관에서 성삼문 등에게 유학을 배운 후, 열두 살이 되어 어엿한 사내가 되었을 때 군사 학교에 들어가야 여러 곳에서 온 다양한 인재들과 진정으로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에 유학 온 인재에게 제대로 된 군사학과 지도자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그만큼의 준비 기간은 필요하다.”
“그럼, 아바마마. 대신 하급 군사 학교를 세워서 상급 군사 학교에서 가르칠 내용을 미리 확립해두면 어떻겠습니까? 마침 세자 저하와 함께 학당을 졸업한 왕실과 공신 자제가 많은데, 이들 중 무과를 희망하는 이들을 가르치면서 말입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럼 광평, 네가 여러 분야의 인재들과 함께 과목을 만들거라. 태조 대왕을 도왔던 원로들을 적극 활용하고.”
“예, 아바마마.”
“···외교술도 가르쳐야 할 터인데, 그건 신숙주와 함께 수양에게 묻거라. 머지않아 수양이 올 것이라 하니.”
“예, 아바마마. 유응부도 올 것이니 항해 실무에 대해서는 그와 함께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교육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군기시로 가자!”
4월 말.
이향이 드디어 군기시의 장인들과 함께 개인용 총포를 만들어 내병조 군관에게 훈련을 시켰다.
오늘 그 시연이 있는 날이었다.